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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민주화가 헌법에 규정된 1987년 이후 모든 대통령은 ‘최초의 재벌개혁 대통령’을 외쳤다. 자의든 타의든, 그들에겐 압축 고도성장 시절 재벌에 맞춤 설계된 경제구조를 공정한 경쟁과 분배가 가능하도록 뜯어고치겠다는 포부가 있었다. 적절한 수단도 주어졌다. 전두환 정권에서 정치·경제 민주화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분출되는 과정에 출자총액제한제도(출총제), 상호출자 금지, 지주회사 금지 제도 등 재벌에 대한 기본적인 규제 틀이 도입된 덕분이다. 하지만 재벌개혁은 번번이 후퇴했고 경제구조는 점점 더 왜곡돼왔다. 권위주의적 군사정권이 물러난 뒤 재벌·보수언론·관료가 조직적으로 정부의 개혁을 좌절시켜온 탓이다.
1987년 헌법에 들어간 ‘경제민주화’
기득권 세력에게 늘 승리를 안겨준 마법의 주문은 ‘경제위기론’이다. 일단 대통령이 경제개혁을 할 조짐이 보이면 재계는 경제단체나 민간연구소를 동원해 “경제가 무너질 판에 성장동력인 재벌마저 해체하려 들면 안 된다”고 분위기를 띄운다. 보수언론과 정치인이 바람을 잡으며 명분을 만들어주면 모피아(재무 관료)가 대통령 설득에 나선다. 국정 성과를 내려면 재벌의 신규 투자와 고용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대통령은 결국 재벌 편에 선다. 물론 이때 기득권 세력이 활용하는 경제위기론은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같은 실체로서의 경제위기와는 전혀 다르다. 경제위기론에선 경제불안 요소에 재계의 일방적인 진단과 처방이 덧씌워진다. 김상조 경제개혁연대 소장(한성대 교수)은 “수구 이데올로기가 된 경제위기론은 지난 20여 년간 반복되며 개혁을 저지하는 수단으로 악용돼왔다”고 지적했다.
경제위기론이 본격적으로 위력을 발휘한 건 김영삼 정권부터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권 후반인 1996년 5월 재벌 총수의 황제경영을 막겠다며 계열사 채무보증한도 제한 등을 담은 ‘신재벌정책’을 꺼내들었다. 재계가 즉각 반격에 나섰다. 재계는 당시 국제수지가 악화되고 국가채무가 쌓이는 등 외환위기의 전조 현상을 ‘고비용 저효율론’으로 엉뚱하게 치환했다. 원화 강세에 따른 수출 불황과 기업의 과도한 차입경영 등이 위기의 원인인데도, 마치 정부의 기업 규제 때문에 경제의 효율성이 떨어진 것처럼 왜곡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은 기업편을 들며 ‘신재벌정책/부처 간 “불협화음”/ 주무부처도 아리송… 재계 불안’( 1996년 5월16일치) 따위의 기사를 쏟아냈다. 국회는 관료들을 불러 질책했다. 결국 나웅배 경제부총리가 같은 해 8월 경질됐고 신재벌정책은 흐지부지됐다.
1997년 외환위기를 초래한 재벌에 대해 강력한 개혁 의지를 드러낸 김대중 정권 때엔 기득권의 반발도 좀더 정교해진다. 출총제를 둘러싼 우여곡절이 대표적 사례다. 김대중 대통령은 당선 직후인 1998년 2월 “외국자본의 인수·합병(M&A)으로부터 경영권을 방어해야 한다”는 재계의 요청에 따라 출총제를 폐지했다가 부작용이 생기자 2년 뒤 부활을 결정한다. 그러나 재계는 제도를 시행하기로 한 2001년 4월이 되자 ‘중국추격론’과 ‘위기재발론’을 내세워 완전 폐지를 주장한다. 언론사도 ‘30대 그룹 출자초과액 10조 육박’( 2001년 4월26일치), ‘재계의 정부 성토 배경과 내용/ 감 놔라 배 놔라에 기업 멍든다’( 2001년 5월10일치) 따위의 기사로 재계를 엄호했다. 재계는 협박도 서슴지 않았다. 기업 규제로 국내 기업 환경이 악화되니 해외로 떠나겠다는 ‘자본 망명’ 카드를 꺼내든다. 김대중 정부는 같은 해 11월 백기를 들고 출총제를 포함한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조처를 발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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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의 더블딥(반짝 상승 뒤 재침체) 우려와 카드 버블, 내수침체 등 온갖 악조건 속에 들어선 노무현 정권은 ‘성장과 분배의 조화’를 내건 대선 공약과 달리 집권 초반부터 재벌을 경제정책의 동반자로 인식했다. 재계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시절 삼성경제연구소를 통해 청와대에 ‘국민소득 2만달러’라는 의제를 건넸다.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한국 산업경쟁력 붕괴 단계”라며 불안감을 부추기고, 언론은 ‘한국 ‘1만불 늪’서 8년째 허우적’( 2003년 6월9일치) 따위의 기사를 쏟아냈다. 노무현 대통령은 임기 첫해인 2003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공식 국정 어젠다로 발표한 뒤 재벌 규제를 사실상 대부분 풀어줬다. “대통령들은 선거 때는 유권자 표를 의식해 재벌개혁을 외치다가 당선되면 재계의 극심한 저항과 로비에 곧 굴복한다. 그나마 김대중 전 대통령은 1년 정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6개월 정도 (재벌개혁을) 추진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처음부터 포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대선 후보 때부터 재벌 의존 성장 전략을 펴서 논할 필요도 없다.” 최정표 건국대 교수(경제학)의 지적이다.
