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리카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에서 북서쪽으로 20km 떨어진 소도시 우티루로 가는 길. 한국처럼 순환도로가 있다면 10여 분 만에 도착할 곳을 한 시간가량 흙먼지를 날리며 달려갔다. 자동차에서 내려 또 마을 길을 걸어 들어가자 39살의 농부, 에드워드 킹앙주이가 긴장한 표정으로 서 있다. 나이로비는 적도 바로 밑에 있어 7월이 겨울인데다 해발 1600여m의 고산지대라 산들바람은 늦가을처럼 서늘했다. 하지만 그는 식은땀을 훔쳤다. 케일과 시금치, 호박, 양배추 등을 심은 밭을 지나 낡은 펌프 앞에 그는 멈춰섰다. “내 삶을 바꾼, 그래서 내 삶의 일부가 된 친구입니다.” 적정기술 사회적 기업인 ‘킥스타트’에서 농부가 발로 밟아서 농작물에 용수를 공급할 수 있도록 만든 ‘슈퍼 머니메이커’(Super MoneyMaker·이하 머니메이커)였다. 이 제품은 66만여 명을 빈곤에서 구해낸 영웅이다.
66만여 명을 빈곤에서 구해낸 영웅
적정기술(Appropriate Technology)이란 저개발국·저소득층의 삶을 향상하려고 고안된 기술로, 현지 상황에 적합하게 설계된 과학기술을 말한다. 예컨대 전기나 부품이 없는 아프리카 마을에 지하수를 끌어올 수 있는 수백달러짜리 전기펌프를 달아주기보다는, 물 50ℓ를 아이들도 운반할 수 있도록 도넛처럼 가운데 구멍이 있는 원통형 용기(큐드럼)를 개발해 효과적으로 보급하는 방식이다.
적정기술이 대중에게 처음 알려진 계기는 경제학자 E. F. 슈마허가 를 1973년 발간하면서부터다. 슈마허는 거대경제·거대기업·거대기술보다는, 작은 경제에서 그에 적합한 기술로 지역경제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작은 것이 좀더 인간친화적이라는 이유에서다. 특히 적정기술의 연원을 마하트마 간디의 물레까지 끌어올렸다. 인도의 목화를 수입해 옷을 만든 뒤 인도인에게 비싸게 되팔던 영국에 맞서 물레로 옷을 짓도록 한 간디의 기술은 말 그대로 적합한 기술이라는 것이다.
이후 정신과 의사 출신인 폴 폴락이 1981년에 적정기술의 선구자로 등장했다. “우리는 개발에 접근하는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며 국제 구호 개발의 대안적 모델로 시장 기반적 접근을 제시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수혜받는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고객으로 봐야 한다.” 22년간의 의사 생활을 접고 폴락은 모아둔 돈으로 국제개발사업(IDE)이라는 비영리기업을 꾸렸다. 활동 목표는 일회적인 구호활동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적정기술을 제공해 판매함으로써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저개발국에 사는 100여 가구를 매년 방문해 현재까지 3000가구 이상을 만났다. 그리고 지역 경제를 활성화해 방글라데시 등 가난한 나라 199만 명의 빈곤문제를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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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락이 IDE를 설립한 지 10년이 지난 1991년, 미국 스탠포드대학에서 기계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마셜 피셔는 영국인 사회적 기업가 닉 문과 함께 킥스타트를 케냐에 세웠다. 하루에 2달러도 벌지 못하는 전세계 26억 명, 하루 10달러 미만으로 사는 50억 명에게 과학기술 제품을 누릴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과학기술자들은 상위 10%의 부자를 위해서만 일해왔다. 소외된 90%의 소비자가 빈곤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을 살도록 적정한 제품과 아이디어를 개발해야 한다.” 폴락이 말한 고객과, 피셔가 말한 기회는 일맥상통한다.
7년 전 킹앙주이가 바로 기회를 원하는 고객이었다. 우티루에서 태어나 자란 그는 할아버지, 아버지한테서 5에이커(약 2만㎡)의 고산지대 땅을 물려받았다. 1년 내내 덥지도 춥지도 않아 농사짓기 좋고, 땅 옆으로는 개울이 사계절 흘렀다. 문제는 언덕배기 땅까지 물을 끌어올려 농작물을 재배하느냐였다. 그는 아버지에게 배운 대로 양동이로 개울물을 퍼다가 밭에 뿌렸다. 1시간만 해도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팠고 일은 더디기만 했다. 부부가 꼬박 일해야 농작물을 1.5에이커 정도 땅에서 수확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도로는 내다 팔 농작물이 거의 얻을 수 없었다. 현금이 돌지 않으니 땅이 남아도 일꾼을 고용할 길이 막혔다.
