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다. 2012년 3월 0~2살 무상보육이 시작되자 어린이집 앞에 돌연 긴 줄이 늘어섰다. “분명 대기번호 12번이었는데 보육료 지원한다는 뉴스가 나온 뒤 112번이 됐더라고요. 정확히 제 앞에 100명이 들어온 거죠.” 육아휴직을 끝내고 어린이집에 아이를 맡기려 했던 최경숙(32)씨의 1년 전 이야기다. 어린이집을 다니는 아이들에게 보육료를 전액 지급하겠다는 안은 처음엔 맞벌이에게만 유리한 것처럼 보였다. 24개월이라고 해도 말문이 막 트일 시기다. 대부분의 부모는 아이가 의사소통이 활발해지고 사회성이 발달하기 시작하는 36개월 이전까지는 집에서 키우는 쪽을 선호한다. 어린이집 이용률이 가장 낮은 연령대의 아이들을 대상으로 시설 위주의 무상보육을 하겠다는 발상을 두고 “적은 예산으로 무상보육 시늉만 내려 든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전업주부들은 역차별을 당하느니 아이를 보육시설에 보내는 쪽을 택했다. 정부 예측은 70만 명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지난해 0~2살 아이 80만 명이 어린이집에 맡겨졌다. 2011년과 비교하면 15만 명이 늘어난 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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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가 몰랐던 것은 복지가 수요를 폭발적으로 늘릴 수 있다는 점만은 아니었다. 전업주부에게 육아시설에 대한 욕구가 얼마나 잠재돼 있는지 사회는 몰랐다. 인천의 한 어린이집에서 일하는 보육교사 김희정(가명)씨가 보기엔 무상보육을 기점으로 어린이집에 맡겨지는 돌 전 아이들이 부쩍 늘었단다. “이전만 해도 우리 어린이집에는 돌 전 아이가 보통 2~3명 있었는데 지금은 6명이에요. 엄마들이 처음엔 ‘오전만 맡길게요’ 그러시더니 몇 달 지나니까 오후에 데려가시더라고요.” 어린이집의 새 학기는 3월에 시작되지만 올해부터 무상보육 대상이 0~5살로 늘어난다. 김희정씨가 일하는 어린이집은 일찌감치 모든 연령의 정원이 찼다고 한다.
아이를 키우려고 일을 그만두었던 전업주부들이 적극적으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19개월 된 아이를 처음 서울 노원구의 어린이집에 보낸 최선해(35)씨는 이렇게 말한다. “공짜라서 무조건 보낸 건 아니에요. 아이와 놀 만한 친구들이 모두 어린이집에 간 것이 가장 컸죠. 처음엔 떼어놓기 안쓰러웠는데 아이와 잠시 떨어져 있는 만큼 아이에게 더 잘하게 되는 것 같아요. 제가 하루 종일 옆에 끼고 있을 땐 종종 아이한테 짜증도 내고 그랬거든요.” 한국노동연구원 윤자영 박사는 미취학 아이를 어린이집 등 보육시설에 맡기면 여가시간이 얼마나 늘어날지 분석해봤다. 2004년 국민생활시간 조사 자료를 근거로 분석한 이 연구에서 0~2살 자녀를 둔 전업주부가 집에서만 아이를 키운다면 하루 평균 4시간10분 정도의 여가시간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아이를 시설에 보냈을 때도 여가시간은 4시간25분으로 하루 15분 남짓한 차이밖에 나지 않는다(‘미취학 자녀를 둔 부모의 시간 사용 분석’). 윤자영 박사는 “아이를 시설에 보내도 전업주부가 할 일은 크게 줄어들지 않는다. 다만 애를 데리고 하느냐, 없이 하느냐의 차이로 노동강도와 여가시간의 질적인 차이가 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다”고 했다. 0~3살 영아기에는 엄마가 종일 아이를 돌보는 전일제 모성 돌봄이 가장 좋다고 알려져왔다. 그러나 핵가족 구조에서 혼자서 자녀 양육을 전담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무상보육은 고립된 가족 내에서 혼자 하루 종일 육아에 매달려야 하는 전업주부에게도 숨 쉴 틈을 내주는 정책이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만 쳐다보고 있으니 하루가 너무 길어요. 집의 시간은 다른 터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한 인터넷 게시판에 전업주부가 올린 글이다. 무상보육으로 전업주부들은 끝없는 가사노동 터널에서 대피소를 얻었다.
