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대통령 이정희.” 이정희 통합진보당 공동대표가 서울 관악을 총선 후보에서 사퇴한 3월23일 오후 트위터에는 이런 내용의 글이 폭주했다. 이 대표의 ‘결단’에 가슴 아파하며 정당 투표에서 통합진보당을 전폭적으로 지지하자는 글도 잇따랐다. 좌초 위기에 빠진 야권 연대도 ‘정상화’ 수순에 들어갔다. 민주통합당 후보로 나선 김희철 의원과의 단일화 경선에서 이 대표 쪽의 여론조사 조작 파문이 불거진 지 사흘 만의 일이다.
‘눈물’과 ‘실신’으로 상징되는 헌신성
이 대표의 후보 사퇴는 급작스러웠다. 사건이 불거진 뒤 민주당과 시민사회 세력은 물론 통합진보당 공동대표단 일부도 그에게 후보 사퇴를 압박했다. 이 대표는 “사퇴가 가장 편한 길이다. 그러나 야권 연대가 완성되고 승리하도록 헌신해 용서를 구하겠다”며 출마 강행 의지로 맞섰다. 트위터상에서도 “이정희는 우리가 비를 맞을 때 같이 맞았고, 서민이 권력에 의해 압박받는 현장에 가장 먼저 달려갔다. 김희철 같은 인간 100명 준다고 이정희 하나와 안 바꾼다”(@doomehs)며 이 대표를 지지하는 의견이 우세했다.
여기서 잠시, 이 대표가 여론 조작 파문에 연루됐는데도 ‘여론주도층’인 누리꾼 등의 ‘엄호’를 받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웬만한 국회의원이라면 이런 문제가 불거질 경우 비판 여론에 휩싸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이 대표는 그렇지 않았다. 인터넷에선 그에겐 ‘까방권’(비판을 받지 않는다는 뜻의 인터넷 용어·‘까임방지권’의 줄임말)이 있다는 글이 나돌았다. YTN이 3월20~21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도 통합진보당 지지율은 열흘 전(5.8%)보다 두 배 가까이 오른 10.9%로 솟구쳤다.
이런 힘은 일차적으로 이 대표가 서울 용산 참사 현장, 쌍용자동차 노조 파업,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제주 강정마을까지 사회적 약자들이 아파하는 현장을 누볐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과 언론 악법 등 여당이 ‘날치기’로 법안을 통과시킬 때마다 온몸을 던져 막으려 애썼고, 울부짖다 실신한 적도 여러 차례다. 그래서 그에겐 ‘진심의 정치’란 상찬이 따른다.
사실 진보 정치인이라면 대부분 이 대표 못지않게 서민이 고통받는 현장을 지킨다. 그런데도 이 대표만큼 대중적인 관심과 애정을 받는 이는 드물다. ‘운동판’ 출신의 거친 투쟁 이미지를 가진 다른 진보 정치인과 달리, 친근하고 따뜻한 진보의 이미지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인권변호사 출신의 젊은 여성 정치인이라는 조건에 ‘눈물’과 ‘실신’으로 상징되는 이 대표 특유의 헌신성이 더해져, 그는 지지층의 이성뿐만 아니라 감성에도 또렷한 인상을 새겼다. 바로 이 점이 이 대표의 또 다른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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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보 사퇴 반대한 경기동부연합?
이런 힘을 바탕으로 이 대표는 지난 4년 동안 정치적인 중량감을 급속도로 키웠다. 2007년 대선 참패와 분당 사태로 ‘너덜너덜해진’ 민주노동당의 비례대표에서 원내대표로, 그리고 당 대표로 우뚝 섰다. 그러곤 국민참여당·통합연대(진보신당 탈당파)와 통합을 성사시켰다. 민주당과의 야권 연대까지 이끌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그는 자신과 통합진보당을 1997년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의 전신)의 창당 이래 가장 대중적인 진보정치인과 진보정당으로 자리매김했다. 진보정치의 거목 권영길 의원도,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2008년 총선 낙선 이후 생긴 말) 스타’ 노회찬·심상정 전 의원도 해내지 못한 일이었다. 한귀영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 연구위원은 “이 대표는 짧은 시간 동안 현실정치와 진보정치를 아우르는 역량을 보여주며 정치적으로 엄청나게 성장했다”고 평가했다.
