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영업자 박용만(39)씨는 인터넷으로 물건을 살 때 거의 한 달씩 고민한다. 지난겨울에는 대용량 외장하드를 하나 사려고 쇼핑몰 수십 군데를 돌아다녔다. 수백 개의 외장하드를 비교·분석한 뒤 맘에 드는 제품을 3개로 좁혔다. 하지만 최종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아내의 조언으로 마침내 하나를 선택했는데 신용카드로 결제하려던 순간, 구입을 포기했다. 깜짝 할인행사를 하면 어쩌나 싶어서다. 현재까지 행사는 없고 가격만 되레 올랐다. 박씨는 “성능이나 디자인은 더 좋고 가격은 더 저렴한 제품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며 인터넷 쇼핑몰을 계속 둘러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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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원 김수정(36)씨는 ‘소개팅’을 100번쯤 했지만 만족스러운 짝을 찾지 못했다. 30살에 그는 한 남자와 결혼할 뻔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다정한 남자였는데 청혼을 하자 갑자기 겁이 났다. “하고 싶은 일이 아직 많은데 결혼해 아이를 낳으면 모든 게 끝장날것만 같았다.” 게다가 그가 ‘운명의 남자’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헤어졌고 그 남자는 몇 년 전에 다른 여자와 결혼했다.
갈림길에서 어떤 것을 선택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심리를 ‘결정장애’라고 한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아직 등록되지 않았지만 네이버 국어사전에는 나오는 신조어다. 선택의 기회가 많아진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새롭게 맞닥뜨린 난관이다. 예전에는 삶에서 중요한 결정을 부모 또는 사회가 했다. 결혼 상대나 직업을 선택하는 것조차 말이다. 이제는 세상이 변했다. 스스로 결정해야 할 일이 넘쳐난다. 그만큼 짊어져야 할 책임의 무게도 커진다는 얘기다. 문제는 항상 성공적인 결정만 내릴 순 없다는 점이다. 실패하는 경우가 더 많고 후회하는 일이 잦아진다.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던 속박의 상황에서, 끊임없이 결정해야 하는 속박의 상황으로 바뀐 것이다.”(독일 심리학자·언론인 바스카스트)
선택의 기회가 얼마나 우리를 괴롭히는지 미국 뉴욕 컬럼비아대학 경영학과의 쉬나 아이엔가 교수가 이렇게 입증했다. 심각한 뇌손상을 입은 아이들에게 생명유지 치료를 지속할지 여부를 결정할 때 미국에서는 이를 부모에게 맡긴다. 의사가 치료를 지속할지 묻고 부모의 의지에 따라 최종 결정한다. 반면 프랑스에서는 그 반대다. 부모가 분명하게 반대하지 않는 한 의사가 결정을 내린다. 이처럼 다른 두 선택은 부모가 시련을 극복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다. 아이를 잃은 뒤 미국 부모는 프랑스 부모보다 훨씬 큰 후유증으로 괴로워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프랑스 부모는 아이를 포기한 결정을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이지만, 미국 부모는 자신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죄책감과 후회에 시달린다. 한 엄마의 고백이다. “사형 집행에 가담했다는 기분이 들었어요. 그러지 말았어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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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다한 선택지는 고통의 무게를 더한다. 경제학이나 의사결정이론에서는 사람들이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많을수록 좋고, 그만큼 사람들의 만족도가 커질 것이라고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과연 그럴까? 또 다른 실험연구를 보자. 미국의 한 슈퍼마켓에서 한 진열대에는 잼 6종류를, 다른 진열대에는 잼 24종류를 진열한 뒤 고객에게 1달러 할인권을 주고 시식하게 했다. 진열대가 있는 통로를 지나간 10명 중 4명은 6종류를, 나머지 6명은 24종류를 찾았다. 그러나 구입 실적은 전혀 달랐다. 6종류를 방문한 손님 중 30%가 잼을 샀지만 24종류에선 그 비율이 3%로 떨어졌다. 초콜릿으로도 같은 실험을 했다. 6가지 초콜릿과 30가지 초콜릿을 놔두고는 맛에 대해 10점 만점을 기준으로 평가하도록 했다. 6가지 초콜릿을 선택한 사람들이 내린 평가의 평균치는 6.25점이었는데, 30가지 초콜릿은 5.5점이었다. 또 실험에 참가한 답례를 5달러 대신 초콜릿 한 상자로 선택한 비중도 6가지 그룹에선 47%였지만 30가지 그룹에선 12%에 그쳤다.
