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원 민주통합당 원내대표(비상대책위원장)는 1942년생이다. 만 70살, 한국 나이로 세면 일흔하고도 한 살이다. 아무리 60이 청춘인 시대라고 하지만 좀 많다. 그런데도 웬만한 젊은 의원들보다 정열적이다. 젊은 시절 미국에서 사업을 일굴 때 체득한 치열함이 그의 뼈에 각인돼 있다. 그리고 김대중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에게 판을 크게 보는 안목과 역사의식을 배웠다.
<font color="#1153A4"> “도대체 올해 선거를 몇 번 하냐”</font>
박지원 원내대표는 애초 원내대표보다는 당 대표 출마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박영선 의원에게 원내대표 출마를 권유했다. 그러나 박영선 의원은 출마하지 않았다. 원내대표 후보 등록을 하루 앞둔 4월25일, 그는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다급한 전화 연락을 받았다. 두 사람의 사이는 평소 별로 좋지 않은 편이다. 전격 회동이 이뤄졌고 ‘이해찬 당 대표-박지원 원내대표’ 연대가 이뤄졌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는 무슨 생각을 한 것일까? 이해찬 전 총리와 주변 인사들은 4·11 국회의원 선거 공천 과정을 거치며 ‘호남’을 확실히 배려해야 한다는 공감대를 갖고 있었다. 정권 교체를 위해서는 이른바 친노무현 세력과 호남이 더 이상 맞서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원내대표 후보로 처음엔 호남 출신인 이낙연·우윤근 의원 등을 모색했다. 득표력을 계산해보니 여의치가 않았다. 누군가 “아예 박지원을 원내대표로 밀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귀가 쫑긋 섰다.
“정권 교체를 위해서라면….”
그러나 ‘이해찬-박지원 연대’는 곧바로 역풍을 맞았다. 유권자인 19대 국회의원 당선인들, 그리고 국민의 의사를 묻거나 설득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고 졸속으로 진행해 구태의연한 정치적 담합으로 비친 탓이다. 그렇지만 박지원 원내대표는 노련한 정치인이었다. ‘절차’와 ‘예의’에 문제가 있었다고 당선인들에게 깨끗이 사과했다. 그리고 18대 국회에서 가장 뛰어난 원내대표였다는 평판이 퍼지며 판세가 다시 서서히 뒤집혔다.
경선 날 아침 평소 말이 별로 없는 그의 부인이 넥타이를 매주며 딱 한마디를 했다.
“당신 올해 선거를 도대체 몇 번 하는 거냐.”
그랬다. 본인이 직접 출마해서 치른 선거가 벌써 세 번째였다. 1월15일 전당대회에 출마해 4등을 차지해 최고위원이 됐다. 그리고 4·11 국회의원 선거를 치러 당선됐다. 이날 또 원내대표 선거를 치른 것이다.
민주당 당선인은 모두 127명. 64표를 얻으면 1차 투표에서 당선될 수 있었다. 그의 조직참모인 박양수 전 의원은 여러 차례의 점검 끝에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어떤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판세를 물었다.
“이해찬-박지원 담합 역풍 때문에 1차 투표에서는 강한 경고를 보내고, 2차 투표에서 당선되지 않겠습니까.”
실망스런 대답이었다. 내심 1차 투표에서 결판을 낸다고 생각하고 오전 10시 원내대표 선출 의원총회에 참석했다. 네 사람의 후보가 10분씩 연설을 했다. 박지원 원내대표의 연설은 이런 내용이었다.
“정치인은 복싱 선수와 같다. 때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맞을 때도 잘 맞아야 한다. 절차적 하자를 거듭 사과한다. 문재인 당선자와 원탁회의 원로들이 오해를 받도록 한 것도 나의 잘못이다. 그러나 정권 교체는 지상 최대의 과제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이런 얘기를 했다. 치열한 경선으로 우리 당 후보를 먼저 키운 뒤에 그래도 안철수 교수보다 지지율이 낮으면 정권 교체를 위해 안철수 교수를 모셔오도록 노력하자고 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color="#C21A8D">한 당선인은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대여 투쟁을 해야 하니까 전투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당 대표가 되면 ‘담합’을 추인하는 게 되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이해찬 불가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설명이다.</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font color="#1153A4"> “엄중 경고 의미 담은 황금분할”</font>
이날 경선에는 이례적으로 민주당 당선인 127명 전원이 참여했다. 광주에서 출발한 박혜자 당선인은 비행기를 놓치자 ‘총알택시’와 오토바이를 바꿔 타는 곡예 끝에 겨우 투표에 참여할 수 있었다. 1차 투표 결과는 유인태 35표, 전병헌 28표, 이낙연 14표, 박지원 49표, 무효 1표였다. 박지원 원내대표와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표정이 굳어졌다. 곧바로 결선투표가 진행됐다. 문희상 선거관리위원장이 “유인태 60인, 박지원 67인”이라고 발표하자 회의장에 탄성이 터졌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당선 인사에서 “엄중 경고의 의미를 담은 황금분할이 이뤄졌다”며 “독주하지 말고 의견을 수렴해 일하라는 국민의 명령으로 받아들이겠다”고 말했다. 또 “한국노총의 조직력, 시민사회의 도덕성, 노무현 세력의 도전의식, 김대중 세력의 노련함을 통합해 반드시 정권 교체를 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당선인들에 대한 잔소리를 덧붙였다.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학교는 가야 한다. 간곡히 부탁하는데 국회 본회의, 상임위원회 의석을 지켜달라. 우리는 소수당인데 자리를 안 지키면 새누리당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나.”
몇몇 당선인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원내대표 선출이 끝난 뒤 최고위원회의가 열렸고 당 지도부의 모든 권한을 비상대책위원회에 위임한다는 의결이 이뤄졌다. 그리고 비대위 구성은 위원장에게 일임하기로 했다.
박지원 원내대표 당선 이후 민주당의 앞날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6월9일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될 수 있을까? 이해찬 전 국무총리의 측근 인사는 “어차피 인물 경쟁이 될 것”이라며 “이해찬을 빼고 누가 대선 체제의 당을 제대로 이끌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대안 부재라는 것이다.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당 대표를 놓고 겨룰 수 있는 사람은 현재로선 김한길·우상호 당선인 정도다.
그러나 당내에선 전혀 다른 기류도 형성되고 있다. 한 당선인은 “원내대표는 국회에서 대여 투쟁을 해야 하니까 전투력을 고려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당 대표가 되면 ‘담합’을 추인하는 게 되는데 그게 가능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이해찬 불가론이 확산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font color="#1153A4"> 카운터파트너 운이 계속될까</font>
이런 마당에 박지원 원내대표 당선과 당내 대선 후보 경쟁 구도를 연결짓기는 더욱 힘들다. 다만 이번 원내대표 선출 과정에서 정권 교체를 위한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영입론이 사실상 추인된 만큼 민주당은 안 원장과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려 애쓸 것으로 예상된다.
박지원 원내대표의 재등장으로 12월 대선을 앞둔 정국, 특히 국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관심이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언론사 파업, 민간인 사찰, 대통령 측근 비리, 노사 문제에 대한 국정조사와 청문회를 약속했다. 국회는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누가 되느냐도 중요하다. 남경필·이주영 의원 등이 거론되고 있다. 박지원 원내대표는 18대 국회에서 카운터파트너를 잘 만났다. 김무성-박지원 조합은 협력과 투쟁을 조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박지원 원내대표에게 이번에도 그런 행운이 따를 수 있을까? 아닐 것 같다.
성한용 선임기자 한겨레 정치부 shy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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