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전국 대학교수들이 뽑은 ‘올해의 사자성어’는 ‘장두노미’(藏頭露尾)였다. 머리는 숨겼지만 꼬리는 숨기지 못했다는 얘기인데, 진실은 감춰도 언젠가는 드러난다는 뜻이다. 그해 불거진 국무총리실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지원관실)의 민간인 불법사찰이 딱 그 모양새였다.
파일 제목이 증언하는 사찰 정황
검찰이 뒤늦게 지원관실에 대한 압수수색에 나섰을 때 사무실 캐비닛과 책상 서랍들은 썰렁하게 비어 있었다. 그런데도 지원관실 직원이 뒤늦게 자료 하나를 몰래 감추다가 압수수색팀에 걸렸다. 책상 유리판 아래 깔려 있던 ‘2008년도 공공기관’ 일람표였다. 시장형 공기업 6곳, 준시장형 공기업 18곳, 기금관리형 14곳, 위탁집행형 63곳, 기타 공공기관 204곳이 빼곡하게 정리돼 있었다. 민간인 사찰 피해자인 김종익씨가 몸담았던 국민은행, 그가 퇴직 뒤 운영했던 KB한마음의 이름은 일람표 어디에도 없었다. ‘국민은행이 공기업인 줄 알았다’는 얄팍한 거짓말을 감추려 했지만 증거는 도처에 흩어져 있었다. 지원관실 직원들은 사무실 컴퓨터들을 아예 경기도 수원에 있는 업체로 들고 가 디가우징(강력한 자성으로 파일을 영구삭제)을 해버렸다. 늑장 압수수색으로 증거인멸 시간을 벌어준 검찰은 뒤늦게 파일을 복구하겠다고 나섰다.
이 당시 검찰 수사팀 의뢰를 받아 서울중앙지검 디지털포렌식센터에서 작성한 지원관실 하드디스크 분석보고서를 입수해 살펴본 결과, 김종익씨와 남경필 새누리당(당시 한나라당) 의원 등 이미 알려진 불법사찰 사실 말고도 또 다른 사찰 정황을 여럿 발견했다. 파일 제목만 남아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지원관실 임무 범위를 한참 벗어난 ‘전횡’이 더 있었음을 시사한다.
ㅇ씨의 외부망 컴퓨터 하드디스크 복구 자료를 보면, ‘자료’라는 이름의 폴더에 ‘좌파 관련’이라는 하위 폴더가 있다. 여기에는 ‘진보연대’ ‘체계도’라는 제목의 한글파일 흔적이 남아 있었다. 진보연대 파일은 대표적 진보 시민단체인 진보연대에 관한 것으로 보이며, 체계도 파일은 ‘좌파’ 관련 단체들의 조직도를 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파일이 작성된 시기는 2009년 2월이었다. 당시는 용산 철거민 참사가 벌어진 직후였다. 경찰의 무리한 진압작전을 두고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시민사회단체의 비판이 거세지던 시점이었다. 정권에 큰 부담을 주는 상황에 대처하려고 지원관실이 자신들의 임무와 전혀 관계없는 좌파 관련 체계도까지 작성하고, 관련 시민사회단체를 전방위로 살핀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ㄱ씨의 내부망 컴퓨터에서도 30개의 파일을 확인할 수 있었는데, 대부분이 용산 참사와 관련한 것이었다. 또 다른 ㄱ씨의 외부망 컴퓨터에서도 ‘용산’이라는 폴더에서 ‘전철련 농성 피해 상황’이라는 제목의 파일 흔적이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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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관실이 청와대와 직결되는 정치·사회 현안에 대한 여론 동향을 탐지한 정황은 더 있다. 또 다른 ㄱ씨의 외부망 컴퓨터에서는 ‘이건희 특별사면 관련 여론 동향’ 파일이 발견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년 12월, 배임과 조세포탈죄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벌금 1100억원이 법원에서 확정된 지 넉 달 만에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사면했다. 경제인 1명만을 대상으로 한 사면은 헌정 사상 처음이었고, 국경일이나 기념일이 아닌 연말 사면도 전례가 없었다. 주요 시민사회단체로부터 ‘법치주의를 무너뜨린 사면’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이와 관련한 여론의 추이를 지원관실에서 탐문한 게 아니냐는 의구심을 낳게 한다. △공직자 사기진작 지원 △공직자 고충처리 지원 △우수 공무원 발굴 △공직사회 기강 확립 △부조리 취약분야 점검과 제도개선 △공직윤리 지원과 관련한 국무총리 지시사항 처리라는, 법에서 규정한 지원관실 업무와는 전혀 맥이 닿지 않는다.