선택지가 일정 범위를 넘어가면 결정장애가 심해진다는 얘기다. 잼의 가짓수를 다양하게 제공해봤더니 10개일 때가 가장 많이 팔렸다. 미국의 심리학자 조지 밀러가 말한 ‘신비의 수 7±2’와 통한다. ‘7±2’는 인간이 단기 기억할 수 있는 평균 용량이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불행해지는 이유를 정리하면, 첫째 버릴 수밖에 없는 대안 역시 늘어나기 때문이다. ‘기회비용’이라는 손실이다. 인간은 이득과 손실이 같은 크기라도 손실 쪽을 더 강하게 느낀다. 둘째, 최종 선택한 대안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다. 불행히도 기대가 크면 실망이 큰 법이다. 꼭 마음에 든 선택이 아니면 자신의 결정에 낙담하게 된다. 셋째, 죄책감이나 후회의 여지가 생긴다.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내가 다른 걸 선택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그럴 때마다 후회는 조금씩 더 커지고 이미 선택한 것에 대한 만족은 조금씩 작아진다.”(미국 사회심리학자 배리 슈워츠)
탈출구는 결정을 미루는 것이다. 같은 일이라도 나중에 하면 더 쉬울 것처럼 생각하는 심리가 우리에게 있다. 실제로 미루는 습관은 늘어나는 추세다. 미국의 연구 결과를 보면, 일을 습관적으로 미룬다고 밝힌 미국인이 26%로 나타났는데 30년 전인 1978년(5%)보다 5배나 증가한 수치다. 미국인의 40%는 미루는 습관탓에 경제적 손실을 경험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최고를 추구하는 완벽주의자는 극심한 결정장애에 시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최고의 직업, 최고의 배우자, 최고의 TV 프로그램을 찾는 그는 절대적으로 완벽한 결정이라고 판단할 때까지 아예 시작도 못한다.
이승만(38)씨는 아이가 태어나면 전원주택으로 옮기자고 아내와 약속했다. 아이들이 흙을 밟으며 자라기 바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아이가 태어나니 이사 갈 지역을 고를 수 없었다. 각 지역마다 단점이 보여서다. 지방도시는 보육시설이 부족하고 신도시는 분주했다. 수많은 요소를 재고 따졌지만 어느 곳이 완벽한지 확신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이사를 미뤘고 8년째 머뭇거린다.
‘무결점’을 추구하기에 완벽주의자는 선택지를 전부 비교·분석한 뒤 확신이 섰을 때 결정하길 원한다. 장점만 있을 뿐 단점은 하나도 없는 정답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다. 비현실적이지만 이런 결정을 찾지 못하면 실패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택지를 비교하는 준비만 끝없이 되풀이한다. 스스로를 ‘완벽한 준비자’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실제로는 시작도 하기 전에 제풀에 지쳐버리기 일쑤다.
회사원 최민수(41)씨는 올해 매일 헬스클럽에서 운동하겠다는 새해 목표를 세웠다. 1년 전에도 헬스클럽에 등록했지만 한 번도 가지 않았다. 매일 간다는 목표는 현실성이 없었지만 최씨는 할 수 있다고 자신했다. 실제로 1월 한 달간 4번 운동하는 데 그쳤다. 운동을 전혀하지 않은 지난 1년에 비해서는 확실히 나은 결과였다. 하지만 최씨는 크게 실망했다. 시작한 일을 ‘완수’하지도 못했고 계획대로 ‘정확히’ 하지 못했으며 ‘완벽’하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지난해와 다를 바 없는 실패라고 자평했다.
“완벽주의자는 사소한 실수에도 치명상을 입는다. 혈우병 환자가 칼에 베인 것 같다. 자신의 결정이 ‘평범하다’는 평가를 받으면 ‘인간으로서 실패했다’는 뜻으로 받아들인다. 극단적인 경우에는 자신의 일과 인간으로서 자신의 가치를 동일시한다.”(미국 심리학자 닐 피오레)
자신이 수행한 일이 자신의 가치와 미래의 행복을 결정한다고 믿는 마음이 클수록 압박감은 커진다. 이때 결정을 미루면 잠시나마 그 압박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일을 하지 않으니까 실패 혹은 실수에 대한 두려움도 사라진다. 가끔은 결정을 미룬 덕분에 예상치 못한 보상을 받기도 한다. 남이 대신 결정해주는 경우가 생기는 거다. 그러면 나중에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책임질 필요가 없어진다. 새로운 정보를 기다리다보면 저절로 문제가 해결될 때도 있다.
