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20일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팀(팀장 윤석열)이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를 19시간 압수수색했다. 지난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서울 수서경찰서가 국가정보원의 대선 여론 조작 의혹 사건을 수사할 때 경찰 수뇌부가 수사를 축소하도록 외압을 행사했는지 밝혀내기 위해서다.
2010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 2013년 경찰 수뇌부의 국정원 댓글 수사 축소 등 국가권력이 저지른 범죄를 공무원이 증거인멸로 비호하는 똑같은 불법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종이파쇄기에서 분쇄된 문서의 모습. 한겨레 윤운식 기자
| |
오전 9시50분 검찰이 서울경찰청에 들이닥쳤다. 사이버범죄수사대의 박아무개 증거분석팀장은 안티포렌식 삭제 프로그램 ‘무오’(MooO)를 관용 컴퓨터에 돌리고 있었다. 의미 없는 암호나 문자를 반복해 덮어씌워 데이터를 파괴하는 프로그램이다. 압수수색 현장에서 증거인멸을 시도한 정황이 포착되자 박 팀장은 이렇게 말했다. “수사를 방해할 의도가 아니다. 실수로 지웠다.”
서울경찰청은 대선을 앞둔 지난해 12월13일 수서경찰서의 의뢰로 국정원 직원 김아무개(29)씨의 하드디스크를 분석하면서 서울경찰청의 컴퓨터 5대를 사용했는데, 박씨의 컴퓨터도 그중 하나였다. 디지털분석 책임자인 박씨는 지난 2월 증거분석팀장으로 임명돼 수사 초기 경찰의 축소·외압 의혹에는 직접 관련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컴퓨터에는 사이버범죄수사대 분석관들의 분석 보고서와 언론 및 국회 질의에 대한 답변 자료 등이 들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진다. 서울경찰청 관계자는 “박 팀장이 독자적으로 하드디스크 일부를 삭제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지난 1월20일에도 서울경찰청은 국정원 사건의 증거분석 자료를 삭제했다. 지난해 12월16일 서울경찰청은 “국정원 여직원이 (정치 관련) 댓글을 작성한 흔적이 없다”고 중간수사 결과를 서둘러 발표했다. 그리고 서울경찰청 컴퓨터에 들어 있던 증거분석 자료를 전부 없애고 초기화했다. 지난 5월20일 검찰이 압수수색한 컴퓨터에서 원데이터를 발견할 수 없는 이유다. 서울경찰청은 “모든 데이터는 분석이 끝나면 일체 폐기하는 게 관행”이라고 했다.
국가권력이 저지른 범죄를 공무원이 증거인멸로 비호하는 똑같은 불법행위가 반복되고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증거를 인멸해 ‘윗선’이 저지른 국가범죄를 무마하는 ‘꼬리자르기’가 가능한 까닭이다. 결국 범죄 수사권과 형벌권을 지닌 경찰이 국가의 사법행위를 방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차곡차곡 쌓인 ‘국가범죄의 성공적 경험’이 낳은 비극이다. 잘못 끼워진 첫 단추는 2010년 ‘국무총리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이었다.
2008년 7월 국무총리실 직제가 개편돼 공직윤리지원관실이 생겼다. 2010년 6월 지원관실이 이명박 대통령을 비판하는 동영상을 블로그에 올렸다는 이유로 민간인 김종익(당시 56살)씨를 불법사찰했다는 의혹이 불거졌다. 총리실이 이인규(54) 공직윤리지원관 등 직원 4명에 대해 검찰 수사를 의뢰하자 검찰에서 곧 압수수색이 들어올 듯했다. 지원관실 설립에 관여한 이영호(46)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이 진경락(43) 지원관실 기획총괄과장을 불렀다. “바깥에 나가면 민감한 자료가 있으니까 무조건 컴퓨터를 갈아엎어라. 바닷물에 30분 동안 넣었다가 빼면 복구가 불가능하다고 하더라.” 최종석(40) 당시 청와대 고용노사비서관실 행정관에게도 같은 주문을 했다. “확실하게 해야 한다. 어설프게 하면 다 나온다더라.”
| |
2010년 7월4일 밤 11시16분 진경락 과장은 부하 직원 장진수(37) 주무관에게 전화한다. “컴퓨터에서 자료를 지웠다고 하더라도 복구되면 오해를 살 수 있다. (민간인 사찰을 주도한) 점검1팀의 컴퓨터가 복구되지 않도록 조처하라.” 다음날인 7월5일 아침 6시에 장 주무관은 출근해 인터넷에서 삭제 프로그램을 내려받아 1팀원의 컴퓨터 데이터를 삭제했다.
