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이 있기 전까지 유목민이던 내 삶은 하루하루가 평온했다. 같은 지역 출신의 남편을 만나 결혼하고, ‘우부르한가이 아이마그 부르드 솜’이라는 시골로 내려가 가축을 치며 살았다. 비옥한 땅에서 양들은 푸른 풀을 뜯어먹으며 나날이 번식했고, 어린 딸과 말 그대로 걱정 없는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한 번도 깨지 않고 잘 수 있게 한 화로
하지만 지구에 불어닥친 기후변화가 우리 가족에게도 서서히 영향을 끼치기 시작했다. 여름에 비가 거의 오지 않더니, 땅에서는 더 이상 풀이 자라지 않았다. 봄가을에는 잦은 먼지바람만 일었고, 겨울에는 평소 추위보다 몇 배나 강한 한파가 갑작스럽게 뒤덮어 가축이 얼어죽기도 했다. 그렇게 2000년부터 2001년까지 200마리의 양이 죽었다. 게다가 남편 건강이 나빠졌다. 최악의 시기를 보내던 우리 가족은 2004년, 무언가에 이끌리듯 수도인 울란바토르로 상경했다.
이사 뒤 병색이 짙어진 남편은 결국 저세상으로 떠났다. 절망의 늪에 빠졌지만, 딸을 생각하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하지만 평생을 농사짓고 가축을 치며 살아온 터라 기술이나 경력이 없어 공장 취업이 되지 않았다. 험한 공사장 일에는 여자를 써주지 않았다. 닥치는 대로 일을 구하고, 하루하루 근근이 생계를 이어갔다.
2010년 1월, 우리 동네에 새로운 회사가 들어선다며 지원해보라고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아무런 재주도 없었지만 마지막 희망이라 생각하며 이력서를 냈다. 그렇게 ‘굿셰어링’(Good Sharing)을 만났다. 굿셰어링은 한국의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 ‘굿네이버스’가 적정기술을 활용해 몽골 빈곤 주민의 일자리를 창출하려고 설립한 사회적 기업이다. 가진 것도 없고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교육하고 일하도록 했다. 굿셰어링이 만드는 축열난방기 ‘지세이버’(G-saver)는 한국이 개발한 첫 적정기술 제품으로 형편이 어려운 유목민들에게 보급되고 있다.
지세이버는 몽골의 게르에서 사용하는 화로의 열이 오랫동안 유지되도록 해주는 축열기인데 나도 그 수혜자다. 예전에는 화롯불이 자주 꺼져 밤이면 불을 확인하느라 잠을 설쳤는데, 지세이버를 설치한 뒤에는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게 됐다. 또 연료가 비싼 탓에 화로를 오래 때지 못해 잔병으로 고생하는 일이 많았는데, 지세이버 덕분에 집이 한결 따뜻해져 감기도 없어졌다. 한 달 생활비의 절반을 차지하던 연료비가 3분의 1로 줄어 딸에게 책을 사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해줄 수 있게 됐다. 나뿐만 아니라 내 이웃들도 지세이버 때문에 살림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
<hr>한 달 생활비의 절반을 차지하던 연료비가 3분의 1로 줄어 딸에게 책을 사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해줄 수 있게 됐다. 나뿐만 아니라 내 이웃들도 지세이버 때문에 살림이 눈에 띄게 나아졌다.<hr>생애 첫 프레젠테이션을 해낸 뒤게다가 나는 지세이버를 제조하는 굿셰어링에 다니며 안정적인 소득도 얻고 있다. 가축밖에 모르던 사람이라, 처음에는 나사를 조이는 단순한 작업도 버거웠다. 하지만 한 단계 한 단계 교육을 받았더니 납땜을 하거나 부품을 조립하는 정교한 일까지도 해낼 수 있게 됐다. 6개월 뒤 보조매니저로 승진했고 행정 업무도 배워 이제는 공장 매니저가 됐다. 컴퓨터로 현황 보고서도 쓰고 공장부자재 비교 견적도 직접 내며 생산에 필요한 매뉴얼도 만든다.
최근 본사에서 방문왔을 때 나는 생애 첫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그날의 감격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다. 컴퓨터도 켤 줄 모르던 내가 성실히 일해 이뤄낸 성과였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열심히 노력해 회사에, 또 몽골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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