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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두 명의 박 대통령’에게 빚졌다고 믿는 사내가 있다. 최외출 영남대 교수의 이야기다.
경상북도 김천 산골에 위치한, 찢어지게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빈곤은 숙명인 것처럼 보였다. 외딴집에서 난 아이에게 부모님은 ‘외출’이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짚신을 삼아 신고 다녀야 했던 어린 시절이었다. 대학 진학은 불가능해 보이는 꿈이었다. 하지만 그 꿈이 실현됐다. 영남대를 통해서다. 영남대는 ‘박정희 일가의 대학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대구대와 청구대를 강제 통합해 영남대를 설립했다. 영남대 정관 제1조는 여전히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설립자 박정희 선생의 창학정신에 입각하여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2011년 정관이 개정되기 전까지의 표현은 ‘설립자 박정희’가 아니라 ‘교주 박정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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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전 대통령의 지시로 ‘지역사회개발학과’가 만들어졌고, 끝없는 가난에 미래를 저당 잡혔던 ‘청년 최외출’은 새마을장학생 1기생(77학번)으로 이 학과에 입학해 학생회장을 지낸다. 당시 대학에선 각 학과의 학생회장을 ‘학도호국단 사단장’이라고 불렀다. 모친 사망 이후 청와대에서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던 ‘영애 박근혜’와 ‘학도호국단 사단장 최외출’의 인연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새마음봉사단(이후 구국여성봉사단으로 개칭) 명예총재로서 전국을 순방하며 학생과 군인, 공무원과 노인들에게 ‘충·효·예 사상’을 강의하고 다니던 시절이다. 박근혜 자서전 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새마음봉사단은 새마을운동의 정신을 더욱 구체적으로 이어가자는 뜻”에서 설립된 단체다. 이 단체의 상부조직이 최태민 목사가 총재로 있던 대한구국선교단이었다.
최 교수는 대학을 졸업한 뒤 한남대 석사, 대구대 박사과정을 마친다. ‘지역개발’이 전공이었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 제목은 ‘지역사회 단위 참여계획의 효율화 방안: 군 개발 실험정책계획 사례를 중심으로’였다. 1979년 10·26 이후 청와대 밖으로 내밀린 박근혜 대통령이 최 교수의 부족한 대학원 학비를 지원한 사실도 확인됐다. 최 교수 쪽의 한 인사는 “사적으로 학비를 주고받은 것은 아니고, 박근혜 대통령이 당시 관여하던 장학재단을 통해 장학금 지원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고 했다. 최 교수는 대학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장학금으로, 대학원은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의 장학금으로 졸업한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1980년 신군부의 용인 아래 영남대 이사장에 취임했다가 학내 반발로 같은 해 이사장에서 물러나지만 이사직은 ‘영남대 부정입학 파동’이 터진 1988년까지 유지한다. 박 대통령의 ‘정치적 은둔기’인 1980년부터 1998년까지, 두 사람의 관계는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구체적 일화 등은 전해지지 않는다. 박 대통령에게 새마을운동은 곧 부친이었다.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을 가꾸세”로 시작하는 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직접 만들었다. 박 대통령의 자서전에는 이런 대목이 등장한다. “(외할머니의 팔순잔치 때) 중학생 사촌동생부터 아버지까지 모든 사람이 돌아가며 노래를 불렀다. 지만이는 몹시 부끄러워하며 를 불렀다. 어찌나 쑥스러워하던지 나중에 모든 사람이 다 같이 합창을 해주었다. (중략) 내 차례가 되고 보니 부를 노래가 없었다. 결국 나도 지만이처럼 를 부르고 말았다. 지금 같으면 좀더 그럴듯한 노래를 불렀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최외출 교수는 지금도 휴대전화 컬러링으로 를 쓴다. 최 교수의 한 지인은 “최 교수는 술자리 건배사도 ‘근자협’(새마을운동의 슬로건이던 근면·자조·협동)을 외친다. 새마을운동은 어떤 의미에서 그에게는 절대적인 그 무엇, 삶의 준거점 같은 것”이라고 했다.