올 12월 대선을 앞두곤 진작부터 재계가 ‘개혁 저지 시스템’을 가동하며 총공세에 나서고 있다. 대선 과정에선 숨죽이고 있다가 당선자가 결정된 뒤 본격적인 행보에 나서던 이전과 사뭇 다르다. 세 대선 후보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경쟁적으로 재벌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자 위기감이 전보다 높아진 탓으로 보인다. 게다가 반독점과 공정거래, 노동권 보장, 소득재분배 등 다른 경제민주화 관련 공약도 재계는 재벌개혁 못지않게 껄끄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분위기 반전에 또 전경련이 앞장섰다. 전경련은 최근 기존 경제위기론의 재탕인 ‘한국 경제 사막화론’을 내세우며 전반적인 경제 활력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기업 투자를 위축시키는 경제민주화를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2.4%(한국은행 전망치), 내년은 3.2%로 경기가 둔화 추세이긴 하다. 그러나 경기 둔화엔 세계경제 동반 침체와 국내 산업구조 고도화에 따른 저성장 등과 같은 구조적 문제가 큰데도, 재계는 무턱대고 성장 중심 정책을 강화해야 한다는 수십 년 된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한발 더 나아가 전경련은 한국경제연구원 등을 내세워 징벌배상제, 지주회사 규제, 출총제 등 주요 대선 경제민주화 쟁점이 마치 한국 경제를 침몰시킬 괴물인 양 맹비난하며 폐기를 주장하고 있다. 협박도 빠질 수 없다. 전경련은 11월15일 600대 기업 설문조사 결과를 토대로 “내년 신규 투자는 줄고 인력 구조조정이 이뤄질 것”이라며 사람들의 공포 심리를 부추기고 있다.
보수 언론들도 관심을 경제민주화에서 성장으로 돌리려 안간힘을 쓰고 있다. ‘박·문·안 측 모두 ‘경제파이 키우기’ 전략은 없었다’( 10월30일치), ‘알맹이 없는 성장대책… 성장률 1.6% 쇼크 이후 끼워넣기’( 11월5일치) 따위의 기사가 대표적이다. 뉴라이트 등 일부 보수 성향 지식인들은 잇따라 시국선언대회를 열어 “경제민주화 공약을 철회하라”고 주장한다. 기득권 세력의 조직적 저항은 이번에도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 무엇보다 새누리당의 박근혜 후보가 11월8일 “경제민주화를 중요시 여기며 동시에 경제성장도 중요하게 생각한다”며 사실상 성장론으로 선회했다. 박 후보는 실제 11월16일 경제민주화 공약 발표에서 재벌개혁과 관련한 핵심 정책수단을 모두 빼버렸다. 기득권의 끊임없는 압박과 박 후보의 전통적 보수층 결집이라는 ‘집토끼 전략’이 손을 잡은 결과다.
