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년간 반도체·액정표시장치(LCD)를 비롯한 전자산업 공장에서 일한 뒤 백혈병 등 암을 앓고 있다고 상담해온 사례가 80건이다. 발암성 물질인 벤젠에 노출된 것으로 의심된다. 이들은 주로 의류나 신발 공장에서 일하다 전자산업 공장으로 일터를 옮긴 젊은 노동자들이다.’
반도체를 위한 먼지 없는 방
한국 이야기가 아니다. 최근 중국의 정보기술(IT) 산업의 요람으로 부상한 중국 광둥성 둥관시 이야기다. 지난 6월18일부터 사흘간 경기도 수원시에 위치한 천주교 수원대리구청에서 열린 ‘전자산업 노동권과 환경정의를 위한 국제회의’에 참석한 중국 둥관 지역 시민단체 활동가가 산업의학전문의 공유정옥씨에게 들려준 말이다. 이 중국 활동가는 그냥 지나칠 수 없을 정도로 전자산업의 피해 사례가 늘어나자 사정이 비슷한 한국 사례를 배우고 연대하려고 회의에 참석했다. 컴퓨터와 휴대전화를 인류에게 선물한 전자산업의 급격한 성장 뒤에는 전세계 노동자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비극의 그늘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첨단기술이 사용되는 전자산업은 깨끗하고 안전한 청정산업인 양 포장된다. 우주복처럼 생긴 새하얀 방진복을 입은 반도체 노동자들은 오염물질을 제어하는 공간인 ‘클린룸’에서 일한다. 그러나 클린룸이나 방진복은 반도체 칩의 안전을 위한 장치다. 사람을 위한 게 아니다. 각 업체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 정보는 ‘업무상 기밀’인데다, 기술은 하루가 다르게 바뀐다. 이런 상황은 산업과 질병 간의 연관성을 규명하기 어렵게 한다. ‘국가를 먹여살리는 산업에 타격을 줘서야 되겠느냐’는 인식을 지닌 각국 정부도 전자산업의 유해성 검증에 소극적이다.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주 샌타클라라 카운티에는 인텔·AMD 등 실리콘(Si)을 소재로 쓰는 반도체 칩 생산 업체들이 몰려들었다. 이 지역이 ‘실리콘밸리’라고 불린 건 그때부터였다. 1980년대 초반 IBM과 페어차일드반도체 공장의 지하 저장탱크에서 유출된 유독 화학물질이 지하수를 오염시킨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계기로 1982년 샌타클라라 지역의 주민·노동자·환경운동가 등을 중심으로 ‘실리콘밸리독성물질방지연합’(SVTC)이 설립됐다. 이들은 잠재적 독성물질에 대해 ‘알 권리’를 주장해 제조시설에서 배출하는 화학물질 정보를 공개하도록 하는 조례와 미 연방 법 제정을 이끌었다. 1990년대에 들어서자 실리콘밸리 업체들은 생산비용 절감을 위해 국경을 넘기 시작했다. 수천 가지 화학물질도 함께 수출됐다. 전자산업 문제는 이제 한 국가 차원에서는 온전히 해결되기 어렵다. 생산-소비-폐기가 국제적으로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비용 절감하려 국경 넘는 기업, 화학물질도 수출
이번 국제회의에 참여한 10개국 36개 단체 활동가들은 비슷한 경험을 나누며 유대감을 확인했다. 10년 전 창설된 전자산업 유해성 공동 대응을 위한 국제 네트워크인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위한 국제운동’(ICRT) 코디네이터 테드 스미스는 “전자업계는 가장 비밀이 많은 산업”이라며 “미국에서도 법 제정을 통해 어떤 화학물질을 사용하는지 공개하라고 압박하고 있지만 제대로 시행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스미스는 노동자들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기업이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화학물질의 모니터링 결과 및 어떤 작업을 하는지 등을 공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사회운동으로 발전시켜 정보 공개를 압박해야 한다. 비영리 및 연기금 펀드 등 전세계의 기관 투자자가 움직일 수도 있다. 미국에선 종교계 투자자가 매우 중요한데, 아직은 미미하지만 이런 투자자들이 기업을 압박할 것으로 본다.”
회의 마지막 날인 지난 6월20일, 10개국 활동가들은 서울 서초동 삼성전자 본사 앞을 찾아 “더 이상 노동자를 죽이지 말라”고 외쳤다. 이들은 앞으로 애플사 제품을 생산하는 대만계 전자기업 폭스콘의 중국 공장 노동자들이 잇따라 자살한 사건을 공론화했듯이, 삼성전자 문제를 국제적으로 공론화하는데 힘을 쏟을 예정이라고 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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