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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세 당국은 삼성에 공로상 줘라

등록 2013-01-10 18:10 수정 2020-05-02 04:27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은 올해도 ‘혁신’을 경영 화두로 던졌다. 그는 지난 1월2일 신년하례식에서 “도전하고 또 도전해 새로운 길을 가는 성장의 길을 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임직원들에게 당부했다. 이렇듯 끊임없는 경영 혁신과 도전은 지금의 글로벌 기업인 삼성을 일궈낸 힘이다. 그러나 삼성의 혁신이 경영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삼성의 리더들은 국가의 자원을 총동원해 만들어진 글로벌 기업을 이씨 일가의 가족기업으로 유지하기 위한 ‘세습 혁신’도 멈추지 않았다. 삼성 리더들은 세금 없는 부와 경영권 승계를 위해 줄곧 도전했고, 대부분 성공했다.

삼성전자 제공

삼성전자 제공

공익법인·비상장사·주식연계채권…

삼성의 ‘세습 기술’은 간단하다. 총수의 그룹 지배권을 과세 당국이 세금을 물릴 수 없는 방식으로 2·3세에게 승계하는 것이다. 세법의 허술한 구멍을 찾아내 과감하게 파고들면 게임 끝이다. 이런 삼성 스타일은 창업주인 고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 때부터 시작됐다. 그는 ‘공익법인’을 적극 활용했다. 공익사업에 기부한 재산에 대해선 상속·증여세를 내지 않도록 규정한 당시 ‘상속세 및 증여세법’(이하 상증법)의 허점을 노린 것이다. 그는 1965년 삼성문화재단 등 공익 재단을 설립한 뒤 차근차근 주요 계열사의 주식을 이전한다. 1977년 후계자로 낙점된 이건희 당시 동양방송 이사는 공익재단으로부터 이 주식을 되산다. 아버지가 자식에게 오롯이 재산을 물려주는 훌륭한 방법이다. 경제개혁연구소의 보고서 ‘재벌 승계는 어떻게 이뤄지나-삼성그룹’을 보면, 이런 방식 등을 통해 이건희 회장은 아버지가 사망한 1987년 당시 총자산 11조5천억원이던 삼성그룹의 경영권을 181억원의 증여·상속세만 내고 승계받는다. 과세 당국은 한참 뒤인 1990년에야 공익법인을 통한 변칙 증여를 제한하도록 상증법을 고쳤다.

이건희 회장이 3세인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게 부와 경영권을 넘겨주는 과정은 더 교묘하고 대담하다. 일단 이건희 회장은 아들이 27살이던 1995년 본격적인 경영권 승계에 앞서 아들 손에 실탄으로 60억8천만원을 쥐어준다.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전무는 16억원의 증여세를 낸다. 경영권 승계 과정에서 거의 유일한 정상적인 세금 납부다. 이재용 부회장은 이를 종잣돈으로 에스원·제일모직 등 상장 직전의 계열사 주식이나 전환사채(CB·일정한 조건에 주식으로 전환할 수 있는 채권) 등을 사 모은다. 비상장 주식의 향후 상장 차익에 대해 선 제대로 세금을 물리지 않는다는 점을 악용했다. 얼마 뒤 이 계열사들이 증시에 상장돼 주가가 급등하자 이재용 부회장은 매입한 주식을 되팔아 수백억원대 차익을 거뒀다. 그야말로 땅 짚고 헤엄치기다. 이때도 과세 당국은 부랴부랴 상증법을 개정했지만, 이미 삼성은 손을 턴 뒤였다.

화룡점정은 그다음이다. 이재용 부회장은 그동안 부풀린 자금으로 주요 계열사의 CB·신주인수권부사채(BW·미리 정해진 가격에 신주를 살 수 있는 채권) 같은 주식 연계 채권을 본격적으로 매입한다. 주식거래보다 덜 눈에 띄고 증여세 부과의 연결고리도 약한 신종 채권을 활용한 것이다. 그 유명한 삼성에버랜드 CB가 이때 등장한다.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의 지주회사 격인 삼성에버랜드가 1996년 발행한 CB를 실제 가격의 10%에도 못 미치는 주당 7700원에 매입한다. 이런 대박의 기회는 다른 주주인 이건희 회장과 계열사들이 인수 권리를 포기한 덕분에 찾아왔다. 곧 이재용 부회장은 전환권을 행사해 삼성에버랜드의 최대주주로 올라선다. 더 나아가 1998년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그룹 지배권까지 손에 넣게 된다.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물산-기타 계열사’의 순환 지배구조가 완성됐기 때문이다. 이재용 부회장이 48억여원을 들여 이뤄낸 마법이다.