왜 이토록 실수나 결점을 두려워할까? 정신과 전문의 문요한씨의 설명이다. “대부분 성취지향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라나 존재 자체로서 사랑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결함’이 있기에 사랑받지 못했고 변함없는 사랑을 받으려면 완벽해야 한다는 무의식적 믿음을 갖고 있다. 마음속에는 영웅적인 노력을 기울여 성공하는 최상의 시나리오와, 실패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최악의 시나리오 두 가지밖에 없다.” 최고의 것을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아무것도 가지지 않겠다는, 즉 전부(all)가 아니면 전무(nothing)라는 극단적 사고방식을 완벽주의자는 고수한다. 실수를 통해 배우고 성장한다는 삶의 당연한 이치를 배우지 못한 탓이다. 그래서 선택을 회피하고 ‘있는 것이라도 지키자’라는 안주의 길에 들어선다. 높은 목표만 있고 도전은 없는 삶이다.
철저한 탐색을 거쳐 마침내 결정을 내렸더라도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다른 곳에 더 좋은 것이 있을지 모른다고 끊임없이 의심하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대학생 500명이 직장을 찾는 과정을 추적한 연구 결과가 있다. 완벽주의자는 많은 회사에 입사원서를 보낸다. 심지어 1천 장 넘는 입사지원서를 보낸 사람도 있었다. 몇 달 뒤 다시 이들을 만났는데 상당히 좋은 직장을 구한 상태였다. 초봉도 다른 학생들보다 평균 20%나 많았다. 하지만 객관적 성공이 주관적 만족으로 이어지진 못했다. 완벽주의자는 구직 과정에서 비관적이었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으며 여전히 걱정과 불안에 시달렸다. 구직 결과에 대한 만족도도 당연히 낮았다.
자신의 결정에 만족하게 만들 묘수는 없을까? 간단하다. ‘환불 불가’ 조건을 붙이는 것이다. 미국 하버드대학의 심리학자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사진 수업을 듣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연구를 했다. 인물과 사물을 찍은 다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진 2장을 골라 인화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2장 중 하나는 보관할 수 있고, 나머지 하나는 ‘실습 기록용’으로 제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수업은 두 가지 방식으로 진행됐다. ‘수업1’에서는 1장을 고르고 나면 절대 바꿀 수 없었다. ‘수업2’는 닷새 내에 마음이 바뀌면 언제든 사진을 교환하도록 허락했다. 학생들은 압도적으로 수업2를 선호했다. 하지만 의사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각 수업에 배치됐다.
며칠 뒤 학생들에게 자신이 고른 사진에 대해 얼마나 만족하는지물었다. 그러자 중요한 차이가 드러났다. 교환 가능성이 없는 수업1에 참석한 학생들이 교환 가능성이 있는 수업2에 참석한 학생들보다 자신이 고른 사진을 더 좋아했다. 닷새 뒤 더 이상 사진을 교체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도 그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연구를 수행한 길버트교수의 결론은 이렇다. “우리는 오직 희망을 찾아야 할 때만 희망을 발견하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코를 후비는 사람과는 같이 다니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그 사람이 증조할아버지라면 사랑하는 것처럼 말이다. 운명을 피할 수 없을 때, 도망칠 수 없을 때, 그리고 취소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의 운명에서 긍정적 면을 발견하고자 한다.”
문요한씨는 “결정한 그 이후에 주목하라”고 말한다. “선택의 순간에 성공과 실패가 결정된다고 흔히 착각한다. 그래서 그 순간에 어마어마한 의미를 두고 결정을 한없이 미룬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선택자체가 아니다.” 문씨는 선택한 뒤 애초의 목표를 잘 달성했느냐에 따라 성패가 좌우된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아무리 좋은 카메라를 샀더라도 추억을 남기겠다는 목표를 저버린 채 구석에 처박아두면 그것은 실패한 결정이 된다. 하지만 선택의 순간에는 실수가 있었더라도 이후에 배움을 얻었다면 성공한 결정으로 거듭날 수 있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참고 문헌 (바스 카스트·2012) (쉬나 아이엔가·2010) (문요한·2009) (닐 피오레·2011) (제인 B. 버카·2008) (제프리 콤·2012) (켈리 맥고니걸·2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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