7월6일 진 과장은 검찰에서 1회 참고인 조사를 받았다. 돌아온 그는 장 주무관에게 다시 지시한다. “자료를 더 확실히 지워라.” 다음날인 7월7일 장 주무관은 ‘디가우싱’(강한 자력으로 파일을 복구 불가능하게 파기하는 것) 업체를 수소문해 경기도 수원의 한 업체에서 컴퓨터 하드디스크 4개를 디가우싱했다.
검찰은 이틀 뒤인 7월9일 지원관실을 압수수색한다. 국무총리실이 수사를 의뢰하고 특별수사팀을 꾸린 지 나흘, 증거인멸을 주도한 진경락 과장을 조사한 지는 사흘이 지난 시점이었다. 늑장 압수수색은 불법사찰 관련자들이 증거를 모두 없애도록 시간을 벌어줬다는 비판을 받았다.
관용 컴퓨터에 삭제 프로그램을 돌리고 디가우싱한 장진수 전 주무관은 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한 일이 범죄가 될지 정말 몰랐다. 알았으면 안 했을 것이다. 공무원이 기록을 파쇄하고 삭제하는 일은 늘상 하는 일이니까 말이다.” 아니, 이게 무슨 소리인가? ‘공공기록물 관리에 관한 법’(이하 기록물관리법)을 보면 기록물을 무단으로 파기하면 징역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돼 있는데 말이다. “그 법이 있다. 하지만 정식 공문으로 번호를 받지 않은 컴퓨터 파일은 기록물로 관리되지 않는다. 공무원 개인이 컴퓨터 작업을 해서 기록물을 만들어내는데, 그건 공문서로 보지 않는다. 공문으로 등록해야 하는 자료지만 그냥 놔두는 경우도 있다. 등록하면 목록에 뜨고 국회에서 자료를 요청하고 골치 아프니까. (공문) 등록도 안 하고 문제가 생기면 싹 없애는 일이 있다.”
장 전 주무관과 함께 법정에 선 이영호 전 비서관, 최종석 전 행정관, 진경락 전 과장 등도 디가우싱을 ‘정당행위’라고 주장했다. 근거 법령으로 국가정보원의 ‘정보시스템 저장매체 불용처리지침’을 들었다. 정보시스템을 폐기·교체·반납하거나 수리하려고 외부로 반출할 경우 저장된 자료를 삭제하도록 국정원이 규정한 것이다. 2006년에 만들어졌고 그 뒤 국방부 등 50여 개 공공기관이 디가우서를 사들였다. 총리실에도 1대가 있다.
피고인들의 주장을 들어보자. “자료삭제는 국정원의 지침에 따른 것이다. 지원관실에서 보관한 공직감찰, 인사검증 등의 자료가 외부에 유출됨으로써 발생할 사회적 혼란이 우려됨에 따라 적극적 보안 조처로서 그 자료의 삭제를 지시했다. 법령에 의한 정당행위다.” 법원은 피고인들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검찰의 압수수색이 임박한 시점에 특정 컴퓨터의 하드디스크를 분리해 외부 업체에서 은밀한 방법으로 디가우싱한 것은 국정원 지침을 준수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일반적으로 ‘자료를 삭제했다’는 주장은 공무원이 형사처벌을 피할 수 있는 최선의 방어책으로 활용된다. 6·2 지방선거를 앞둔 2010년 4월, 진보 성향 교육감 후보의 동향을 감시하는 정보활동을 하도록 지시한 경찰 문건이 언론에 공개됐다. 이 문건은 서울경찰청 정보계 이아무개 경감이 경찰 내부망(인트라넷)을 통해 일선 경찰서 정보관에 내려보낸 것이었다. 국가공무원법 위반, 선거법 위반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경찰청은 “문건을 보낸 적이 없다”고 했다가 “상부의 결재를 받지 않은 개인 메일”이라고 말을 바꾸었다.
국회에서 문건을 요청하자 강희락 당시 경찰청장은 “삭제해서 없다”고 했다. “그 친구(경감)가 서울(경찰)청에서 워드를 작성해서 그것을 전자문서로 보냈기 때문에 나중에 삭제하게 되면 흔적이 남지 않는다.” 첩보·정보 보고는 등록 대상 기록물에서 제외하고 열람 뒤 파기할 수 있다는 경찰청 훈령을 근거로 내세웠다. 참여연대는 공적 업무 과정에서 발생한 기록물을 무단으로 폐기한 것은 기록물관리법 위반이라며 강 전 경찰청장을 검찰에 고발했다. “업무 중에 생산된 문서를 기록물로 관리하지 않는 경찰청의 업무 관행이 잘못된 것이다.” 참여연대가 이렇게 주장했지만 검찰은 “증거가 불충분하다”며 경찰의 손을 들어줬다.
최근 국정원 댓글과 관련한 증거인멸 사건에서도 경찰은 같은 주장을 펼친다. “(정부의) 온나라 시스템에 올라가는 공문서에 대해선 사무관리 규칙이 있지만 경찰청 자체망에서 공유하는 자료나 개인이 작성 중인 자료에 대해선 따로 규정이 없다. (이번에) 삭제된 자료는 온나라 시스템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니다.”(서울경찰청 관계자)
이영남 전 국가기록원 학예연구관(박사)은 “기록물의 무단 폐기”라고 단언했다. “중요 기록물을 압수수색하기 전에 공무원이 무단으로 폐기한다는 게 너무 놀랍고 충격적이다. 국가기록원은 왜 가만히 있나? 고발해야 하는데 하지 않는 것도 직무유기가 아닌가? 강력한 법 집행이 필요하다.”