같은 페달펌프, 무상 배포 vs 시장 판매
어느 날 킹앙주이의 한 친구가 킥스타트의 페달펌프를 샀다고 자랑했다. 사람의 힘으로만 지하 7m의 물을 지상 14m까지 올릴 수 있고, 옆으로는 200m를 이동해 2에이커에 해당하는 땅에 하루면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제품이었다. 가격은 95달러 남짓으로 싸지 않았지만 킹앙주이는 투자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전기시설이 없어 전동펌프는 사용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 페달펌프가 유일한 선택지였다. 몇 년간 모은 돈을 다 털어서 킹앙주이는 머니메이커를 구입했다.
머니메이커는 킥스타트가 처음 개발한 적정기술 제품이다. 케냐 사람의 70%가 농민이고 90%가 전기시설이 없다는 사실을 발견한 과학기술자 피셔가 농업 생산성을 높이려고 관개시설 개발이 필요하다고 봤다. 당시 국제구호개발 비정부기구(NGO)와 달리, 킥스타트는 개발된 제품을 빈곤층에게 무료로 배포하지 않고 팔기로 했다. 페달펌프를 65달러에 생산한 킥스타트가 7달러 이윤을 남기고 유통업자에게 넘기면 95달러 정도에 소비자가 구입하게 된다.
적정기술 제품을 판매하는 이유를 킥스타트의 샤를렌 첸 제품 매니저가 이렇게 밝혔다. “수년간 케냐에서 비정부기구에서 일해온 피셔와 문은 구호개발의 실패 경험을 통해 원조로는 빈곤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원조는 지역경제 기반과 기업가정신을 훼손하고 현지인이 스스로 일어설 기회를 빼앗는다. 구호단체가 떠난 뒤에는 시설이든, 제품이든 내버려져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수 없다. 공짜로 받은 것은 산 것만큼 가치 있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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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아프리카 동남부의 모잠비크 정부가 수천 개의 유사 페달펌프를 농민들에게 무상으로 배포했는데, 결국 실패로 끝났다. 제품의 질과 유지, 보수 등과 같은 지속 가능성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인의식이 없어 고장이 나도 고치지 않았다. 킥스타트가 비교해보니, 무상으로 나눠줄 때보다 제품을 파는 경우에 일자리가 3배 많이 생겨났다. 적정기술 제품으로 소비자의 삶이 향상되고, 제품을 제작·판매·유통하는 과정에서 일자리를 창출해 소득이 증대되는 효과를 낳기 때문이다.
킹앙주이도 머니메이커를 구입한 뒤 일꾼을 4명이나 고용했다. 관개작업이 수월해져 상속받은 5에어커 땅을 전부 일구었다. 커피, 바나나, 토마토, 케일 등 다양한 농작물을 재배하고 1년 내내 농사를 지으니 일손이 많이 필요했다. 펌프 구입비는 6개월 만에 회수됐고 연간 수익은 5배 이상 늘었다. “건기 때는 채소값이 3배, 5배로 뛰어올라 큰 이윤이 남는다. 예전에 양동이로 농사 지을 때는 짜증만 났는데, 이제는 일하는 게 즐겁고 보람을 느낀다. 내 성공을 보고 이웃 서너 명도 머니메이커를 샀다.”
