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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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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혁인가 해체인가

공작정치에 대한 보수 정권의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 ‘국정원 제자리 찾기’
좌절시켜… 청산되지 않은 TK 인맥들 MB 정부 들어 부활
등록 2013-07-02 15:40 수정 2020-05-03 04:27
참여연대·한 국진보연대 등 213개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6월2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시국회의를 열어 ‘국정원의 정치공작 및 대선개입 진상규명’을 요구했다.김명진

참여연대·한 국진보연대 등 213개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6월27일 서울 중구 정동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시국회의를 열어 ‘국정원의 정치공작 및 대선개입 진상규명’을 요구했다.김명진

국가정보원 ‘전횡시대’다. 전횡은 저항을 부른다.

‘박근혜 국정원’의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 공개는 ‘국정원 해체’ 목소리에 기름을 부었다. ‘이명박 국정원’이 대통령 선거 개입으로 불 지핀 해체 요구가 세를 불려가고 있다. 시국선언을 시작한 대학생들은 물론 시민사회단체, 교수, 언론인, 종교인, 농민, 고등학생들까지 동참하고 있다.

국정원 재구성은 진보 진영만의 요구가 아니다. 6월26일치 사설(‘국정원 국정조사 대북 전념 정보기관 만드는 계기 돼야’)은 국정원을 ‘대북정보 수집 전문기관’으로 만들 것을, 이튿날 사설(‘국정원 국정조사, 개혁 염두에 두고 철저히 하라’)은 국정원의 국내 정보 활동 재검토와 국회의 통제 강화를 주문했다. 2006년 3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제출한 법 개정안은 훨씬 전향적이다. 국회에 국정원장 탄핵권을 부여하고 국회의 국정원 예산 감독·통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담았다. 당시 야당으로서 여당(열린우리당)을 견제하려는 의도가 반영됐다. 불법 활동과 정치 관여 행위 처벌 조항도 신설토록 했다.

보수 진영과 진보 진영의 교집합 많아
박 대통령은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주군을 지키려고 빼든 국정원의 칼날이 머리를 돌려 주군을 겨누고 있다.

진보 쪽 주장과도 교집합이 많다. 참여정부 시절인 2005년 당시 민주당과 국회 정보위원회 등이 주최한 국정원 개혁공청회가 잇따라 열렸다. 안기부 ‘미림팀’의 불법 도청 사실이 폭로된 직후였다.

국정원 수사권과 국내 정보 수집 권한을 폐지하고 해외 정보 기관으로 탈바꿈시킨다는 복안이었다. 시민사회와 야당의 국정원 개혁 방향은 지금도 이 틀을 유지하고 있다.

국정원은 대한민국 정부 부처 중 개혁논의가 가장 많았던 기관이다. 개혁 실패는 청사진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뼈대는 참여정부 초기인 10여 년 전부터 세워져 있었다. 공작정치에 대한 보수 정권의 포기할 수 없는 욕망이‘국정원 제자리 찾기’를 좌절시켜왔다.


김용판이 만난 사람
폭발력을 더해가는 지뢰밭
지난해 12월16일. ‘그날’이 밝았다.
김용판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청사 내에서 ‘어떤 사람’을 만난다. 서울경찰청을 담당하는 국정원정보관(IO·Intelligence Officer)이었다. 두 사람은 모종의 대화를 나눈다. 앞서 혹은 이후 김 전 청장은 이광석 수서경찰서장에게 전화를 건다. “곧 디지털 증거분석 결과가 나올 텐데 결과가 나오면 바로 중간 수사 결과(대선 후보에 대한 비방·지지글 게재 사실 발견되지 않음)를 발표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검찰의 김용판 공소장) 그리고 이날 밤 11시께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문제의 보도자료’가 발표된다. 진선미 민주당 의원실에 따르면, 김 전 청장이 만난 국정원 직원은 국내 정보 수집을 담당하는 국익정보국 소속이었다. 당시 국익정보국장은 박원동씨였다. 민주당 의원들이 김 전 청장과 국정원 간의 연결고리로 지목하는 인물이다. 그는 권영세 당시 박근혜 대선 캠프 종합상황실장이 국회 정보위원장이던 시절 국회에서 파견 근무를 했다. 김 전 청장과 같은 영남대를 나왔고, 김 전 청장은 경찰 입문 전 국정원에서 일했다. 박영선 민주당 의원은 “검찰이 박원동 전 국장을 수사하면 (대선 개입 및 여권과 연루 정황이) 다 나오게 돼 있다”고 주장한다. 민주당은 박 전 국장을 검찰에 고발한 상태다.
수사 결과 발표 뒤에도 김 전 청장은 여전히 의혹투성이다. 검찰은 김 전 청장을 공직선거법 및 경찰공무원법 위반, 직권남용 혐의로 불구속 기소했으나 범행의 동기와 배후는 밝혀내지 못했다. 현재 김 전 청장의 국정원 대선 개입 증거 은폐와 새누리당과의 연루 의혹은 ‘없는 사실’이 아니라 ‘확인되지 않은 사실’일 뿐이다. 여권에서도 김 전 청장을 두고 ‘아슬아슬한 지뢰밭’이란 이야기가 나온다.
김 전 청장은 최근 한 언론에 권영세 전 실장과의 전화 통화 사실은 부인하면서도 박 전 국장의 ‘수사 결과 발표 독촉 전화’(12월16일)는 인정했다. 국정원의 주문 혹은 압박이 있었다는 사실까지는 시인한 셈이다. ‘박원동으로 꼬리 자르기’란 시각도 있고, ‘나를 지켜주지 않으면 위험할 수 있다’는 메시지란 해석도 있다. 한 민주당 관계자는 “권 전 실장과의 통화를 부인한 것은 자기 보호를 위한 마지막 끈만큼은 남겨두겠다는 의도”라고 풀이했다. 수사 결과를 은폐하면서까지 감춰주고자 한 쪽과 등을 돌리지 않는 이상 구명과 향후 입지를 위해선 결코 ‘깔 수 없는 패’란 얘기다.
현재 검찰의 ‘김용판 추가 수사’는 큰 진전이 없는 상태다. 검찰은 지난 5월 “김 전 청장이 사건 당시 여야 정치인 여럿에게 수시로 전화를 받았다”고 했으나, 수사 결과 발표 땐 “정치권이나 청와대 관계자와 통화한 사실이 없다”고 말을 바꿨다.
지난해 대선 직전 권 전 실장의 ‘NLL 대화록 기획’ 정황이 드러나면서 국정원 대선 개입의 ‘실체’도 급변하고 있다. ‘김용판 지뢰밭’과 얽히며 뇌관은 폭발력을 더해가는 중이다.