경건 서울시립대 교수(행정법)는 “기록물 관리에 맹점이 있는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외국에선 ‘go.kr’ 같은 공적 전자우편을 사용할 때는 기록물로 관리하고, 메모도 기록물로 분류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2009년 청와대가 서울 용산 참사를 덮기 위해 경기도 군포 연쇄살인 사건을 적극 활용하라는 업무 지시를 전자우편으로 보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업무용 전자우편을 기록물로 하나도 보관하지 않았다.
스웨덴에서는 공식 등록된 기록물이 아니더라도 공공업무와 관련해 생산·수취한 것이라면 모두 공개해야 한다. 공식적인 번호를 부여받지 않았다고 공무원이 임의로 폐기하는 일은 없다. 유럽연합(EU)에서도 공공기록물은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공공기관이나 그 연관 기관에서 생산·수취한 모든 기록된 정보라고 정의하고 있다.
국내에서 일어난 대표적 증거인멸 의혹 사건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좀더 큰 이미지를 보실 수 있습니다.
증거인멸죄에서도 우리나라는 여타 나라와 다른 예외조항이 있다. 자신이나 친인척의 범죄와 관련한 증거인멸은 형사처벌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에 관한 증거를 인멸한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친족 또는 동거의 가족이 본인을 위해 범죄를 범한 때에는 처벌하지 아니한다.”(형법 155조) 피고인의 방어권과 친족 간의 정의를 고려한 면책조항이다.
문제는 이것이 경찰 등 공무원에 의해 남용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다. 지난 3월 전북 전주에서 부모와 형을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된 박아무개(24)씨의 범행을 경찰관인 외삼촌 황아무개(42) 경사가 사건 직후 알고서 증거인멸을 지시한 사실이 드러났다. 하지만 황 경사는 감봉 1개월 처분만 받았다.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증거인멸 교사죄를 비껴간 것이다.
민간인 불법사찰에서도 진경락 전 과장은 이렇게 주장했다. “기획총괄과장으로서, 점검1팀의 불법 또는 비위 행위가 밝혀질 경우 징계 대상이나 형사처벌을 받게 될 것이 두려워 증거를 인멸했다. ‘타인의 형사사건 또는 징계사건’이 아니다.” 이영호 전 비서관과 최종석 전 행정관도 마찬가지다. “자료 삭제 지시는 피고인 자신의 형사사건에 관한 것으로 증거인멸죄가 성립되지 않는다.”
최강욱 변호사는 “자신의 범죄라서 증거인멸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공무원이 뻔뻔하게 주장하는 것은 스스로 국가가 범죄조직이라고 인정하는 꼴이다. 공무원에 대한 기본 신뢰, 국가의 기본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조영선 변호사는 “국가가 범죄를 저질러도 나중에 문제가 되면 관련 자료를 폐기해 솜방망이 처벌만 받는다는 잘못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증거인멸죄면책조항은 앞으로 악용될 소지가 충분하다”고 평가했다.
판사 출신인 이용구 변호사도 이 의견에 동의한다. “공무원이 생산한 자료는 국가의 소유라서 마음대로 훼손할 수 없는 게 원칙이다. 특별 규정을 두는 게 필요하다.” 최강욱 변호사도 “공무원의 증거인멸을 가중처벌 하도록 법을 개정할 때가 됐다”고 했다.
미국에선 가장 무거운 것이 증거인멸죄 상한
증거인멸죄의 법정형은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700만원 이하의 벌금’이다. 하지만 증거인멸을 지시한 진경락 전 과장과 최종석 전 행정관은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으로 풀려났다. 이영호 전 비서관도 지난 5월24일 항소심에서 징역 2년6개월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지만, 이는 직권남용 등의 혐의가 추가됐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형법에선 증거인멸죄에 다양한 종류의 벌칙을 둔다. 기소된 범행의 법정형 중 가장 무거운 것이 증거인멸죄의 상한이 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살인사건에서 사법방해 행위가 있으면 사형 또는 종신형에 처할 수 있다. 살인미수라면 20년 이상의 구금이 가능하다.
| |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김정은 8700t급 핵잠 공개 “한국 핵잠, 반드시 대응해야 할 위협”