그런데도 그는 왜 갑자기 총선 출마를 포기한 것일까? 이 대표는 후보 사퇴 기자회견에서 “많은 분들이 긴 시간 애써 만들어온 통합과 연대의 길이 저로 인해 혼란에 빠졌다. 진보의 도덕성을 땅에 떨어뜨린 책임도 당연히 저의 것”이라며 “어렵게 이루어진 야권 연대가 승리하도록, 반드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도록 가장 낮고 힘든 자리에서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출마와 불출마의 이유가 모두 ‘야권 연대’다.
이 대표는 이틀 전인 3월21일 밤 시민사회의 원로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를 만난 데 이어, 이튿날 밤엔 한명숙 민주당 대표, 문재인 민주당 상임고문을 만나 ‘결단’을 권유받았다. 3월23일 새벽 4시까지 계속된 통합진보당 대표단 회의에서도 그의 사퇴를 요구하는 이가 많았다. 이 대표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날 오후 2시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후보 등록을 하겠다는 일정까지 공개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의 출마 강행이 야권 연대를 뒤흔들 수 있다는 걱정 때문에 속내는 복잡했던 것 같다. 통합진보당 안에선 그가 의혹이 불거지자마자 불출마 의견을 피력했지만, 출마해야 한다는 당권파의 반발을 우려해 시간을 끌었다는 말도 나온다.
공교롭게도 3월23일치 는 이 대표가 후보 사퇴를 하지 않는 이유가 ‘경기동부연합’ 때문이라는 보도를 일제히 쏟아냈다. 경기동부연합은 통합진보당의 최대 정파로, 당권파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겉보기에 통합진보당은 민주노동당과 국민참여당, 통합연대가 합쳐진 ‘한 지붕 세 가족’처럼 보이지만, 실제 정파는 좀더 복잡하게 갈라진다. 옛 민주노동당이 크게 경기동부연합, 인천연합, 울산연합이라는 세 정파로 나뉘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민중운동진영의 통일전선체인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의 지역 조직들 가운데 자주파(NL) 계열로, 활동 근거 지역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간판 스타’의 필요성 메워준 이정희
경기동부연합이 이정희 대표 버티기의 ‘보이지 않는 손’으로 지목된 것은 이들이 이 대표를 비례대표로 ‘발탁’하고, 당 대표로 만든 핵심이기 때문이다. “이정희는 경기동부의 객원 보컬”이라는 통합진보당 내부의 이야기는, 이 대표와 경기동부연합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대표가 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시기도 비례대표 후보로 추천된 2008년일 만큼 양쪽이 오래전부터 밀접한 사이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경기동부연합이 이 대표와 손잡은 것은 ‘인물’이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게 통합진보당 안팎의 정설이다.
연원은 평등파(PD)가 중심이 돼 만든 민주노동당에 자주파가 입당하기 시작한 200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들은 전국연합의 조직적인 입당 결정 등을 통해 민주노동당 내 정파 분포를 6 대 4로 역전시켰다. 당내 주요 문제를 진성당원의 직접투표로 결정하는 민주노동당의 특성과 맞물려 자주파는 빠르게 당을 장악했다. 특히 수적으로 우세한 경기동부연합이 주요 당직을 차지했다. ‘존재감 없는’ 소수 정당 시절엔 문제가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그런데 2004년 총선에서 당선된 국회의원 10명 가운데 스포트라이트는 양대 정파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자임한 권영길 의원과 평등파의 노회찬·심상정 의원에게만 집중됐다. 2007년 대선을 앞두고 자주파의 고민이 깊어졌다. 평등파에선 노·심 의원이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기로 했다. 자주파에선 독자적으로 내세울 만한 대중적인 인물이 없었다. 권영길 의원을 지지하는 게 차선책이었다.
