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부모들은 누리과정을 국가지원 사업이나 여러 선택지 중 하나로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누리과정은 유아교육이 의무화되는 중대한 변화다.”(경기대 이부미 교수) ‘사실상의 의무교육’이 유아들을 덮쳤다. 우리나라 초등학교 취학 연령은 만 6살이다. 10명 중 8명은 그 이전에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닌다. 기관을 이용하는 비율은 높았지만 그들이 접하는 어떤 것도 필수는 아니었다. 그러나 2013년부터 만 3~5살을 단일한 교육과정으로 가르치는 누리과정이 시작되면 취학 전 국가 주도의 교육과정이 시행된다. 초등학교 교육과의 연계성도 강조한 과정이다. “이제는 3살부터 의무교육”이라는 전문가들의 말은 그래서 나온다.
지난해 만 5살을 대상으로 누리과정이 우선 시행됐다. 무상보육 정책에 따른 지원금과 누리과정 도입이 함께 이뤄지자 유치원과 어린이집 이용률이 상승 추세로 돌아섰다. 육아정책연구소에서 지난 5년 동안 기관 이용률을 살펴보니, 2007년 91.3%에서 2011년 82.7%로 대체로 줄어드는 경향이었다. 그런데 2012년에는 90.1%로 2011년보다 7.4% 늘었다(취원 대상 아동 수 기준). 새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을 다니게 된 취원 아동 수는 전국적으로 1만3493명이다. 누리과정을 도입하자 지금까지 기관을 다니지 않던 유아들이 제도권 교육·보육으로 들어오는 효과가 나타났다고 판단하는 근거다(‘5세 누리과정 이용 실태 및 요구 조사’). “유아교육의 오랜 소망이 마침내 이루어졌다. 국가가 책임지고 모든 유아에게 동일한 교육 기회를 주는 획기적인 사건이다.”(동국대 나정 교수) 90% 넘는 아이들이 같은 교육과정으로 비슷한 수준의 교사에게서 배운다는 유아교육 표준화의 오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그 꿈의 시작은 언제였을까. 1997년 김영삼 대통령 직속 교육개혁위원회에서 처음 ‘유아학교’라는 명칭의 단일한 유아교육기관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당시 소득이 높은 층이 주로 유치원을 찾고 서민층이 보육을 전담하는 어린이집을 보내는 현실에서 교육과 보육으로 양분된 유아교육을 하나로 통합하자는 취지였다. 그러나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갈등, 담당 부처들의 이견으로 통합은 실현되기 어려운 꿈처럼 보였다.
MB 정부 들어서 2010년부터 저출산해결 국가과제의 하나로 무상보육안을 내놓았다. 유치원과 어린이집 통합이 다시 이야기되기 시작했다. 당시 입안을 거들었던 유아교육 전문가 말에 따르면 당장 급격한 체제 개편은 어려워 보였다. 김대중 정부 때도 유아학교가 검토됐지만 실현되지 못했다. 그래서 떠오른 것이 소프트웨어 격인 통합적인 교육과정을 도입하는 안이다. 그 뒤 교육과학기술부에서 누리과정을 본격적으로 논의하고 보건복지부와 의견 조율에 들어갔다. 2011년 5월2일엔 교육과학기술부와 보건복지부가 합동으로 ‘만 5세 공통과정 도입 추진계획’을 발표했다. 십수 년을 끌어오던 논의가 6개월 만에 정책으로 나왔다. MB 정부 특유의 탱크식 업적주의가 만들어낸 결과다. 동국대 나정 교수는 "2개의 과정으로 양분되었던 취학전 유아교육이 하나로 통합된 것 자체에 큰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 |
누리과정이 시작되면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풍경은 어떻게 바뀔까. 경기도 안양에서 민들레어린이집을 운영하는 전영희 원장은 “우리 어린이집은 153명 규모의 크고 체계적인 어린이집이라 큰 변화가 없다. 오히려 입소 경쟁률이 높아졌다. 교사들도 책임감이 늘었다. 그러나 누리과정이 지나치게 교육적인 부분을 강조한 점이 아쉽다”고 했다.
