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은 한사코 인터뷰를 마다했다. 원내 진입에 성공한 최초의 진보정당인 민주노동당 창당의 주역이자 진보정당 운동의 상징이지만 현재의 통합진보당 내에서는 비주류인 권영길·강기갑 의원의 이야기다. 당의 비례대표 경선 과정에서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부정이 이뤄졌다는 사실이 낱낱이 드러났다. 있을 수 없는, 있어선 안 될 일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 진보의 갈길 > 특집좌담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권영길’ 명함
권영길 의원은 민주노동당 초대 당 대표를, 강기갑 의원은 분당 이후 대표를 지냈다. 사태의 직접적인 책임을 두 사람에게 묻기는 어렵지만,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다. 그래서일까. 일생을 ‘노동자·농민의 정치세력화’를 위해 싸워온 두 사람은 자칫 자신들의 삶이 통째로 부정될지도 모르는 이번 사태와 관련해 차라리 입을 닫고 싶어 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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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2일 18대 국회의 마지막 본회의가 열렸다. 권영길·강기갑 의원에게도 각별한 날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의 행보는 쓸쓸했다. 권 의원은 이미 “광야로 돌아가겠다”고 선언한 상태다. 권 의원 쪽은 “사실상의 정계 은퇴로 받아들여도 좋다”고 했다. 18대 총선에서 정권의 실세 이방호 전 의원을 꺾은 파란의 주인공 강기갑 의원은 이번 총선에서는 고배를 마셨다.
권영길 의원은 이날 국회 본회의 직후 지역구가 있는 경남 창원으로 떠났다. 의원회관 사무실을 떠나는 권 의원에게 통합진보당의 상황에 대한 의견을 물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는 “내가 뭐라고 이야기할 사안이 아니다”라고만 했다. 그러면서 거듭 “미안하다”고 말했다.
권 의원은 애초에 통합진보당 창당에 반대해왔다. “진보당은 민주노총의, 노동자들의 배타적 지지를 얻는 정당이어야 한다”는 소신 때문이었다. ‘노동’이 사라진 것은 ‘통합진보당’이라는 당명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19대 국회에서 노동문제를 담당하는 환경노동위원회에 상임위 배정을 1순위로 신청한 통합진보당 당선인은 단 한 명도 없다. 권 의원은 진보 대통합과 당의 쇄신을 위해 이번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지만 그의 지역구인 창원에선 새누리당 후보가 당선됐다. 진보정당 후보들 간에 단일화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창원과 마찬가지로 ‘노동자의 도시’인 울산에서도 통합진보당을 비롯한 야권 후보들은 전멸했다.
그는 여전히 ‘민주노동당 국회의원 권영길’이라는 문구가 담긴 명함을 사용하고 있었다. 권 의원은 이번 총선 직후 이뤄진 언론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이 노동자를 배신했다”며 “이는 특정 정파의 패권주의가 만들어낸 과욕의 결과”라고 당권파의 뿌리 깊은 전횡을 비판했다. 의원실 관계자에 따르면, 권 의원은 지인들에게 “저건(통합진보당은) 내 당이 아니다”라는 심경을 토로하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고 한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권 의원이 직접적인 언급을 거부한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는 현재 통합진보당 소속 국회의원이지만 당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 당의 회의에도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당에 대한 애정이 더는 남아 있지 않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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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신 권 의원은 더 넓은 의미에서 진보정치의 실험을 이어간다는 방침이다. 그가 제시한 세 가지 화두는 평등, 평화, 통일이다. 권 의원 쪽 관계자는 “이런 가치를 받아안을 수 있는 가칭 ‘평등·평화·통일재단’ 설립에 당분간 매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강기갑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강기갑
강기갑 의원 쪽에도 정식 인터뷰를 요청했다. 하지만 강기갑 의원실은 난감해했다. 의원실 관계자는 “며칠만 더 기다려주면 안 되겠느냐”고 했다. 강 의원은 같은 날 본회의 직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린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에 참석했다. 역시 ‘아스팔트의 강기갑’이었다. 그를 알아보는 시민들이 앞다퉈 악수를 청했다. “수고하셨다”는 인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강 의원의 표정은 시종일관 어두웠다. 4년 만에 또다시 촛불을 들어야 하는 상황, 야권의 뼈아픈 패배로 귀결된 이번 총선 결과에 대한 상념 등 여러 감정이 뒤섞여 있는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이승만 정권의 3·15 부정선거에 비견될 법한 진보정당 사상 초유의 사태가 정치권을 강타하고 있다. 그는 옆자리에 앉은 민주통합당 정동영 상임고문과 이따금 귀엣말을 나눌 때를 제외하면 허탈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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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 사회자가 강 의원을 단상으로 불러올렸다. 수천명의 시민은 한복을 입은 강 의원의 등장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강 의원은 “이번 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재벌 종자가 아니라 노동자·농민 종자를 국회에 보내서 민주공화국·서민공화국을 만들라는 게 국민의 염원이었다”며 “하지만 우리 정치권이 잘 못해서 선거 농사가 실패했고 흉작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한 사람의 정치인인 나도 성적표가 아주 나빴다. 촛불시민들 앞에 ‘죄송합니다’라는 인사를 올리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90도로 허리를 숙였다. 자신의 총선 패배에 대한 사과였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어떤 행위로 읽혔다. 발언을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온 강 의원을 어렵게 만났다. 강 의원은 “현재 원내대표이긴 하지만 이번 사태에 대해서 나는 잘 모른다”며 “이야기하기 어려운 측면을 이해해달라”고 했다.
“과감하게 대국민 고해성사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그는 “대단히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하고, 당 대표단도 심각하게 고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후 어떤 조처를 취하고 국민 앞에 어떤 사죄의 행보를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원론적인 견해를 밝혔다. 당내 특정 세력의 전횡이 이번 사태의 원인이 아니냐는 지적에 대해선 “그런 문제제기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수긍했다. 그러면서 강 의원은 “이럴 때일수록 당이 성찰하고 변화해야 한다”며 “좀더 과감하게 대국민 고해성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사태의 봉합과 책임 떠넘기기에 급급한 당권파에 대한 경고의 목소리였다. 진보정치 원로로서의 심경을 물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강 의원은 “아이고…, 참담하지요”라고만 답하며 고개를 떨궜다.
송호균 기자 uknow@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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