결과는 참담했다. 권 의원의 대선 득표율은 3%에 그쳤다. 참패의 책임 소재를 놓고 분란이 일었다. 평등파는 자주파, 특히 경기동부의 패권주의를 문제 삼아 탈당해 진보신당을 만들었다. 남은 민주노동당은 상처가 난 당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새로운 ‘간판 스타’가 될 인물이 절실했다. 이정희 대표는 바로 그 공백을 메워주었다. 지난해 통합 과정에서 이 대표가 공개적으로는 진보신당에 통합을 제안하면서도, 물밑으로 끊임없이 국민참여당과 접촉해 의문과 비판을 동시에 샀던 건, 상대적으로 지지도가 높은 유시민 공동대표와 손잡고 싶어 한 경기동부연합 때문이었다는 말이 나돌았다. 이번 관악을 경선에서도 가장 적극적으로 이 대표를 지원한 것은 경기동부연합을 중심으로 한 당권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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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동부연합의 공개적 호명이 주는 의미
이렇게 보면, 여론조사 조작 논란이 불거지자마자 이 대표가 후보 사퇴를 생각했다는 뒷말이나, 3월22일 인터넷 팟캐스트 에서 울먹이며 “정치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드리는 것이 내 책임이다. 하지만 꼭 내가 정치를 바꿔야 하는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인지 고민 중”이라고 했던 말이 이해된다. 이 대표는 사퇴의 뜻이 있었는데, 경기동부연합이 후보 사퇴를 만류한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통합진보당의 한 인사는 “경기동부는 이정희 대표를 잃으면 2007년 경선 때와 똑같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파 후보가 없어서 권 의원을 지지했던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으려고 지난 4년 동안 열심히 이 대표를 키운 것 아니냐”고 말했다. 경기동부연합의 조직력과 이 대표의 ‘개인기’로 어렵게 만든 대중정치인을, 재선을 코앞에 두고 스스로 물러나게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이 대표가 대외적으로는 출마할 뜻을 꺾지 않을 듯한 태도를 보이며 내부적으로 경기동부연합을 설득했는지, 반대로 경기동부연합이 ‘조직의 결정’으로 이 대표를 주저앉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이 대표의 사퇴가 경기동부연합에 크게 ‘손해 나는 장사’는 아니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우선 이 대표의 ‘대타’로 관악을 후보로 내세운 이상규 후보가 경기동부연합이다. 김희철 의원이 무소속으로 출마하지만, 경선 불복으로 크게 상처를 입은데다 이 대표 사퇴가 ‘야권 연대를 위한 희생’으로 비쳐져 해볼 만한 싸움이 된 것이다. 이미 경기동부연합은 경기 성남중원 등의 지역구를 민주당에서 양보받아 자파 후보를 야권 단일후보로 냈고, 당선 가능성이 높은 비례대표 후보 상위 순번도 독식하다시피 했다.
이번 사태를 조금 다른 관점으로 바라볼 필요도 있다. 바로 ‘경기동부연합’이라는, 일반 시민들에게는 매우 생소한 정파가 공개적으로 호명됐다는 사실이다. 수구 언론이 진보 정치세력 전체를 부도덕한 집단으로 낙인찍으려는 의도를 깔고 일제히 경기동부를 ‘아우팅’(outing·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외부에 존재가 드러나는 것)시켰다는 비판과는 별개로, 이는 통합진보당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운동권 언저리에서나 아는 정파의 이름을, 새누리당의 이명박계·박근혜계나 민주당의 친노·486처럼 대중이 알게 된 것이다. 이는 통합진보당이 더는 ‘운동권 정당’이나 소수 정당이 아니라, 대중정당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뜻이다.
