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꿈꾸는 사람들의 것이다.” 심장의 울림은커녕 터럭에 미동조차 주지 않는 이 문장을 박원순은 2004년 펴낸 책 제목으로 썼다. 1980년대 중반 인권변호사로 사회운동의 첫발을 뗀 뒤 1996년 참여연대를 설립해 한국의 대표적 시민단체로 성장시키기까지 자신의 경험담과 철학을 강의록 형태로 정리한 책이었다. 박원순은 당시 상임집행위원장을 끝으로 8년 동안의 참여연대 활동을 정리하고 기부·나눔 운동 단체인 아름다운재단으로 행동의 근거지를 옮긴 상태였다. 이후 그는 풀뿌리운동 싱크탱크인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를 거쳐 2011년 10월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시민후보’로 나서 시민운동가 출신으로는 첫 서울시장이 됐다.
서울시장 출마에도 적극적이지 않았다
박원순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공적 활동을 시작한 30대 초반 이래 자신이 줄곧 가져온 꿈에 대해 이야기해왔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겠다.” 진술의 진정성을 신뢰한다면, 이 꿈을 실현하기 위한 방편으로 그는 여러 단체를 조직하고 숱한 직책을 맡아왔던 셈이다. 그사이 박원순도 예순을 바라보게 됐다. 나이와 서울시장이란 현재의 위치를 고려할 때, 박원순 앞에 남아 있는 선택지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앞서 박원순의 자리를 거쳐간 이들에게 최종 목적지는 대선 출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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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장이 한국에서 어떤 자린가. 야권에 박원순은 5년 뒤 사용할 수 있는, 살아 있는 유력 카드다.” 이철희 두문정치전략연구소장의 진단이다. 정치권 출신인 서울의 한 기초단체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 박원순의 뜻이 무엇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때가 되면 그를 어떻게든 대선판으로 끌어내려는 움직임이 있을 것이다. 박원순이 처음부터 서울시장 출마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 것도 아니지 않나.” 물론 박원순의 ‘사심 없음’과 빈약해 보이는 권력의지를 들어 그의 목적지는 대선이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민주통합당의 한 재선 의원은 이런 말을 한다. “권력의지? 누구에게나 있다. 자리와 기회가 생기면 없던 의지도 생기는 게 사람이다. 박원순이 걸어온 길을 볼 때, 대선에 나올 가능성은 70% 이상이다.”
박원순을 무대로 호출하려는 움직임은 2007년 대선을 앞두고도 있었다. 이른바 ‘범여권’의 누구를 붙여봐도 한나라당 주자인 이명박·박근혜와 게임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박원순은 일축했다. 주변 만류도 거셌다. 이후로도 박원순은 “정치엔 생각이 없다”는 뜻을 거듭해 밝혀왔다. 그럼에도 정치권과 시민사회 일각에선 박원순이 결국 무대에 오를 것이란 전망을 거두지 않는다. 서울시장 출마설이 나돌던 2011년 여름, 박원순을 오랜 기간 지켜본 시민사회 중견 활동가는 이런 말을 했다. “인권운동에서 권력 감시, 풀뿌리 자치행정으로 박원순의 관심과 활동 영역이 옮겨온 것을 주목해야 한다. 여의도(정치권)를 우회해 태평로(서울시장)로 가는 코스다. 여의도의 때를 안 탄 시민운동가 출신 서울시장이 나온다고 상상해보라. 태평로에서 청와대는 지척이다.”
박원순이 치밀한 기획 아래 대권 프로세스를 가동해온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서울시장에 당선됨으로써 그가 차기 대선의 잠재 후보군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는 사실이다. 물론 박원순 자신이나 주변에선 이런 시선을 부담스러워한다. 시장으로서 확실한 성과를 보여주기도 전에 차기 주자로 거론되는 상황 자체가 시정 운영엔 적잖은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자칫 숙고 끝에 내린 행정적 판단조차 ‘큰 그림’을 염두에 둔 정치적 행보로 해석돼 ‘정치인 출신보다 더 정치적’이란 뒷얘기가 따라붙기 십상이다.