손해에 대해선 무죄, 배임은 유죄“삼성은 상속증여법상의 규제 공백을 찾아내서 충분히 활용했다. 과세 당국은 삼성을 쫓아가며 규제를 만들었다. 삼성이 상증법 발전에 기여했다는 말은 이 때문에 나온다.” -채이배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회계사

결국 이 과정에서 회사에 수백억원대 손해를 끼친 혐의 등으로 이건희 회장은 법정에 서게 됐지만 2009년 5월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는다. 불법 승계 과정에 대한 면죄부를 얻은 셈이다. 다만 법원은 삼성에버랜드와 판박이인 삼성SDS BW 헐값 발행 사건에선 이건희 회장의 배임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물론 형량은 집행유예에 그쳤다. 무결점 경영권 승계 과정에 ‘옥에 티’가 생긴 정도다. “삼성은 상증법상의 규제 공백을 찾아내서 충분히 활용했다. 과세 당국은 삼성을 쫓아가며 규제를 만들었다. 삼성이 상증법 발전에 기여했다는 말은 이 때문에 나온다.”(채이배 경제개혁연구소 연구위원·회계사)

삼성의 성공은 다른 재벌에는 독이 됐다. 삼성이 한번 써먹은 방법에 대해선 정부가 뒷북 대응을 한다며 각종 규제를 강화한데다 시민단체 등의 감시도 더 따가워진 탓이다. 일부 재벌은 삼성의 CB와 BW 저가 발행 기술을 변형한 수법들을 구사했다가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두산그룹이다. 지주회사인 (주)두산은 1999년 해외에서 1억달러 규모의 BW를 발행한다고 공시했다. 그러나 얼마 못 가 상당한 물량의 특혜성 BW가 박정원 당시 두산주류 BG 사장 등 4세들에게 흘러든 사실이 밝혀져 편법 경영권 승계 의혹이 제기됐다. 문제가 커지자 두산은 2003년 BW를 모두 소각했다.

삼성 스타일을 피해 새로운 방식을 개척한 재벌들도 있다. 2000년대 초반부터 유행한 ‘일감 몰아주기’가 훌륭한 대안이 됐다. 재벌 총수가 자식 앞으로 유망한 회사를 넘겨준 뒤 계열사의 일감을 몰아줘 매출을 올려주면, 자식은 이 과정에서 생긴 주식 매매 차익 등으로 주요 계열사 지분을 사들이는 방식이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의 아들 정의선 부회장이 2001년 설립한 현대 글로비스가 모범답안으로 통한다. 이번에도 과세 당국은 느릿느릿한 대응으로 올해 7월에야 처음 일감 몰아주기에 대한 과세를 할 예정이다.

‘삼성공화국’을 통째로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한 이건희 회장의 승계 과정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다. 아들의 왕국은 지금의 계열사간 순환출자에 의존한 지배구조를 전제로 유지될 수 있는 까닭이다. 지금 들끓고 있는 사회적 요구대로 이 순환출자의 고리를 끊게 되면 이재용 부회장은 빈약한 지분 때문에 삼성전자 등 핵심 계열사에 대한 지배권을 잃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하늘은 삼성 편이다. 바람막이가 돼줄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있는 덕분이다. 박 당선인은 이미 후보자 시절에 “기존 순환형 출자 구조는 그냥 두는 게 맞다”고 못박았다. 박 당선인은 금산분리를 강화하는 방안으로 중간금융지주의 의무화를 보완책이라며 내걸었다. 예컨대 삼성에버랜드를 지주회사로 전환시켜 한쪽에는 삼성전자 같은 비금융회사들을 두되, 다른 한쪽에는 중간금융지주회사를 통해 화재·카드·증권 등 금융회사들을 편입시키라는 뜻이다. 이때 중간지주사는 사업부문을 손자회사로 분리한 삼성생명이 될 가능성이 높다. 현행법에 따라 삼성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하면 일반 지주회사인 삼성에버랜드가 가진 금융회사들의 지분을 팔아야 하는 부담을 덜어주는 방식이다. 결국은 삼성 총수 일가의 경영권 유지에 보탬이 되는 방식이다. 

박 당선인 “기존 순환형 출자 구조는 그냥 둬야”

이런 사정 탓에 삼성은 수십조원의 지주회사 전환 비용과 경영방어권을 이유로 펄쩍 뛰는 모양새지만, 진심이 아니라는 반론도 있다. 김진방 인하대 교수의 지적이다. “삼성은 아마 박 당선인의 공약이 시행되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재용 부회장의 그룹 지배력은 더 강화될 것이다.” 완전한 이재용 시대를 열기 위한 삼성의 세습 혁신은 현재진행형이란 얘기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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