국가정보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와 국가안전기획부는 처음부터‘정권 보위’를 위해 탄생했다. 정치적 경쟁자들에 대한 정보 수집은 공작정치의 젖줄이었다. 국익이 아닌 정권을 위해 정보를 왜곡하는 현상이 빈번했다. 참여정부는 상대적으로 정보기관 개혁에 의욕적이었다. 초점은 ‘탈정치·탈권력화’에 맞춰졌다. 대통령 대면보고가 없어졌고, 정치권 동향 파악과 사찰이 금지됐다.과거사 진실 규명 활동도 병행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적극적인 개혁 프로그램과 연결시키지 못했다. 미완의 인적 청산과 제도화 실패로 개혁은 표류했다. 한 전직 국정원 고위 간부는 “기득권 세력에 대한 과감한 인적 쇄신을 해내지 못했다. 조직 이기주의를 방치한 셈”이라며 “청산되지 않은 TK(대구·경북) 인맥들이 MB 정부 들어 고스란히 부활했다”고 전했다.

촛불에 놀란 이명박 정부는 국정원을 공작정치의 시대로 퇴행시켰다. ‘원세훈 국정원’은 인터넷 댓글로 대통령 선거에 개입했다. 박근혜 정부의 ‘남재준 국정원’은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해 ‘대선 개입 책임론’ 돌파에 나섰다. 박 대통령 쪽은 후보 시절부터 ‘북방한계선(NLL) 대화록 공작’을 펼친 사실까지 드러났다. 전직 국정원 직원은 “국정원을 움직이는 동인이 국가안보가 아닌 ‘정권안보’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말했다.

통일 관련 정보 주관, 수사권은 검경으로 이관

현재 시민사회(공안기구감시네트워크)와 민주당(진성준 의원)은 국정원을 ‘통일해외정보원’으로 재편하는 법 개정안을 각각 입법청원하고 발의한 상태다. 국내 정보 수집 기능을 없애 정치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되 통일 관련 정보를 주관토록 했다. 인권침해 논란을 일으켜온 수사권도 검경으로 이관하는 방안을 택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영국의 해외정보국(MI-6), 독일 연방정보부(BND), 이스라엘 모사드는 수사권을 갖고 있지 않다. 정보기관으로서 국정원의 우월적 지위를 보장해온 정보·보안업무 기획조정 권한도 국가안전보장회의(NSC)로 넘기도록 했다.

현재의 국정원은 국가보다 ‘주군’이 우선이다. 주군이 국정원을 동원해 국내 정치를 뒤흔들 때, 국정원은 주군에게 봉사하며 영향력을 확장해왔다. 국가정보원이 아니라 ‘정권보위부’란 비난을 받는 이유다. 진선미 민주당 의원은 “박 대통령이 국정원 대선 개입과 NLL 대화록 공개 사건을 어떻게 마무리하느냐에 따라 사태가 최소화될 수도, 현 정권 전체의 문제로 비화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은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주군을 지키려고 빼든 국정원의 칼날이 머리를 돌려 주군을 겨누고 있다.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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