면도칼 테러 소식 접하고 한달음에 병원으로최 교수는 1998년 대구 달성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박근혜 대통령이 출마하자 당시 선거 캠프에 합류해 그를 돕는다. ‘새마을’은 여전히 강력한 브랜드였다. 박 대통령은 유세장에서도 를 틀었고, 자신의 출마를 “박정희냐, 김대중이냐를 선택하는 선거”라고 규정했다. 는 1998년 4월2일치 기사에서 “한나라당 박근혜 후보는 유세장에서 를 계속 틀면서 ‘경제를 살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 수 있도록 한 표를 부탁한다’며 유권자들의 박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를 자극했다”고 보도했다. 당선 소식을 전한 같은 신문의 4월3일치 기사는 “(당선이 확정된 직후)한 여성 유권자는 를 부르며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축제 분위기를 돋웠고, 박 후보도 여기에 맞장구를 쳤다”고 전했다.
1998년 선거 이후 최 교수는 정치권과 애써 거리를 둬왔다고 한다. 분기점은 2006년 지방선거였다. 선거 기간 중 박근혜 대통령은 서울 신촌 유세 현장에서 면도칼 테러를 당했는데, 최 교수는 대구에서 동료 교수들과 식사를 하다 이 소식을 접했다. 곧바로 수저를 놓고 박 대통령이 입원한 서울 세브란스병원으로 달려간 최 교수는 의료진을 접촉하고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다시 대구로 내려갔다고 한다. 이때 최 교수는 본격적으로 ‘정치인 박근혜’를 돕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최 교수에게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를 위한 전초기지는 자신의 모교이자 일터인 영남대였다. 박근혜 대통령은 1988년 영남대 이사직에서 물러났고, 이후 20여 년 동안 영남대는 관선이사 체제로 운영됐다.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2009년 사학분쟁조정위원회는 ‘설립자 유족’ 자격으로 박 대통령에게 7명의 이사진 중 4명을 추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사실상의 ‘재접수’다. 다시 ‘박통의 대학’이 된 영남대 쪽은 이 과정을 ‘대학 정상화’라고 표현한다. 영남대의 한 관계자는 “영남대에 박근혜가 복귀하는 과정을 막후에서 진두지휘한 인물이 당시 교수회 의장을 맡고 있던 최외출 교수고, 행동대장은 최 교수와 가까운 노석균 교수였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후 영남재단 기획조정실장, 영남대 대외협력 부총장 등을 거친다. 영남대의 총장 직선제 폐지를 주도했던 노석균 교수는 친박 성향 인사가 다수인 재단 이사회에 의해 지난 2월1일 영남대의 신임 총장에 취임한다. 최외출 교수는 거칠 것이 없었다. 2012년에는 영남대에 박정희새마을정책대학원을 만들고 초대 원장을 지냈다. 박정희리더십연구원도 세웠다. 이 관계자는 “최외출 교수가 전면으로 등장하는 시점이 2009년 박근혜 복귀 이후”라며 “박정희 신격화를 위한 조직을 학내에 설치하고 ‘조갑제닷컴’과 함께 독후감 공모전을 개최하는 등 별의별 해괴한 사업들을 추진했다”고 말했다.