“민주주의 기본도 못 지킨다”는 내부 비판
문제는 경기동부연합을 포함한 당권파가 이를 어떻게 감당할 것이냐다. 진중권 동양대 교수가 3월22일 CBS 라디오 에서 여론조사 조작 사건과 관련해 한 이야기다. “(분당 전) 민주노동당 시절에도 비슷한 일들이 계속 있었다. 그때는 소수정당 내부의 문화라서 공론화가 안 되고 정파 다툼으로 치부됐다. 그런데 이번엔 상대가 민주당이다 보니 널리 알려진 것일 뿐이다. 그 사람들은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이고, 그분들의 도덕성은 새누리당 의원들과 거의 구별되지 않는다.” 당권파를 겨냥한 비판이다. 진 교수뿐만 아니라 옛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통합진보당 사정에 밝은 이들은 “당권 투쟁에서 이기려고 본인 확인이 안 되는 당원을 무더기로 가입시키거나 위장전입시키는 일쯤은 아무렇지 않게 저지른 경기동부연합 아니냐. 이번 일은 ‘골방’에 있던 경기동부연합이 세상 바뀐 줄 모르고 나왔다가 적응을 못한 것일 뿐”이라며 냉소적으로 반응한다.
당권파의 역량 부족은 통합진보당 전체의 ‘문화 지체’로 이어진다. 당원 온라인 투표와 현장 투표로 진행된 비례대표 후보 선출 과정이 상징적이다. 국민참여당 출신 노항래 후보는 온라인·현장 투표를 합쳐 남성 부문 2위를 차지해 비례대표 후보 8번을 받기로 했다가 10위로 내려앉았다. 당 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인 명부보다 투표 수가 더 많은 투표소 7곳의 투표 결과를 선거 규칙에 따라 무효로 처리했는데, 25표 차로 남성 부문 3위로 집계된 민주노총 출신 이영희 후보가 거세게 항의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후보가 8번을 차지했다. 그 밖에도 명부상 이름과 투표자의 이름이 불일치한 경우, 대리투표 의혹, 온라인·현장 이중 투표 의혹 등이 불거져 비례대표 후보 확정 결과는 투표한 지 사흘이 지난 3월21일에야 발표할 수 있었다. 별도로 진행한 청년비례대표 후보 선출 과정에선 당권파 쪽 온라인 투표 관리자가 투표 결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소스파일을 변경한 사실도 드러났다. 노항래 후보는 당 홈페이지에 “통합진보당의 첫 당원투표에서 저는 ‘현장’이라는 구실 속에서 이뤄지는 적지 않은 부정행위를 보았다. 이런저런 ‘당 운영상의 편의’를 말하나 이것은 용납되지 않아야 할 범죄행위다. 민주주의의 기본도 지키지 못하는 우리의 나상을 스스로 돌아보아야 한다”고 적었다.
더욱 충격적인 건 성추행 전력이 드러난 경기동부 윤원석 후보를 당 대표단이 경기 성남중원 후보로 인준한 것이다. 당권파의 입김으로 비례대표 후보 4번을 받은 정진후 후보도 성폭력 사건 처리에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비판을 샀다. 논란이 불거지자 뒤늦게 윤 후보는 사퇴했지만, 정 후보와 관련해선 당에서 별다른 조처를 하지 않았다. 이런 추문과 의혹이 불거졌는데도 대표단 차원에서 ‘정리’를 못한 건 통합진보당이 공동대표 누구의 리더십도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라는 걸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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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희 대표부터 치유의 칼 들어야
역설적으로, ‘이정희 사태’로 드러난 통합진보당 내부의 패권주의와 상식에 부합하지 않는 행태는, 통합진보당이 더욱 대중적인 제도권 정당으로 안착하는 밑거름이 될 수도 있다. 외부의 관심과 비판을 통해 이 곪은 부분을 치유할 수 있다면 말이다. 치유의 칼은 당권파에 둘러싸인 이정희 대표부터 들어야 한다. 통합진보당은 ‘이정희의 미래’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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