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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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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자 가족도 피해자다

엄마 품에 안겨야 겨우 잠드는 딸을 돌보느라 우울증에 걸린 어머니, 해체된 가족들…
보상금 날리고 경제적 자립마저 어려운 이들은 “치료라도 받게 해주면 좋겠다” 호소
등록 2012-03-02 19:42 수정 2020-05-03 04:26

딸 둘, 아들 하나. 없이 살아도 부러울 것 없는 행복한 가족이었다. 2003년 2월18일 이후 모든 것이 변했다. 의젓해 큰딸 같던 막내딸은 30살이 다 되도록 엄마 없이 잠들지 못하는 어린애가 됐다. 무뚝뚝하게만 살아온 아버지는 묵묵히 함께 밤을 지새우며 옆을 지켰다. 백아무개(58)씨의 까맣게 탄 속은 이제 10년의 나이테를 둘렀다.

지금도 괴롭히는 그 날의 버려진 기억

“얼마나 더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기약이라도 있어야 버틸 텐데.”
처음에는 살아 돌아온 딸이 고맙기만 했다. 석 달 동안 병원을 벗어나지 못했지만 가족은 똘똘 뭉쳐서 막내를 일으켜세울 고민만 했다. 문제는 살림살이였다. 변변치 못한 살림에 딸의 요양을 책임질 여유는 없었다. 섬유업을 하던 백씨는 업계가 사양길로 접어들어 수입이 줄어만 갔다. 아내는 궂은일로 집안을 건사하는 데 돈을 보탰지만 치료비를 벌기도 버거웠다. 그사이 딸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가족 중에서도 유난히 밝아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이 맞나 싶을 정도였던 딸이었다.
밤이 되면 아이처럼 엄마 품에 안겨야 겨우 잠이 들었다. 호흡기를 다쳐 3개월여 만에 퇴원을 했지만 낮에는 괜찮다가도 밤만 되면 발작을 했다. 엄마가 없으면 발작은 잦아들지 않았다. 어둠은 딸의 몸을 잠식해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딸은 기함했다.
“버리지 말아달라고 그러더라고. 버리지 말아달라고.”
9년 전 그날, 딸은 간호사의 꿈을 품고 학교로 향하는 전철을 탔다. 딸은 걷다 주저앉고 다시 걷고를 반복하다가 그대로 쓰러져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불빛을 보고 온 힘을 다해 달려들었다. 짙은 연기를 마시며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필사적으로 외쳤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소방관이었다. 그런데 소방관은 그 손길을 뿌리쳤다. 이미 의식을 잃은 누군가를 업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돌아온(것으로 짐작되는) 소방관에게 구출됐지만 그 ‘뿌리쳐짐’의 기억은 오래갔다.
어두워지면 딸에게는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했다. 혼자서는 불안해서 견디지 못했다. 그래서 딸이 결혼한 2년 전까지 아내는 딸과 함께 밤을 지새웠다. 그 긴 밤 동안 아내도 잠을 자지 못했다. 불면의 신경증을 받아내느라 아내는 쇠약해졌다. 백씨도 잠이 들지 못해 쇠잔해졌다.
사고 뒤 딸은 간호사의 꿈을 이뤘다. 7년 전 그때만 해도 괜찮아질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들어간 병원에서 3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병원에서 비명 소리를 들은 다음날은 출근을 할 수 없었다. 중앙로역을 울리던 비명들이 되살아나 딸은 견디지 못했다. 출근을 못하는 날이면 가족들은 딸이 발작할까 무서워 곁을 지켜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딸은 연애결혼을 했다. 고등학교 때 동창이었다. ‘손주 녀석을 보면 좀 나아지겠지’ 했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딸은 아이를 몸에서 떼지 못한다. “아이가 다칠까 두려워서라고 하더라고.”
목욕할 때조차 아이가 눈에 보여야 한다. 자신의 손에서 떠난 아이는 반드시 친정어머니의 손에 있어야 한다.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물론 남편도 믿지 못한다.



사고 뒤 딸은 간호사의 꿈을 이뤘다. 7년 전 그때만 해도 괜찮아질까 하는 기대를 품었다. 하지만 들어간 병원에서 3개월을 버티지 못했다. 병원에서 비명 소리를 들은 다음날은 출근을 할 수 없었다. 중앙로역을 울리던 비명들이 되살아나 딸은 견디지 못했다. 출근을 못하는 날이면 가족들은 딸이 발작할까 무서워 곁을 지켜야 했다.

