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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에 밀린 시대의 담론

등록 2000-08-23 00:00 수정 2020-05-02 04:21

사회의 흐름 보여주는 현대 논쟁사… 정부 정책 논쟁엔 독재의 그림자 있어

논쟁은 시대상을 반영한다. 우리 사회도 그동안 시대적 관심과 이해를 반영하는 수많은 논쟁을 거치며 흘러왔다. 50년대에는 소설 파동, ‘한글 간소화 파동’, ‘비구-대처승 파동’ 등이, 60년대에는 한일회담 반대 파동, 문학계의 순수-참여 논쟁, 고속도로와 지역발전 불균형 논쟁 등이 벌어졌다. 70년대 이후에는 청년문화론, 고교평준화 논쟁, 민중사학 논쟁, 87년 대통령 선거 당시의 비판적지지·후보단일화·독자후보론 논쟁, 학생운동 내부의 민족해방-제헌의회 논쟁, 교원노조파동, 노동자 정치참여 논쟁, 박정희 신드롬 논쟁 등이 모두 해당시기의 사회상을 비추며 이어졌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지금으로선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 시대적 특수한 상황요인들이 작용하고 있다.

우리 현대 논쟁사를 관통하는 분명한 양상은 정부 시책에 대한 논쟁에서 정부가 밀린 적은 거의 전무하다는 점이다. 민간쪽에서 아무리 반대가 심하고 문제점을 지적해도 정부의 시책들은 거의 대부분 정부가 애초 마음을 굳힌 대로 결판나버렸다. 특히 군사독재 시절에는 정부가 다양한 탄압책을 동원해 논쟁을 봉쇄하거나 학계가 제공하는 방어논리로 시민들의 주장을 막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다양한 탄압책으로 논쟁을 아예 막기도

60년대 가장 커다란 사회적 논란이었던 64∼65년의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파동은 국교정상화를 하려는 정부에 맞서 거의 온 국민들이 반대했던 논쟁이었다. 광복 이후 국교가 단절됐던 일본과 관계를 개선해 5억달러의 경제원조를 받는 대신 일제식민지 시절의 피해를 거론하지 않고 넘어가려는 굴욕적인 내용 때문에 박정희 군사정권이 처음으로 대대적인 시민들의 저항에 부딪친 사건이기도 했다.

당시 한일회담 반대 대학생 시위대에서 주도적 역할을 했던 현승일 한나라당 의원은 “당시는 전체 학력 인구의 8%만이 대학생이던 시절이어서 대학생들의 사회적 선도욕구와 책임의식이 지금보다는 훨씬 강했던 시절이었다”며 “그런 상황 속에서 대학생들이 여론을 주도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박정희 정권이 대학생들을 정보부의 프락치로 포섭해 학생운동을 방해하면서 정부편을 들도록 유도하는 조직을 대학에 만들었다가 적발된 적도 있었다”고 회고했다.

이견이 많았지만 유신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해 시행한 고교평준화정책도 정부의 뜻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진행된 대표적인 논쟁이었다. 74년 시행된 고교무시험전형제도는 유신정권의 엄혹한 획일화 정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제대로 논쟁이 벌어지지 못하고 정부의 안이 시행됐다. 당시 교육학자로 논쟁에 참여했던 연세대 김인회 교수는 “당시는 학계의 주류가 정부의 획일적 정책을 받쳐주던 상황이었다”고 당시 정황을 설명했다.

또한 막 유신을 단행한 박정희 정권이 강력하게 추진한 국사교과서 국정화 작업도 국사학계가 강력하게 반대했지만 논쟁적 사안들이 전혀 고려되지 못하고 74년 강행됐다. 이 작업은 박정희 대통령 개인의 의지에 따른 것으로서 국사학계나 문교부의 안이 아니라 대통령 지시로 시작됐다. 물론 긍정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역사교육에서 세계사가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부정적 측면도 있었다.

반면 50년대초 이승만 정권당시 한글간소화 파동은 특이한 논쟁이었다. 한글간소화안은 옛 맞춤법으로 돌아가자는 이승만 대통령 본인의 의견에서 나왔다. 가령 ‘높이’라는 표기를 발음 그대로 ‘노피’라고 쓰자는 것이었다. 이 논쟁은 어떤 사안에 대한 전문가들의 논쟁이 아니라 논쟁 당사자의 한 축이 대통령이었다는 점이 특징이었다. 오랜 미국생활로 1933년 제정된 한글맞춤법에 의한 새 표기법이 불편했던 이승만 대통령은 구한말 당시 쓰던 옛표기를 선호했고 이런 자신의 기호를 직접 정책에 반영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이 논쟁은 학계·교육계·언론계 전체와 권력이 힘을 겨루는 양상으로 진행됐다.

그러나 국가원수 개인을 위한 듯한 어처구니없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었던 만큼 전문가들 사이에 이 의견이 말도 안된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그래도 정권은 이를 고집했지만 최현배 문교부 편수국장이 사임하는 등 정권 최고위층을 뺀 사회 각계가 거세게 반발해 결국 한글 간소화 추진은 취소됐다. 이 논쟁은 이승만 대통령이 집권기간 동안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지 못했던 극히 이례적인 사건이었다.

특히 재미있는 점은 이 논쟁에서 패배한 이승만 대통령이 그 이후에도 표기법이 읽기 불편하다며 신문을 멀리하다가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결국 하야하는 불행한 말년을 자초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있게 제기되기도 했다.

한국 논쟁사의 이면에는 또한 냉전, 반공의 논리가 작용한 경우도 많았다. 50년대 논쟁은 흔들리는 윤리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지만 시작은 매카시즘적 수사를 동원한 비판에서 출발했다. 54년 한 신문에 연재된 대중소설 에 대해 서울대 법대의 황산덕 교수는 작가 정비석씨가 “스탈린의 흉내를 낸다”며 “중공군 50만명에 해당하는 조국의 적”이라고 공격했고, 그 뒤 은 유례가 없었던 논쟁에 휩싸였다.

마녀사냥… 냉전의 산물 수두룩

한국 논쟁사상 가장 비학문적이고 낭비적인 논쟁으로 손꼽히는 사학계의 ‘가짜 김일성 논쟁’도 냉전논리에 이용된 대표적 논쟁이다. 김일성 주석이 만주지역에서 항일운동을 했던 김일성 장군의 이름을 사칭했다는 가짜 김일성론은 90년대 초반까지 반공교육의 중요한 소재로 쓰였다. 냉전논리 아래에서 적국 수반의 도덕성을 폄하하기에 가장 적합한 선전도구였기 때문이었다. 북한연구 1세대인 고 이명영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집대성한 이 가짜설은 학문적으로는 잘못이었다는 판명이 내려졌지만 아직도 국민정서상으로는 버젓이 존재하고 있을 정도다.

김일성 가짜설이 수명을 다한 것은 80년대 후반. 해빙무드와 함께 옛 소련, 중국의 사료들을 접하기 쉬워지면서 실증적 논거들이 소개됐고, 민주화 열기와 함께 진행된 북한바로알기 운동이 벌어지면서 북한 연구가 진척된 것이 계기였다. 일본학자 와다 하루키가 일제 관헌 자료와 중국 자료들을 통해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을 규명했고 이재화, 이종석, 신주백씨 등의 국내 학자들이 김일성 연구에 나서 항일무장투쟁을 실증적으로 입증했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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