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선거가 진행 중일 때는 간혹 걱정이 된 적도 있었지만, 지내놓고 보니 이번 대통령 선거는 평온하게 잘 치러진 것 같다. 정책 대결도 비교적 성실하게 진행되고, 전체적인 선거 양상도 수준이 높아졌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영향으로 선거전에서 대인 접촉의 필요성이 줄어들었고, 그런 연유로 금전 선거의 필요성도 확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다만 중간에 튀어나온 막말들은 수준 이하였으며 그런 저차원의 짓거리마저 앞으로는 지양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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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적인 판세로 볼 때 기본적으로 보수가 우세하다는 점을 시인하고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6·25 전쟁을 치른 나라이고, 어쨌건 보수적인 영남이 얼마간은 반항적·개혁적인 호남보다 수적으로 압도적이며, 공산 압제로 수난을 당한 북에서의 난민들이 아직도 그때를 못 잊고 있다. 게다가 기독교 쪽이 대부분 보수적인 성향을 띠고 있으며, 재벌 등 대기업들이 언론·법원·검찰·학계 등 거의 모든 사회 분야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정당정치를 하는 곳의 정권 교체에는 시계추의 ‘진자 현상’이 있는 것 같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개혁 정권 10년 뒤에 들어선 이명박 대통령의 보수 정권은 5년밖에 안 됐다. 진자 현상으로 보면, 아직도 주기가 5년 또는 10년이 더 남은 것이다. 이 진자 현상이 뒤집히려면 평온한 선거로는 안 된다. 밑에서부터 들고일어나는 저항이 ‘민란’이라 할 정도에 이르러야 한다. 소수파 세력에 중간에 있는 세력까지 가세해야 본래 있는 다수파 세력을 뒤집을 수 있는 것이다. 미국에서도 ‘월가를 점령하라’는 상징적 표현으로 ‘1 대 99’의 저항운동이 있었지만, 우리나라도 빈부의 양극화 현상이 가속돼 ‘1 대 99’ 사회가 됐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잠재된 현상만으로 표가 되는 게 아니다. 그것이 의식화가 되어야 한다. 그런 것이 정당의 힘이다.
박근혜 후보에게는 선친의 후광이 플러스로 작용했다. 이런 선례는 아시아 나라에 많다. 인도·인도네시아·필리핀 등에서 아버지의 후광을 업고 집권한 예가 있고, 지금 버마(미얀마)에서도 진행 중이다. 그런데 야당인 민주통합당은 박 후보 공격에 집중한 나머지 똑같은 비중으로 심판해야 할 이명박 정권에 대한 공세를 별로 취하지 못했다. MB 정권은 부유층이 돈을 벌면 빈곤층도 따라서 부유해진다는 어설픈 ‘적하(트리클다운) 이론’을 내세워 부자만 도와주고 노동자를 핍박했으며 민생을 소홀히 했다. MB의 실정을 부각하지 못한 것은 야당의 크나큰 실책이다. 후보는 잘했는데 당이 무슨 기여를 했는지 모르겠다.
이제 박근혜 대통령 시대를 맞게 되었다. 국민이 그냥 긍정하고 있는 것이지 감동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동안 박 당선인의 공약에 나타난 바로도 수십 가지의 과제가 있다. 이를 몇 가지로 압축해 보겠다.
첫째, 국민의 생활과 관련된 우리나라의 거의 모든 지표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가운데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일일이 열거할 필요도 없이 국민이 대부분 몸으로 느끼고, 매일매일의 생활에서 고생하고 있는 것이다. 소득 상위 1%가 부의 16.6%를 갖고 있는데, 이는 OECD 회원국 가운데 미국(25%) 다음으로 부의 편중 현상이 심각한 것이다. 또 정부 통계조사를 보면 국민의 45%가 스스로를 하층민이라 응답하고, 58%가 지금 희망이 없다고 답했단다. 암울한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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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 복지 수준은 대단히 열악하다. 그래서 그동안 정당들은 모두 경제민주화를 내세웠고, 국민은 그것을 신기한 만능약으로 믿고 호응한 것이다. 경제민주화란 대단히 넓고 복잡한 개념으로 노사관계, 협동조합, 재벌, 대기업과 중소기업 관계 등 모든 경제 분야를 망라한다. 한마디로 유럽 모델이라는 복지국가로의 지향이다.