‘경제민주화≠성장’ 공식의 파괴
문 후보와 안 후보는 “가짜 경제민주화의 얼굴이 드러났다”며 박 후보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문·안 캠프에도 앞으로 수위가 높아질 기득권의 공세를 막아낼 뚜렷한 대안은 없다. 무엇보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선명성을 드러내 집권에는 성공하더라도 ‘여소야대’라는 현실적 난관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지금껏 겉으로는 경제민주화 구호를 외치면서도 이미 제출된 관련 법안을 이번 정기국회에서 통과시키기는커녕 야당과의 정책 협의조차 외면하고 있다.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뱀처럼 지혜로운 전술전략이 없다면 과거처럼 경제민주화에 실패하기 쉬운 구조다. 노무현 대통령 때 경제개혁에 좌절한 경험이 있는 문 캠프 안에서는 벌써부터 위기감을 내비친다. 문 캠프에 참여하고 있는 한 교수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더라도) 재벌개혁이 구호에 그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심지어 다른 경제민주화조차 재벌의 협박에 침식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일하는 게 별로 신나지 않는다”고 했다. 아직 정당 기반이 없는 안 캠프 쪽은 “정부가 개혁을 강제하기보다는 재벌 스스로 개혁안을 내놓으면 정부가 법과 제도로 적극 지원할 것”이라는 원론적 수준의 대안만 내놓을 뿐이다. 경제민주화를 오랫동안 주장하며 준비해온 지식인과 시민단체 사이에서 문·안 후보의 경제민주화에 대해서도 우려가 나오는 건 이 때문이다. “집권세력의 경제민주화 실현 의지와 역량이라는 면에서 보면 야권의 문 후보나 안 후보도 그다지 미덥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강고한 저항을 뚫고 경제민주화를 추진하기 위한 팀워크가 없다.” 유종일 한국개발연구원(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의 우려다.
야권의 대선 승리를 넘어 집권 이후에도 경제민주화 정책의 실현 가능성을 높이려고 각계가 지금껏 제안한 대안은 4가지 정도로 추려진다. 첫째, ‘경제민주화≠성장’ 공식의 파괴다. 경제민주화는 성장 일변도의 경제정책에 대한 반성에서 출발하지만 성장의 반대말이 아니다. 경제민주화를 분배 문제로만 한정해 성장의 대척점에 둔다면, 경제민주화가 성장을 저해한다는 재계와 박 후보 쪽의 주장이 힘을 얻을 수 있다. 현재 문·안 후보 모두 경제민주화가 새로운 성장 전략이라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지만, 근거의 구체성이 떨어져 전통 성장론을 뛰어넘지 못한다는 지적이 많다. 김상조 소장은 “경제민주화를 통해 새로운 경제 질서를 만들어내야 위기를 극복하고 지속 가능한 성장을 할 수 있다는 인식을 유권자들이 갖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둘째, 우선순위의 설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험난한 경제민주화 과정에 정부나 국민이나 지치지 않으려면 크지 않더라도 잦은 성공 경험이 쌓여야 하기 때문이다. 일단 성공률을 높이려면 대선 과정에서 세 후보 간 의견 차이가 없었던 정책부터 실현하는 게 좋다. 여야 간 합의나 정책 실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기업 총수의 불법행위에 대한 집행유예나 사면 금지, 골목 상권 보호,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 등 세 후보의 공약수를 먼저 공략한 뒤 견해차가 큰 출총제 부활이나 순환출자 금지 등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셋째, 대통령 당선 뒤에는 정권 초기를 노려야 한다. 김대중 정권은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정권 초기엔 경제개혁을 추진하다 임기중반 이후 레임덕에 걸리자 손을 놓았고, 김영삼 정권 땐 아예 시기를 놓쳤다. 정권 중반이 넘어가면 대통령이 경제 성과에 초조함을 느껴 기득권의 성장 논리에 포섭되기 쉬운 탓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2004년 경기 흐름이 부진하자 경제정책의 중심을 진보적 학자 출신인 이정우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에서 모피아인 이헌재 경제부총리로 옮긴 뒤 본격적으로 성장 중심의 경기부양책을 실시했다. 김기원 한국방송통신대 교수(경제학)는 “시간을 지체하면 경제민주화 조처의 속도가 거대한 기득권 세력의 힘을 누르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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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경제민주화를 체계적으로 지휘할 전담조직의 신설이다. 기존 정부 조직엔 기득권 세력의 성장 논리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관료가 다수 포진해 있어 경제민주화 추진에 대한 공감대가 떨어지는 탓이다. 실제 최근 대선 후보의 경제민주화 공약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담은 기획재정부의 내부 보고서가 외부로 유출돼 논란이 일기도 했다. 박 후보와 문 후보는 지금까지 경제민주화 추진기구와 관련해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다. 안 후보는 대통령 직속 재벌개혁위원회 설치를 약속했지만, 실효성이 낮은 자문위원회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유종일 교수의 제안은 이렇다. “예산편성권과 정책조정권을 바탕으로 경제민주화 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부총리급 ‘민주경제원’을 창설해야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 논의가 야권 단일화 후보의 대선 공약에 포함돼야 한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야권의 의지가 확고하다면 이들보다 한 수 위인 기득권의 지겨울 만큼 일관된 논리, 제때 치고 빠지는 기술, 철저한 협공부터 배워야 한다는 주문이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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