“인터뷰를 꺼리는 게 아니라 못한다”

“그 불안과 짜증을 마누라가 다 견디고 있어. 어떻겠어. 우울증이지 뭐. 나는 술로 풀고.”

대낮인데 낮술을 해서인지 그의 얼굴은 불콰하다. 9년 전 그 사건 이후 가족은 제대로 저녁 밥상 아래 모이지 못했다. 퇴근하면 아빠 품에 안겨 애교를 부리던 딸은 친정을 찾아도 인사를 하지 않는다. 아버지는 그냥 술잔만 기울인다. 7년여를 딸을 안아 재우던 아내는 요즘은 일터에서 곧바로 딸의 집으로 퇴근한다. 사람이 많은 장소에 가지 못하는 딸을 대신해 시장을 보고 살림을 거둔다. 우울증 약을 먹어야 하는 아내는 심해지는 당뇨병부터 다스려야 한다. 아내와 대화가 끊긴 지 오래다. 딸을 위해 사는 삶을 누가 탓할 수 없다. 이건 아니다 싶은 게 10년이 돼간다.

“뚱아! 이렇게 불렀다고. 우리 뚱아! 이렇게. 지금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나 싶어.”

부상자대책위로부터 가족과 부상자 구분 없이 건네받은 명단 100여 명에게 전화 통화를 시도하면서 부상자와 가족을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부상자 대부분은 유독가스로 성대를 다쳤다. 제대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경우는 100% 부상자였다. 부상자 가족인 경우 들려오는 목소리는 의기소침하거나 분노하거나, 극과 극이었다. 인터뷰 거절은 다반사였다. 본인만이 아니라 가족들도 거절하는 건 마찬가지였다. “지하철에 대해 정상적으로 얘기하기 힘들다”는 게 이유였다. 고통은 이미 전염돼 있었다. 9년이 흘렀지만 대부분의 부상자들은 어둠의 공포로 인해 불을 켠 채 잠을 청했고,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면은 가족들에게도 흔했다.

사회적 재난이었지만 고통은 분담되지 못했다. 부상자라는 사실조차 이웃은 물론 친척에게조차 알리지 못했다. “부상자라는 게 알려지면 영영 사회생활을 못할까봐”(이동우 대책위원장) 묵묵히 고통을 감내했다. “부상자라는 사실을 알면 허드렛일을 하는 직장뿐만 아니라 아르바이트에서도 쫓겨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ㅇ씨의 말은 부상자들 사이에 진리처럼 믿음을 지녔다. 결국 부상자의 신음을 받아내는 이는 가족뿐이었다.

“(부상자 본인이) 인터뷰를 꺼리는 정도가 아니라 본인하고는 인터뷰를 할 수 없어요.”

6번의 자살 시도를 지켜보는 동안 ㄱ씨의 어머니는 지쳤다. 아니 분노가 가슴에 가득했다. 10대였던 딸이 죽음과 대면하며 20대 중반이 되는 사이 가족은 풍비박산이 났다. 부모는 이혼을 했다. 형제는 친척집으로 흩어졌다. ㄱ씨가 발작을 시작하면 말릴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인 어머니만이 ㄱ씨를 지켰다.

“딸이니까 붙들고 살지. 시집이나 갈지 몰라.”

호흡기가 망가져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몸의 병은 둘째였다. 공황장애로 바깥출입을 하지 못했다. 우울증은 차도를 보이지 않았다. 전화 통화를 하던 어머니는 딸을 향한 원망을 토하듯 털어놨다.

“미안한지 요새는 본인이 스스로 동네 병원에서 약 타먹고 있어. 상담도 받아보고 했는데 잘 안 돼.”