김건희, 기계처럼 77번이나 “증언 거부”…나갈 땐 또 ‘휘청’

우원식 “본회의장에 의원 2명뿐…비정상적 무제한 토론 국민에 부끄럽다”

“마당에라도 왔다갔다 할 수 있다면”…뇌병변 중증장애 선호씨 어머니의 바람

박지원 “김병기, 보좌진 탓 말고 본인 처신 돌아봐야”

내란재판부법 ‘위헌 트집’…윤석열 헌법소원 청구해도 재판 중단 없어

쿠팡, 미 정계에 150억 뿌린 보람?…공화당 쪽 “한국, 불량국가 대열” 비난

조국 “계엄의 계가 닭 계鷄였구나…윤석열, 모든 걸 술과 음식으로 사고”
![[단독] 통일교, 이번엔 검찰 로비 의혹…“우리가 원한 검사, 동부지검 배치” [단독] 통일교, 이번엔 검찰 로비 의혹…“우리가 원한 검사, 동부지검 배치”](https://flexible.img.hani.co.kr/flexible/normal/500/300/imgdb/child/2025/1224/53_17665617962127_20251224502779.jpg)
[단독] 통일교, 이번엔 검찰 로비 의혹…“우리가 원한 검사, 동부지검 배치”

대중음악평론가 김영대 별세…향년 4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