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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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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년 만에 인정된 국가폭력

서울중앙지법, 공권력 부당 개입으로 노동기본권 등 침해됐다며 YH무역 신민당사 점거농성자들에게 배상 판결
등록 2012-12-21 21:09 수정 2020-05-03 04:27

1979년 8월11일 새벽 2시, 정사복 경찰 등 1200여 명이 서울 마포구에 위치한 신민당사에 들이닥쳤다. 4층 강당에서 이틀째 농성을 하고 있던 YH무역 여공 187명을 강제로 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진압부대는 곤봉·벽돌·쇠파이프 등을 무차별적으로 휘둘렀다. 여공들과 신민당 의원, 취재기자 등 1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23분간 이어진 지옥은 끝내 스물한 살 여공을 건물에서 밀어뜨렸다.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열여섯 나이에 광주 집을 떠나 서울로 온 김경숙이었다.

1979년 8월 폐업 철회를 요구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노조원들.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제공

1979년 8월 폐업 철회를 요구하며 신민당사에서 농성 중인 YH무역 노조원들. 한국여성노동자회협의회 제공

박정희 재가 받은 진압 작전

가발 및 봉제품 수출업체였던 YH무역은 무리한 사업 확장과 횡령 등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되자 일방적으로 폐업을 해버린다. 가난한 집안의 생계를 위해, 하루 16시간을 허리 한 번 펴지 못하고 일해온 노동자들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YH무역 노조는 노동청·재무부·청와대 등에 회사 정상화를 호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발걸음을 옮긴 곳이 야당인 신민당사였다.

경찰은 김경숙이 작전 시작 전에 스스로 동맥을 끊고 투신자살했다고 발표한다. 거짓이었다. 진실이 밝혀진 건 그로부터 29년이 지나서였다. 2008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과거사위)는 김경숙의 죽음이 국가권력이 저지른 타살임을 분명히 했다. 안전 조처도 제대로 하지 않은 상황에서 폭행을 피하다 추락사했다는 것이다. 무리한 강제 해산의 배후는 청와대였다. 작전은 박정희의 재가를 받아 시행됐다. 박정희 정부는 1979년 8월17일 YH노조 지부장 최순영 등 간부 4명을 국가보위에 관한 특별조치법 위반과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로 구속 기소했다. 또 ‘불순세력이 개입해 사회 불안을 조성한다’며 도시산업선교회를 농성 배후로 지목했다. 과거사위는 이에 대해서도 근거가 없다고 밝혔다. 사회 통제의 고삐를 죄던 정권에 맞서 부마항쟁 등 역풍이 몰아쳤다. 유신정권의 몰락은 그렇게 다가왔다.

사건 발생 33년이 지난 2012년, YH 사건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배상을 받게 됐다. 지난 6월 서울중앙지법 민사42부(재판장 이건배, 배석판사 백소영·이성욱)는 김경숙 열사 유가족, YH무역 노조원 24명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소송에서 피해 정도에 따라 각각 1천만~4천여만원을 배상하라는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다. 농성의 합법성 여부를 다투기 전에, 과거사위가 규명한 공권력의 부당한 개입에 대해 책임을 물은 것이다. 재판부는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는 국가가 공권력을 불법으로 개입시켜 노동기본권, 생명·신체의 자유, 직업 선택의 자유 등을 침해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최종 불법행위일로부터 5년이 지나 손해배상 청구권에 대한 시효가 소멸됐다고 항변했으나, 재판부는 과거사위 조사 결정이 있던 2008년 3월13일까지는 피해자들이 제대로 권리를 행사할 수 없었다고 판단했다.

 

금전적 보상으로 한이 풀릴까

과거사위는 YH무역뿐 아니라 청계피복노조·원풍모방·반도상사 등 1970~80년대에 일어난 10개 노조 탄압 사건에 대해 ‘국가가 사직강요, 불법 연행, 블랙리스트 작성 등 인권침해를 했다’고 결론 내렸다. 사건 피해자들은 국가가 반성조차 하지 않고 있다며 2010년부터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냈고 최근 승소 판결이 잇따르고 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심사위원 20자평▶
권김현영 언니들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김보라미 진실과 정의는 시간이 지나도 지켜져야 한다
한가람 쌍용차 사태도 국가가 배상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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