살림이 넉넉해지자 킹앙주이는 3년 전에 막내딸을 낳았고 올해 18살이 된 아들은 사립대학을 보냈다. 10살인 둘째 딸은 초등학교를 다닌다. “사회적 기업이 뭔지 잘 모르지만 킥스타트는 분명히 특이하다. 구입한 지 7년이 지났지만 펌프를 제대로 사용하는지 계속 점검하고 관리 방법을 교육한다. 나 같은 평범한 케냐 사람의 생활이 나아지는 데 깊은 관심을 보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회적 기업가가 실패했던 것킥스타트는 적정기술 제품이 고객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정밀하게 조사하고 분석한다. 제품만족도를 물을 뿐 아니라 집중 모니터 대상을 1300명 선정해 월 수입과 연 수입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소비지출구조나 권익신장 등 삶에는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추적해나간다. 미셔는 “사회적 기업가가 실패하는 부분이 바로 결과를 측정하는 부분이다. 모니터링은 우리가 세운 목표를 얼마나 이뤘는지 알게 하고, 제품을 개선하고, 마케팅을 확장하는 데도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2012년 6월1일 현재까지 추적해보니, 킥스타트는 케냐와 탄자니아, 말라위에서 펌프를 20만5200대 팔았다. 매달 많게는 1500대, 적게는 500대씩 판매한 셈이다. 그 과정에서 1만3000건의 일자리가 창출됐고, 연간 1억1300만 달러의 수익이 추가로 생겼다. 그리고 66만7000명이 빈곤에서 벗어났다고 회사는 분석했다.
길거리 생활을 하던 다니엘 은젠가와 난시 가토니 부부가 그런 경우다. 2008년 8월 케냐의 대통령 선거로 촉발된 폭동 탓에 은젠가 부부는 집과 농장을 모두 잃었다. 5개월간 텐트를 치고 다섯 명의 아이들과 난민처럼 살던 가족은 우연히 킥스타트의 머니메이커 광고를 라디오에서 들었다. “이웃 농가에서 관개작업 시범도 보았는데 농장을 다시 일으킬 구세주구나 싶었다.” 은젠가는 정부가 지급한 위로금(130달러)의 일부를 떼어 머니메이커 힙 펌프를 구입했다. 힙 펌프는 머니메이커와 원리는 같지만 크기가 작고 값이 35달러 이하로 저렴하다. 1.25에이커의 면적에 물을 댈 수 있는데 손으로 작동해 사용하기 수월하다. 은젠가는 좁은 땅에서 농작물 재배를 시작했지만 다른 농부가 손을 놓고 있는 건기에 채소를 재배한 덕에 비싼 값에 내다 팔았다. 앞으로 농지를 확장해 토마토와 양배추를 키우고 젖소도 구입할 작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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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이야기만 있는 게 아니다. 한국의 적정기술 제품이 아프리카 소년의 미래도 바꾸어놓았다. 국제구호개발 NGO 굿네이버스는 아프리카 최빈국 말라위에 사는 12살 소년의 삶을 어루만졌다. 수도 링콜퀘에서 40km 떨어진 빈농 마을 치오자 지역에서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미야미코 치르와는 어린 나이에 동생을 돌보는 가장이 됐다. 무섭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서 소년은 이웃 집 당나귀를 돌보며 하루 일당 800원을 받았다. 배고픈 동생들을 한 끼라도 먹이려면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 지역의 주민 75%는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한다. 학교 가는 건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소년은 동생들이 배불리 먹게 되는 날을 간절히 소원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굿네이버스 적정기술세터가 버섯재배사업을 펼친 덕분이다. 한국의 버섯전문가가 파견돼 말라위에 적합한 적정기술을 개발했고, 지난해 11월부터 50여 개 농가에서 버섯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치르와도 이모와 함께 버섯 재배 사업에 참여해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동생들의 끼니 걱정 없이 소년은 학교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다.
“기술자, 비영리기관, 기업이 머리 맞대야”
‘적정기술의 선구자’ 로 불리는 폴락은 지난 5월 방한해 “빈곤 지역 사람들이 한국을 보고 배우며 빈곤 탈출의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국제구호활동보다는 시장 접근적 방식을 중심으로 한국이 50년 만에 다른 나라를 도울 수 있는 수준의 경제력을 이룩한 대목을 염두에 둔 지적이다. 이성범 굿네이버스 적정기술센터장도 폴락의 의견에 동의했다. “적정기술 사회적 기업은 한국이 이끌어갈 수 있는 국제구호개발의 새로운 모델이다. ‘현지인을 위한’ ‘현지인에 의한’ ‘현지인의’ 적정기술 제품을 개발해 가난한 사람의 구매력을 자극할 만큼 싸게 판매하는 게 핵심이다. 과학기술자와 비영리 기관, 한국 기업이 머리를 맞대면 가능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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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티루(케냐)=글·사진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참고문헌
적정기술미래포럼
나눔과기술
에딧더월드ㆍ한밭대학교 적정기술연구소
폴 폴락
E. F. 슈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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