박 당선인은 측근 참모인 김종인 박사가 최근에 낸 를 면밀히 검토하기 바란다. 토지 세제 문제 등에 이견이 있고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이 우리 경제 공부 축적의 총합이라 할 수 있다. 우리나라의 수준을 OECD 국가 가운데 중위권 정도로 높여줬으면 한다. 복지 문제 하면 으레 나오는 것이 경제침체론이다. 대기업이 진원지가 되고, 그 영향 아래 있는 언론이나 경제 전문가가 동원돼 견제를 해왔다. 그러나 국민 생활은 너무 어렵다. 경제 발전과 복지가 함께 가야 한다.
둘째, 남북한 관계를 개선해야 한다. 5·24 대북 제재 조처를 풀어야 한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재선은 우리에게도 좋은 조건이다. 안보에는 ‘절대적 안전 보장’과 ‘상대적 안전 보장’이 있다. 한쪽의 절대적 안전 보장은 상대방의 절대적인 안보 불안정을 뜻한다. 평화를 위해서는 서로 상대적인 안전 보장을 택해야 한다는 이치다.
역지사지란 말이 있다. 우리가 한번 북의 위치가 돼 생각해보자. 그들은 세계 최강의 미군과 마주하고 있다. 미국의 군사력은 세계 여러 나라의 군사력을 전부 합친 것에 맞먹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규모다. 그 미국의 군대가 남쪽에 주둔해 있다. 말하자면 ‘독 안에 든 쥐’와 같다. 그럴 때는 퇴로를 열어줘야 한다는 게 예로부터 내려오는 병법의 지혜가 아닌가. 지금대로라면 북을 더욱 중국의 품으로 몰아넣는 불행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비록 북이 6·25 남침의 원죄를 저질렀지만 그들에게 우리가 담대한 양보를 해 형제애로 도와야한다. 민족의 역사가 내려다보고 있다.
셋째, ‘안철수 현상’에 대한 현명한 대응이다. 안철수 현상은 SNS 등 매체 혁명으로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생겨난 것이지만, 그 바탕에는 극심한 양극화 현상으로 일어난 기존 정치에 대한 반발이 있다. 앞으로도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 일본에서도 오사카 시장인 하시모토 도루를 중심으로 ‘안철수 현상’과 비슷한 게 일어나 이번 총선에서 큰 위력을 보였다. 그러나 이는 일본의 경기침체, 강국으로 등장한 중국 등에 자극받은 극우화 현상으로 우리나라의 경우와 다르다. 어쨌든 ‘안철수 현상’, 즉 ‘새 정치’ 요구에 대한 대응을 생각해보자.
비례대표·결선투표제로 소외층의 목소리에 귀기울여라
① 우선 국가 기강이 바로 서고 부정부패를 쓸어내야 한다.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고 백번 말해도 옳은 이야기다.
② 권력의 분권화가 필요하다. 지금 부패는 암처럼 퍼지고 있다. 여기서 생각할 대목은 분권화와 기강 확립은 상충하기도 해서 그 수준과 속도를 적절히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책임총리 운운하지만 대통령제에서는 별 실효가 없는 이야기고 헌법대로만 하면 좋은 것이다.
③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늘리는 일도 필요하다. 노동자·농민 등 소외계층과 여성 등 소수자의 의견을 국회에 잘 반영하기 위해서다. 세계적 평균으로 볼 때 500명 선까지 의원을 늘릴 수 있다는 연구도 있으나, 국민의 거부감을 고려해 비례대표 증원을 위한 얼마간의 확대는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늘 ‘10만 선량’(인구 10만 명에 국회의원 1명)이라고 말해왔다. 지금 인구는 5천만 명 수준이다.