ㄱ씨의 내부망 컴퓨터에서는 2009년 12월에 작성된 ‘kbs 최근 동향보고’라는 파일이 확인된다. kbs는 한국방송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9년 11~12월은 한국방송 이사회가 이명박 대통령의 선거특보 출신인 김인규씨를 차기 사장으로 임명 제청해 정권과 시민사회의 갈등이 커지던 시점이었다. 한국방송 노동조합은 ‘김인규 사장 반대 총파업 찬반투표’를 했지만 부결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국방송이 공영방송이기를 포기했다’는 비판이 일자 한국방송의 일부 기자와 PD 등이 노조 집단 탈퇴와 함께 새 노조를 설립하려는 시점이었다.
ㄱ씨의 외부망 컴퓨터에서는 ‘작가 명단’이라는 폴더에 딸린 ‘작가 조사 결과’라는 폴더가 확인된다. 이 폴더에서는 ‘작가협회 수지결산서 2008’ ‘검사 결과’라는 제목의 파일들이 복구됐다. 정확하게 어느 작가협회를 지목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2008년도 공공기관’ 일람표에는 작가협회나 비슷한 이름의 단체, 유관 단체는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지원관실의 월권이 의심된다. 이명박 정부 첫해이자 지원관실이 만들어진 2008년은 한국작가회의 등 문인들이 이명박 정부의 대운하사업 추진에 강력하게 반발하던 시기였다. 용산 참사, 이건희 회장 사면, 한국방송 사장 임명 등은 모두 청와대와 직결되거나 청와대가 결정한 사안들이다. 지원관실의 임무가 어떤 쪽에 무게가 실렸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박찬숙’ 파일은 무엇을 위해서?
지원관실은 남경필 새누리당 의원의 부인을 사찰한 사실이 수사 과정에서 밝혀진 바 있는데, 정치인 관련 사찰 사실도 추가로 드러났다. ㄱ씨의 외부망 컴퓨터 ‘총리실’ 폴더에는 ‘하명사건’이라는 하위 폴더가 딸려 있다. 국무총리실에서 하명한 사건을 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박찬숙(국회의원)’ 파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파일이 작성된 시기는 2008년 9월이다. 17대 국회 한나라당 비례대표였던 박 전 의원은 2008년 4월 치러진 18대 총선에서 수원 영통에 출마했다가 낙선한 사실상의 ‘민간인’ 신분이었다. 정확하게 어떤 맥락에서 사찰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역·비현역을 가리지 않고 정치권 인사들을 사찰했음을 방증한다. 이 컴퓨터에는 같은 시기에 남경필 의원 내사보고 파일도 여러 건 등장한다.
지원관실은 민간인 사찰 의혹이 불거지자 해명용 대응 문건을 작성했었다. 김종익씨 불법사찰에 대한 이들의 인식 수준을 보면, 여타 사찰 정황들이 어떤 맥락에서 진행됐을지 짐작할 수 있다. “외형상 민간인 불법사찰로 몰아가고 있으나, 실체는 현 정부를 무력화시키려는 좌파 진보세력의 조직적 공세의 일환.”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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