2017년 박원순은 2012년 안철수와 다르다
지지자들 바람대로 박원순은 유력한 차기 주자로 부상할 수 있을까. 정치권 안팎에선 몇 가지 선결조건을 든다. 우선은 서울시장으로서의 확실한 존재감이다. “박원순표 시정이 무엇인지 보여줘야 한다. 그러려면 2년6개월밖에 안 되는 보궐 임기는 부족하다. 재선은 필수다. 정교한 중·장기 플랜을 마련하고 착실히 실행에 옮겨 시민들에게 삶의 변화를 체감하게 해야 한다.” 4선의 고재득 서울 성동구청장의 말이다. 이철희 소장의 생각도 다르지 않다. “복지가 됐든 주거가 됐든 일자리가 됐든, ‘박원순 브랜드’로 내세울 업적 하나는 있어야 한다.”
또 다른 관건은 행정가의 역할을 넘어 야권 전체를 아우르는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줄 수 있느냐다. 서울 지역의 한 민주당 의원은 말한다. “서울시장 후보와 대선 후보에게 요구되는 정치력은 하늘과 땅 차이다. 게다가 행정 수요자인 시민과 각자가 정치 행위자인 당원·정치인들 처지는 다를 수밖에 없다. 시장으로는 성공해도 당과 진영 내부의 이견을 아우를 충분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한다면 길은 난망하다.”
안철수 대선 후보와의 관계 역시 그로선 풀어야 할 매듭이다. 측근들도 인정하듯, 박원순과 안철수 모두 정당정치에 대한 실망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시민적 열망을 등에 업고 등장했다. 정치인 출신이 아니라는 점, 젊은 세대가 희구하는 ‘멘토형 인물’이란 이미지도 겹친다. 정치평론가 김종배씨는 말한다. “박원순은 두 개의 지점에 결박돼 있다. 인물로는 안철수, 패러다임으로는 시민정치다. 서울시장으로서 업적을 쌓는 것 못지않게, 자신에게 드리운 안철수의 그림자를 얼마나 걷어낼 수 있느냐에 정치인 박원순의 미래가 걸려 있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안철수의 그림자는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걷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박원순이 2014년 시장에 재선된다고 가정해보자. 다음 대선이 있는 2017년엔 박원순은 소속 정당(민주당)이 확실하고 행정경험도 7년 가까이 쌓게 된다. 지금의 안철수와는 상황 자체가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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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정치권 안팎에는 ‘박원순의 정치적 미래는 안철수의 성패에 달려 있다’는 시각이 적지 않다. 16·17대 대선 당시 민주당 대선 캠프에서 전략기획을 담당했던 한 관계자의 진단이다. “안철수가 대통령이 된다면 간단하다. 성공하면 박원순에게도 좋고, 실패하면 안 좋다. 선례가 되니까. 하지만 대통령이 되지 못하면 상황이 복잡해진다.” 김종배씨 진단도 비슷했다. “대선 이후에도 안철수가 여전히 유력한 대안으로 남아 있는 상황이라면 그와 경쟁해야 할 처지인 박원순으로선 좋을 게 없다. 하지만 그가 모양을 구기지 않고 조용히 무대 뒤로 퇴장해주면 박원순에겐 정치적 공간이 열릴 수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안철수 현상’을 만들어낸 정치적 에너지를 고스란히 흡수할 수 있느냐는 전적으로 박원순의 선택과 노력에 달렸다.”
‘실패한 오세훈’ 잊지 말아야
‘안철수의 운명’을 가정한 다양한 시나리오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박원순으로선 시정에 전념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길이 없어 보인다. 어떤 시나리오가 됐든 그것이 효력을 가지려면 그 제1조건은 ‘시장 박원순’의 성공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당분간 박원순의 시선이 머물러야 할 곳은 ‘안철수의 성패’가 아닌 ‘실패한 오세훈’인지도 모른다. 지금의 판을 열어준 그를, 우리도 너무 잊고 있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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