그러나 동시에 전업주부의 정체성에 대한 사회적 회의가 몰려왔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홈페이지 방문자를 대상으로 주부의 가사노동 시간을 조사해보니 ‘미취학 아이 보살피기’가 절대적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30대 주부는 하루 평균 가사노동 시간 9시간 18분 중 2시간35분을 아이를 돌보는 데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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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뜩이나 가사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는데다 노동자 간 경쟁이 치열한 한국 사회에서 아이 돌봄 노동을 덜어낸 전업주부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날카로워지고 있다. “(보육교사들이) 일하는 조건이 너무 후지다 보니까 일하지 않는 부모들의 아이까지 돌보는 게 심리적으로 힘들 때가 있어요. 일하지 않는 엄마들은 티가 나요. 뒤늦게 점심 먹을 때쯤 데려다놓거나 미용실 갔다가 에어로빅 하고 와서 데려가기도 하지요. 가정육아를 지원해야 하는 건 맞는데 일 자체가 너무 힘들다 보니까 못마땅해지게 되는 거죠.” 한 보육교사의 하소연이다(윤자영, ‘사회서비스 노동시장 분석’). 전업주부 또한 자기 정체성을 되묻는다. 요즘 인터넷 게시판에는 “전업주부는 잉여?” “전업주부의 가사노동은 얼마인가요”와 같은 글이 끊이지 않고 올라온다.
인하대 이완정 교수는 무상보육 이후 전업주부의 노동 대상과 정체성이 한꺼번에 흔들리는 상황에 주목한다. “가사노동에 이어 자녀양육도 사회화되며 전업주부 고유의 업무가 사라졌다. 지금은 아이를 맡겨놓고 술 마신다는 둥 몇몇 도덕적 해이만 문제 삼고 있지만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더 중요한 변화는 무상보육으로 전업주부라는 직종이 없어질 것이라는 점이다. 지금 영·유아 자녀를 둔 엄마들은 자발적·비자발적으로 전업을 택했지만 5~10년 뒤 새로 결혼하는 사람들은 결코 전업주부를 선택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징후는 도처에 있었다.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2012년 전체 가구의 26.8%가 여성이 가구주다. 2030년에는 34%로 늘어나리라 예상했다. 이혼율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는데다 구조조정과 조기 퇴직으로 남성이 더 이상 안정적인 가장 노릇을 감당하기 어려운 탓이다. 고도성장기에는 안정된 수입을 가진 남편을 둔 중류층 여성을 상징하는 전업주부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라도 비정규 일자리에 종사할 가능성이 있는 미취업 상태의 여성 인력으로 여겨진다. 일본 사회학자 야마다 마사히로는 이미 1999년에 쓴책 에서 “회사나 결혼이 생활을 보장했던 시대가 가고 전업주부는 도태될 위험이 높은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며 “전업주부가 사라지는 날이 곧 올 것”이라고 예고했다. “맞벌이를 하며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는 정도의 환경에서 각자가 자신의 꿈을 추구할 수 있는 방향으로 사회구조를 정비할 필요가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사라지는 직종, 전업주부는 누구인가. 2012년 통계에서 가사와 육아를 전담하는 비경제활동인구는 여성의 50.3%다. 여전히 절반을 넘는 대규모 집단이다. 이들의 기본노동 항목은 20가지가 넘지만 핵심은 육아다. 사회학자들은 “전업주부의 일상생활은 자녀의 등하교 시간과 사교육 시간을 중심으로 구조화돼 있다. 모성이야말로 한국 전업주부 정체성의 핵심”이라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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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들 일하는 여자의 위기는 세 번 찾아온다고 말한다. 육아휴직을 마칠 때,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그리고 고3 때. 자녀의 정서적 안정은 물론 교육적 성취까지 철저히 엄마에게 책임을 묻는 구조 탓이다. 인하대 윤홍식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는 좋은 대학을 다니는 학생들조차 큰 불안감을 느낀다. 교육 경쟁에서 낙오되는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너무 뻔하다. 전업주부는 노동과 생계부양 의무를 면제받는 대신 자식을 좋은 일자리까지 갖도록 할 부담을 지고 있다. 만약 이들이 취업이나 자아실현을 돌아보는 순간 자식의 경쟁력을 갉아먹고 자식이 도태될 가능성도 감수해야 한다”고 했다.