창의력과 인성을 강조한 누리과정이 교육 위주의 안이라는 평가를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누리과정 초안을 만든 사람 중 하나인 나정 교수조차 안타깝게 평가하는 대목이 있다. 유치원 교사들은 104쪽 분량의 를 ‘무거운 짐’이라고 표현한다. 한 유아정책 관계자는 어린이집 표준보육과정과 유치원의 표준교육과정을 합치는 과정에서 힘을 겨루다 보니 항목만 숱하게 늘어났다고 귀띔한다. 분량뿐만 아니라 그 세세한 내용이 짐스러울 수도 있다. 나 교수는 “교사들의 편차가 크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교육 내용을 알려줘야 한다는 주장도 일리가 있지만, 아동 중심의 교육과정을 하라며 상세한 교육과정을 제시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다. 교사들이 일일이 각론을 따르려다 보면 아이 수준에 맞춘 교육을 고려할 여지가 없다”고 말했다.
누리과정은 위계화된 교육과정이다. 나이에 따라 신체운동과 건강, 의사소통, 사회관계, 예술 경험, 자연탐구 영역에서 목표가 다르다. 3살은 글씨에 관심을 갖거나 그림을 들여다본다면 4살은 도구를 만져보고 5살은 글씨나 그림 도구를 다양하게 사용하는 식이다. 아이들의 발달을 나이순으로 자르고 나누는 것이 과연 가능하고 바람직할까? 유치원 과정을 연구해온 유아교육 학자들조차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주로 자연탐구 영역이다. ‘수학적 탐구 하기’에서 3살은 5개가량의 구체물(블록 같은 것)을 세어보고 4살은 10개, 5살은 20개를 세도록 한다. 유아가 세기에 관심을 가질 때 꼭 다섯 손가락만 세도록 해야 할까? 게다가 수 세는 법을 초등학교에 가서야 배우는 아이도 있고 더 일찍 깨치는 아이도 있다. 수의 개념을 심어주고 싶다면 많고 적음을 비교해보거나 부분과 전체를 이해한다는 정도로 그쳤어야 하지 않느냐는 지적이다. 유아교육이 할 일은 아이들마다 다른 발달 속도를 존중하는 것인데 누리과정이 지나치게 세세한 표준화된 목표를 지향하는 것이 위험해 보인다.
서울신학대 백선희 교수는 “영유아기에 키워야 할 것은 감정과 창의성이다. 누리과정이 정형화되다 보니 창의적이고 공동체적 교육철학을 지닌 곳에서 융통성이 없다는 비판을 받게 됐다”고 전한다. 현장교육지원전문가 그룹에서 활동하는 장혜경 박사는 “누리과정이 시행되면 교사는 가르치되 아이는 배우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될 것”이라며 우려했다. 그는 “누리과정에 대한 회의는 기존 교육제도에 대한 회의에서 시작한다. 교육 내용에 집착하다 보니 삶에 대한 무력감을 키워왔다. 대학 교육을 위해 존재하는 교육 형식에 아이들이 3살부터 들어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기존 유치원 교육의 문제점은 교육 방식이 지나치게 제도화·형식화돼 있다는 점인데 누리과정도 비슷하다. 유아는 교구로 배울 게 아니라 사람한테 배워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되묻는다.
| |
생태유아교육을 해온 어린이집에서는 반발이 크다. 서울 구로구 항동에서 발도르프 철학이 담긴 어린이집을 운영해온 백미경씨는 “우리 처지에서는 교육의 하향 평준화다. 발도르프에서는 식사 시간을 중요하게 여긴다. 식탁보를 깔고 꽃도 꽂아두고 식기에 담긴 음식을 우아하게 예의를 갖춰 먹는다. 안전 항목 때문에 식탁보도 걷고 식판에 밥을 담아서 아이들과 상호 작용하느라 먹는 데 집중할 시간도 없어야 하느냐. 지원해주는 대신 표준화를 따르라면 진짜 보육을 잘했던 곳도 획일화로 갈 수밖에 없다”고 했다. 발도르프 교육에서는 오전 내내 나들이를 간다. 동네를 돌거나 뒷산을 오르며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종이 접고 글씨 쓰고 책 보고 가위질하는 누리과정이 맞을 턱이 없다. 그럼에도 누리과정을 앞두고 평가인증을 위해 영역별로 교구를 설치했다.