‘은인’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예 회복과 재평가를 필생의 과업으로 삼은 최 교수다. 그의 학문적 관심이 박정희 시절 지역개발 모델의 중심축이었던 새마을운동에 집중된 건 자연스러운 귀결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새마을운동이 그것을 가능케 하는 핵심적인 매개고리라고 봤다. 사실 박정희 사후 새마을운동은 여러 얼굴을 갖는다. 노무현 정부 시절에는 ‘국토균형발전’을, 이명박 정부에선 ‘저탄소 녹색성장’을 새마을운동과 연관지었다. 새마을운동중앙회는 이명박 정부 시절 운동의 목표를 “선진 일류국가 진입을 위한 그린 코리아, 스마트 코리아, 해피 코리아, 글로벌 코리아 등 4대 중점운동”으로 정리했다. 또 ‘녹색생활 실천, 4대강 등 하천 살리기, 지구온난화 방지’ 등 정부의 국정목표에 부합하는 내용을 실천 과제로 명시했다.
최 교수는 자신의 영역에서 집요하게 새마을운동을 호명하며 의미 부여를 시도한다. “새마을운동의 세계화가 필요하며 21세기형 ‘새마을학’을 정립할 때”(2008년 4월, 인터뷰)라는 말처럼, 새마을운동을 하나의 ‘학문’으로 정립하겠다는 게 그의 ‘학자로서의 꿈’이다. 동생인 최영출 충북대 행정학과 교수에게 ‘새마을운동 연구’를 제안한 것도 최 교수라고 한다. 최외출·최영출 교수는 2008년 함께 발표한 논문 ‘국가경쟁력과 지방분권과의 인과관계 분석’에서 “단순히 중앙의 권한을 지방으로 이양해주는 노력만으로는 국가경쟁력 강화라는 종국적인 목표로 이어지지 않는다”며 “21세기형 제2의 새마을운동과 같은 정신운동이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일어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이같은 시도는 상당 부분 이미 성취됐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새마을운동을 주창한 4월22일이 2011년 2월 국회 본회의와 국무회의를 거쳐 공식적인 국가기념일로 지정됐다.
그렇다면 ‘학문으로서의 새마을운동’은 과연 가능한가. 많은 학자들이 지적하듯 과거 새마을운동을 둘러싼 평가는 엇갈린다. “유신독재 체제의 유지를 위한 국민동원 수단”이었다는 지적과 “절대적 빈곤에서 탈출을 가능케 한 근대적 계몽운동”이라는 상찬이 격돌한다. 사실 새마을운동의 ‘원형’은 해방 전 일제가 추진했던 ‘농촌진흥운동’에 있다. 김영미 국민대 교수는 저서 에서 “새마을운동의 최고 지도자인 박정희뿐만 아니라 새마을운동을 주도했던 관료들이나 마을 청장년이 모두 농촌진흥운동의 유경험자”라며 “식민지 지배당국의 농진운동이 박정희 새마을운동의 기원”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최 교수가 그리는 과거 ‘새마을운동’에 그림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가 2011년 발표한 논문 ‘교육계몽운동으로서 새마을운동의 특성과 의의’는 과거 새마을운동을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정신을 바탕으로 근대적 인간형을 키웠고, 국민 전체를 이상적 인간상으로 전환시키려 했으며, 나아가 일상생활의 장면에서 실천적으로 드러날 수 있도록 했던 의식 계몽운동”으로 평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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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명예회복’에 대한 욕망은 박근혜 대통령과 최외출 교수의 끈끈한 관계를 설명해주는 핵심적인 공통분모다. 박 전 대통령 사후 야권뿐 아니라 옛 공화당 인사들도 ‘인간 박정희’를 공격했다. 신군부는 ‘영애 박근혜’의 외부 활동을 불편해했다. 2012년 4월23일치 인터뷰에서 최 교수는 “새마을운동은 한 번도 내 곁을 떠나지 않은 나의 다른 실체”라며 이렇게 설명한다. “지난 40년간 새마을운동의 역사에는 영광과 아픔이 함께 점철돼 있다. 열광적인 국민적 호응이 있기도 했지만 국민의 관심에서 멀어진 시절도 있었고, 학계에서도 새마을운동에 관한 연구는 약속이나 한 듯 자취를 감춘 적도 있다.”