» 대구지하철 참사 부상자들은 2006년 기금과 보상금을 일시불로 받는 데 찬성했다. 정신적·육체적 후유증이 10년 뒤에도 나타날 수 있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많은 부상자들이 당시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 대구지하철 참사 부상자들은 2006년 기금과 보상금을 일시불로 받는 데 찬성했다. 정신적·육체적 후유증이 10년 뒤에도 나타날 수 있음을 예측하지 못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많은 부상자들이 당시 결정을 후회하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부상자 70%, 사고 전보다 경제 어려워져”

흩어진 가족들은 안부를 알지 못할 정도다. 그보다 당장의 곤란한 살림살이가 더 심각하다. 어머니도 병이 들었다. 운신하기도 힘들어 돈 벌러 나가지 못한다. 정부보조금이 생계 수단의 전부다. 수십 년 만에 가장 추웠던 지난겨울 보일러도 켜지 못하고 전기장판에서 살았다. 자녀가 몇 명인지, 이혼한 게 언제인지 말하기를 거부했다.

“누구도 이 고통을 몰라. 가족이 아니면 어떻게 알아.”

ㄱ씨는 당장의 병원비를 걱정해야 하는 판국이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병원비를 버거워하는 이는 ㄱ씨만이 아니다. 이는 단순히 개인의 파산을 넘어 가족의 해체로 이어지고 있다. 집단적 상처를 감당하기에 대책위는 좁기만 하다. 통계로 잡힐 리 없다. 공적보호는 고사하고 지하철 부상자라는 게 병원 기록으로 남아 사보험 가입도 되지 않는다. 호흡기 장애로 출발한 병이 정신질환, 심장병 등 병을 더해가지만 모두 개인의 부담이다. 30대 후반의 ㅂ씨도 호흡기 장애를 앓다가 최근 당뇨병까지 겹쳤다. 가족이 얼마나 버텨줄지 자신이 없다.

“병원에서 검진만이라도 무료로 받게 해줬으면 좋겠어요. 부상자들이 진료라도 편하게 받을 수 있게 시설을 마련해주는 게 그리 어려운 얘기일까요.”

가족만으로 부상자를 지탱하기 힘든 순간이 오고 있다는 징후는 금세 찾을 수 있다. 이동우 부상자대책위원장은 “부상자 151명 가운데 70%가 사고 전보다 경제적으로 어려워졌다”고 밝혔다. 이 위원장도 부상자 가족이다. 사위는 호흡기를 크게 다쳤고, 직장을 그만둬야 했다. 초등학생·중학생 자녀를 건사하려고 남편을 대신해 위원장의 딸은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솔직히 억대의 보상을 받은 사람도 있거든. 당시 지하철 탄 사람이 서민들이었는데, 셋방살이하다가 큰돈이 들어오니까 대책 없이 돈을 제대로 간수하지 못한 거야. 사업을 해서 원금도 못 건지고 실패 본 사람이 절반 가까이 된다고. 부상당한 몸은 그대로고, 가족들은 더 힘들어지고.”(이 위원장)

주변 사람들은 속 모르고 “보상금 다 어디다 쓰고 엄살이냐”고 농을 던진다.

경제적인 문제는 부상자의 자립이 힘들다는 점에서 사정이 더 복잡해진다. 부상자 151명 중 60여 명이 9년 사이 취업연령기가 됐거나 지났지만 정규직으로 취업한 경우는 거의 없다. 이 위원장은 “사회적인 재난을 겪은 만큼 장애를 인정하고 그만큼 사회적 일자리를 보장해주면 어떻겠느냐는 생각을 한 지 오래됐다. 누구한테 말할 수도 없이 시간이 흘렀다”며 한숨을 쉬었다.

극심한 갈등 끝에 이르는 곳은

경제적 자립의 실패는 극단적인 갈등을 낳기도 한다. ㄱ씨는 4년제 대학을 졸업했지만 부상 후유증으로 취업을 하지 못했다. 공황장애로 공공장소에 가지 못하는데다 만성 호흡기 질환으로 체력이 하루 일을 버티기 힘들다. ㄱ씨의 아버지는 결국 “너 하나 믿고 일용직 일한 게 몇 년인데 돈 한 푼 벌어오지 못하느냐”고 타박하기 시작했다. 갈등은 깊어졌고, ㄱ씨는 나아지지 않았다. 아버지는 인터뷰 말미에 “ㄱ씨를 요양할 수 있는 먼 곳에 취업시켰다”고 설명했다. 요양과 취업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있기나 한 것일까. ㄱ씨가 간 곳은 정신병원 폐쇄병동이었다. ㄱ씨말고도 올 들어서만 2명이 정신병원 폐쇄병동으로 갔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부상자들이 그곳으로 갔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구=글 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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