④ 프랑스처럼 대통령 선거에 ‘결선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이번 선거는 결과적으로 비슷하게 됐다. 그런 경우 다당제가 될 것이 아니냐는 우려가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결선투표제가 지향하는 목표다. 국정에 반영되기 어려운 소수파들에게 연립 방식으로 정치 참여의 기회를 넓혀주기 위해서다. 비례대표 확대의 원리와 같은 이치다. 민주정치의 질적 향상이다.
⑤ 정당이 중앙당의 권한을 통해 공천권을 행사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미국에는 중앙당이 없다시피 하다는 예를 들며 우리나라의 중앙당 공천권을 없애자는 주장이 있는데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다. 우리나라는 개혁 과제가 많아 중앙당의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이 필요하다. 다만 공천에서 상향식과 하향식을 적절한 선에서 조정할 수는 있겠다. 기초자치단체장의 정당 공천은 폐지하는 게 좋을 것으로 본다.
⑥ 정치의 수준이나 정치 감각을 향상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상대방을 마르크시스트, 공산당이라고 하는 한심한 색깔몰이가 나왔다. 그것도 여당 선거대책위원회 고위 간부들의 의도적으로 보이는 발언이었다. 긴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정치의식과 정치 언어의 창피한 저수준도 좀 향상해야 한다. 정치인의 반성과 언론의 도움이 필요하다.
⑦ 최근 어떤 외신은 또다시 “한국의 정치인들은 재벌의 호주머니 속에 있다”고 조롱했다. “정치가 시장에 넘어갔다” “기업은 2류, 정치는 4류” 등의 이야기도 있었다. 한마디로, 정치력이 경제력에 대한 합리적인 통제력을 회복해야 한다. 이것이 민주정치의 본질이다.
특별히 박 당선인에게 부탁할 게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잘잘못은 이미 밝혀졌고 정리가 돼 있다. 그 잘못을 시정하고 보충하는 데 온 힘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보태어 MB 정권 때 후퇴한 민주주의의 회복은 양적으로뿐만 아니라 질적인 심화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양적 민주주의(Quantitative Democracy)와 질적 민주주의(Qualitative Democracy)란 개념이 다르며, 프랑스의 경우에는 후자에 가깝다. 그것이 선친의 후광으로 당선된 사람의 책무다.
파격도 새 시대의 상징적 조처 될 것
우리나라 보수정당은 영국의 보수당과는 하늘과 땅 차이가 있다. 토호 조직인 측면이 있으며 잡탕이기도 하다. 정당이 추구하는 뚜렷한 철학이 있고 수준 높은 보수정당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정권이 국민을 위한 이상 실현의 추진체가 아니라, 자리나 이권 획득을 위한 조직으로만 보이는 타락상은 극복해야 한다.
복지는 가장 보수적인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원조라고 일컫는다. 미국에서도 보수적인 공화당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독점기업을 깨는 등 큰 개혁을 단행한 역사가 있다. 박 당선인은 선친과 달리 5년 단임의 임기가 아닌가. 온갖 노력과 정성을 다해서 좋은 업적을 내야 한다. 경제민주화를 구상하던 문재인 캠프의 경제 전문가 이정우 교수나 안철수 캠프의 경제 전문가 장하성 교수 또는 전성인 교수를 대담하게 기용하는 등의 파격도 새 시대를 열어가는 좋은 상징적 조처가 될 것이다.
범국민적 협력체제 운운은 말이나 자리배정도 중요하겠지만 정책 실천을 통해 이뤄져야 알맹이가 있을 것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박근혜 대통령의 선정(善政)을 간절히 염원한다.
남재희 언론인·전 노동부 장관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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