‘민족의 지도자 박정희’에 대한 최 교수의 신심은 종교적 열망에 가깝다. 2010년 발간된 의 공저자로 참여한 최 교수는 “한국의 역대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평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하며 이렇게 썼다. “땀과 눈물로 쓴 한국 현대사 고도성장의 대서사시는 차츰 저물고 있다. 객관적 평가와 활발한 공론의 장이 마련되지 못하고 평가절하된 상태로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이 역사의 영역으로 흘러가는 것은 국가와 후대를 위해서도 큰 손실이다.” 당시 출판기념회에는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참석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최외출 교수가 주장하는 ‘제2의 새마을운동’의 요체는 뭘까. 그는 2012년 지역 언론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밝혔다.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운동이 ‘새마을 1.0’이라고 한다면 더불어 잘사는 글로벌 새마을운동은 여기에 나눔·봉사·창조 등 새로운 가치를 추가한 ‘새마을정신 2.0’을 바탕으로 한다.” 최 교수의 동생 최영출 교수는 과 한 통화에서 “근면·자조·협동이라는 새마을운동의 원리는 동일하지만, 당시와 지금의 한국 사회는 안고 있는 문제가 다르지 않느냐”며 이렇게 설명한다. “새마을운동은 그 시대가 안고 있는 문제와 관련해 국민이 자신의 유전자 속에 갖고있던 공동체 정신을 끌어내서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한 운동이었다. 새로운 새마을운동은 그 정신과 원리는 살리면서 도시든 농어촌 지역이든 공동체의 정신을 복원하고 분열을 해소하는 국민통합 운동으로 나아갈 필요가 있다.”
은 이번 취재 과정에서 최교수에게 공식 인터뷰를 요청했으나, 그는 끝내 정식 인터뷰는 거절했다. 언론이 최 교수를 ‘실세’로 지목했고, 그의 이름이 ‘MBC·정수장학회 비밀회동’ 파문에서도 등장하는 등 자신이 뉴스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일 자체가 부담스럽다고 했다. 다만 최 교수는 과의 통화에서 “나는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대선 뒤) 몸이 아파서 대구에 내려왔고, 그래서 기자들이 전화를 걸어도 잘 못받았다. 그런데 잠적했다고 쓰더라. 칩거도 아니고…. 세상이 무서웠다. 기자들에게도 언론권력에 의해 상처를 받아본 일이 있는지 묻고 싶었다. 딸아이 친구가 딸에게 ‘너희 아빠는 무슨 잘못을 했기에 잠적했니’라고 했다더라.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달라. 이제는 그마저도 다 잊었다.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지만 선생으로서, 연구자로서의 길을 가겠다. 그 이상은 드릴 말씀이 없다.”
여론조사 결과 발표 등 발걸음 여전히 분주과거 새마을운동에 대한 비판적 평가와, 박근혜 대통령이 언급한 ‘제2의 새마을운동’의 구체적 방향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거듭되는 질문에도 최 교수는 “나는 관점에 따라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이라고만 답했다. 이어 그는 “인터뷰 요청이 많았지만 할 말도 없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불필요한 오해를 사지 않는 길이라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대선 직후에도 새마을운동 재평가를 위한 그의 발걸음은 여전히 분주해 보였다. 지난 3월 최 교수는 “새마을운동을 학문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는 여론이 70.6%”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했다. 이 조사에서 응답자의 82%는 “제2의 새마을운동 추진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10·26 30주년을 맞은 2009년 10월에도 영남대 박정희리더십연구원은 여론조사 결과를 공개하며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응답이 72.8%, 기념사업 추진이 필요하다는 응답은 74.9%였다”고 발표했다. 당시 연구원장은 최 교수였다. 그는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새마을운동과 박정희’라는 재단에 바친 제사장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 딸인 박근혜 대통령이 권력의 정점에 올랐다. 그의 제의는, 어쩌면 이제부터가 시작인지도 모른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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