근거는 있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은기수 교수의 ‘비교방법론’ 수업에서는 2009년과 2012년 두 차례에 걸쳐 서울대와 수도권 2년제 대학생을 조사했다. 부모의 취업 상태와 교육 수준, 경제 형편을 묻는 조사다. 그 결과 서울대 재학생들의 어머니는 전업주부 비율이 높았고, 반대로 2년제 대학생들은 맞벌이 부모가 훨씬 많았다. 은 교수는 “고3 때 어머니의 취업 상황을 물은 조사다. 두 학교 학부모들의 교육 수준 자체가 차이가 컸다. 어쨌거나 계층 간에 교육이 대물림되는 현상이 뚜렷하다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얼핏 어머니의 취업 여부가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속사정을 들여다보면 소득·교육 수준이 높은 ‘전업 어머니’여서 가능한 경우가 많다. 윤홍식 교수는 “사교육을 따라잡으려면 엄청난 돈이 필요하지만, 돈 벌러 나가면 교육 관리는 못한다. 대부분의 전업주부 처지는 진퇴양난이다”라고 했다.
우리가 부러워하던 전업주부는 누구인가. 여성학을 전공한 이선영 박사는 “모두가 부러워하는 전업주부는 미취업자가 아니라 종신고용을 보장받은 남편과 상속받을 자산이 있고 자식을 취업시킬 능력까지 갖춘 소수일 뿐”이라며 “1% 계층을 모델 삼아 취업자는 주부를 부러워하고, 전업주부는 자아실현을 하는 취업 여성을 부러워한다. 아파트 한 동에 사는 여자들 모두가 서로를 부러워할 이유가 있다. 경쟁을 통해 행복을 확인하는 세대의 불행한 생존법”이라고 했다.
40대는 행복하고 50대는 흔들리고전업주부 삶의 다른 측면, 자신과 타인의 삶을 살피는 여유와 배려는 어떻게 되었을까?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한귀영 연구위원은 “한국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층은 40대 여성이다. 아이들을 어느 정도 키우고 자기 삶을 돌아볼 여유가 생긴 이들”이라며 “친구를 찾고 여행을 떠날 여유를 갖춘다. 이들처럼 여백 있는 삶은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것이지만 문제는 이런 삶이 40대 중산층 전업주부에게만 국한된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여성 취업률은 20대 후반에 71.4%로 가장 높다가 30대 초반에 급격히 낮아졌다가 50대에 62.3%로 다시 높아진다. 남성 가장의 경제적 어려움과 자식들 뒷바라지로 50대 여성의 삶이 크게 흔들리는 탓이다. 더 큰 문제는 전업에서 취업으로 돌아선 여성을 기다리는 것이 대부분 질 낮은 일자리라는 점이다. 윤홍식 교수는 “스웨덴은 무상보육을 하며 여성이 돌봄 노동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질 좋은 공공 일자리를 만들어냈다. 우리는 지금 이대로라면 전업주부가 여성 근로 빈곤층으로 고스란히 옮아갈 우려가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이것은 변화의 조짐이지 저주가 아닐지도 모른다. 야마다 마사히로는 “남편이나 자식, 아버지를 향한 퇴로가 열려 있는 한에서는 전업주부는 변혁의 힘이 될 수도 없고 새로운 사회의 비전이 될 수도 없다”고 못박는다. 한귀영 연구위원은 “전업주부는 지금까지 ‘가족의 왕국’에 갇혀 점처럼 흩어진 개별적인 사회적 자원이었다. 사회를 중심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일본 청년들을 향해 을 쓴 우치다 다쓰루의 충고는 지금의 전업주부들에게 더 유용할 듯하다. “약자가 약자인 것은 고립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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