한국 루돌프슈타이너 인지학연구센터 이정희 대표는 “혜택을 바라는 부모들과 성과를 내려는 정부만 있었지, 누리과정엔 아이들이 없었다. 유아기를 일찍 끝내고 학교를 닮은 교육을 시작하는 것은 유아에 대한 인권침해”라며 소리를 높였다. “유아는 1교시, 2교시에 맞춰 성장하지 않는다. 놀이도 흐름이 있다. 아이들 고유의 리듬에 맞춰 가려는 교육이 있다면 그 또한 존중해야 한다”는 게 이 대표의 주장이다.
아닌 게 아니라 유아들의 시계는 다르게 흘러간다. 백선희 교수는 “어린이집은 하루를 염두에 두지만 누리과정은 3~5시간에 해당한다. 지금도 일부 어린이집은 종일 특별활동(특활)으로 채우고 있는 마당에 누리과정이 시행되면 특활이 양성화될 우려가 크다”고 했다.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는 특기나 적성 개발을 위해 외부 강사를 초청해 특활을 한다. 백교수는 “특활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대부분 특활이라는 이름으로 하는 일들이 선행학습에 가까운데다 조기교육과도 무관하지 않다. “무상보육으로 아낀 돈을 특활 업체에 가져다주는 격”이라는 것이다.
얼핏 꼽아보기에도 한국의 유아 대상 특활은 종류만도 150가지가 넘는다. 종이접기나 줄넘기처럼 특별하지 않은 것도 특활이고 뇌파 훈련, 다도, 수학, 한자 등 유아기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도 특활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습지 회사들까지 특활 시장에 뛰어들었다. 알려진 영어 특활 업체만도 20곳이 넘는다. 전영희 원장은 “어린이집에 대해서는 특별활동비 상한액을 두면서 유치원에는 아무 규제도 없다. 그래서 유치원과 특활 업체만 ‘노났다’고들 한다”고 전했다.
“아낀 돈, 특활 업체에 가져다주는 격”스웨덴에서는 유아를 둔 부모에게 일을 적게 시키는 부모 보험을 지지하는 좌파와 양육수당을 지급하자는 우파가 대립한 일이 있었다. 수당 대신 무상을, 표준 대신 공통교육을 택했다면 누리과정의 풍경은 바뀌지 않았을까.
얼마 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 대통령직인수위원회에서는 교육과정을 통합한 김에 유치원과 어린이집을 유아학교로 통합하자는 안이 나왔다. 장혜경 박사는 “어린아이일수록 작은 공간에서 질 좋은 교육을 해야 한다는 이상이 잊혀지고 있다. 아이에게 위압적인 대형 기관들이 먼저 인정을 받고 있다”며 “유치원과 어린이집도 규모를 기준으로 통합한다는 인수위의 발상은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인지학습 중심의 교육체계가 더 낮은 연령으로 내려오는 것을 걱정해야 할 시점이다. 외국에선 스웨덴의 유아학교든 프랑스의 모성학교든 이름은 학교지만 내용은 보육에 가깝다. 학교 중심 교육이 유아기로 확대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한 육아정책 전문가의 말이다.
글 남은주 기자 mifoco@hani.co.kr·사진 김명진 기자 littleprince@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단독] 윤, 국무위원들 계엄 반대 와중에 “발표해야 하니 나는 간다”
공수처, ‘경호처장 강제구인’ 뒤 윤석열 체포영장 재집행 가능성
‘공수처와 관저 대치 의혹’ 군인들, 김용현 경호처장 때 배치됐다
[단독] 윤석열, 계엄 9일 전 명태균 언급하며 김용현에 “특단대책”
버티는 윤석열에 보수언론도 “비겁하기 짝이 없다”
[영상] 공수처 “군·경호처 200명 팔짱 끼고 체포 막아…일부 총기 소지”
헌재, 윤석열 쪽 부실한 답변서에 “계엄 한달, 의견은 있어야” 질타
[영상] 바리케이드·군용차·버스·인간벽…윤석열 체포 위해 산길까지 뚫었지만
‘화살촉 머리’ 플라나리아, 국내서 신종 21종 발견
분당 상가건물 화재 30분 만에 초진…40여명 구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