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잘못된 협정을 못고칠 이유가 없다

‘폐기 조항’ 한-미 FTA 협정문 안에도 있어 근본 목적에 벗어난 협정 폐기 가능…독소조항 개정 요구, 협정에 반하는 조례 제정 등 불복종 운동 통해 폐기 나서야
등록 2011-11-30 14:15 수정 2020-05-03 04:26
» 지난 11월23일 밤 서울시청 옆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은 시위대가 “이명박 정권 퇴진”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 지난 11월23일 밤 서울시청 옆 국가인권위원회 앞에서 경찰의 물대포를 맞은 시위대가 “이명박 정권 퇴진”과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폐기”를 외치고 있다. 한겨레21 박승화

“양국의 오랜 그리고 강한 동반자 관계를 인정하고, 양국 간의 긴밀한 경제관계를 강화하기를 희망하며, 자유무역지대가 그들의 영역에서 확장되고 확고한 상품 및 서비스 시장을 창출하고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투자 환경을 창출하여 그들 기업의 세계시장에서 경쟁력을 증진할 것임을 확신하며, 양국 영역 간 무역 및 투자를 자유화하고 확대함으로써, 양국의 영역에서 생활수준을 제고하고, 경제성장과 안정을 증진하며, 새로운 고용기회를 창출하고, 일반적인 복지를 향상시키기를 희망하며, 양국의 무역 및 투자를 규율하는 명확하고 상호 유익한 규칙의 제정과 양국 영역 간 무역 및 투자에 대한 장벽의 축소 또는 철폐를 추구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정교한 폐기 요구안 필요

국회 의안번호 1812142.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 및 대한민국과 미합중국 간의 자유무역협정에 관한 서한교환 비준동의안’. 지난 11월22일 한나라당이 날치기 처리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은 날치기, 그러니까 이른바 ‘국회 의결’ 즉시 이명박 대통령에게 전달됐다. 대통령이 15일 안에 서명(비준)하게 되면, 한-미 양국은 FTA 이행 확인 서한을 교환하게 된다. 이 대통령이 비준을 거부할 가능성은 없다. 한-미 양국은 2012년 1월1일 발효를 잠정 목표로 하고 있다. 발효 이후의 한국은 어떨까. 예측 가능한 부분도, 가늠조차 되지 않는 부분도 있다. 분명한 것은 2012년 총선·대선 과정에서, 그리고 통상·공공 정책 등에서 갈등이 빚어질 때마다 한국 사회는 한-미 FTA 폐기 혹은 개정을 두고 극심한 내홍을 겪게 되리라는 점이다.

FTA를 반대하는 쪽에서는 폐기를 주장한다. 한-미 FTA는 말 그대로 협정이다. 국제관계에서 나라 사이의 협정은 이해관계의 무게중심이 변할 때마다 개정되기도, 그게 안 되면 깨지기도 한다. 한-미 FTA라고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경제관계 강화’ ‘경쟁력 증진’ ‘생활수준 제고’ ‘경제성장’ ‘고용기회 창출’ ‘복지 향상’이라는 협정의 ‘합의 정신’을 더 이상 찾을 수 없다면 협정은 부서지고 깨져야 한다.

한-미 FTA 협정문은 “협정 폐기가 가능하다”고 명문화해놓았다. 협정문 제24.5조(발효 및 종료) 제2항은 이렇다. “이 협정은 어느 한쪽 당사국이 다른 쪽 당사국에게 이 협정의 종료를 희망함을 서면으로 통보한 날부터 180일 후에 종료된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국제관계학)는 “다른 요건 없이 대통령이 미국 쪽에 폐기를 통보하면 180일 안에 협정은 종료된다”고 설명했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김행선 미국변호사는 “제24.5조 제3항에는 양국 사이의 협의가 일부 필요한 경우를 남겨놓았지만 협정 자체의 폐기와는 전혀 상관없는 조항”이라고 설명했다. 김 변호사는 “FTA가 발효된 뒤에는 ‘투자자-국가 소송제’(ISD)가 작동하기 때문에 최단시간 안에 FTA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미 FTA를 통째로 폐기하는 길은 열려 있지만 가기 쉬운 길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FTA를 지지하는 쪽과 반대하는 쪽이 격렬히 맞서는 한국 사회에서 총선을 통해 국회를 바꾸고, 대선을 통해 정권을 바꾸기만 하면 FTA를 폐기할 수 있다는 발상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이해영 교수는 “폐기로 곧바로 가는 것이 좋기는 하지만 한-미 관계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우리 사회 내부의 극심한 갈등이 예상된다”며 “폐기 조항을 지렛대 삼아 미국에 재협상을 요구하고, 이 과정에서 폐기로 가는 구체적인 명분을 쌓아가야 우리 사회의 내상을 줄일 수 있다”고 진단했다. ISD 등 독소조항 개정·폐기를 요구하고, 이에 동의하지 않을 미 의회의 이기적 반발을 차곡차곡 쌓아 FTA 전체 폐기를 요구하는 절차를 정교하게 짜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영 교수는 “일본도 개항 이후 불평등 조약을 고치는 데 30년이 걸렸다”는 비유를 들었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

<font color="#991900"><font size="3"> FTA 개정도 가능하다. 협정이 발효되면 한-미 정부는 협정문 제22.2조에 따라 “자유무역협정 개정을 검토하거나 협정상의 약속을 수정할 수 있는” 공동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돼 있다. 야권의 ISD 등 재협상 요구와 관련한 이 대통령의 ‘선 비준 후 재협상’ 제안도 공동위원회를 염두에 두고 나왔다. 하지만 공동위원회는 개정을 ‘검토’할 수 있을 뿐이다</font></font>
</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민주당은 헌법소원 준비

FTA 개정도 가능하다. 협정이 발효되면 한-미 정부는 협정문 제22.2조에 따라 “자유무역협정 개정을 검토하거나 협정상의 약속을 수정할 수 있는” 공동위원회를 구성하도록 돼 있다. 야권의 ISD 등 재협상 요구와 관련한 이 대통령의 ‘선 비준 후 재협상’ 제안도 공동위원회를 염두에 두고 나왔다. 하지만 공동위원회는 개정을 ‘검토’할 수 있을 뿐이다. 한-미가 ‘서비스·투자위원회’ 설치를 합의했다고 하지만, 공동위원회에서 협의를 한다고 해서 개정되는 것도 아니다. 미 행정부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만이고, 행정부를 통과해도 미 의회의 승인을 받아야 개정이 이뤄진다. 김행선 미국변호사는 “개정 권한은 미 행정부가 아닌 의회가 가지고 있다. 자신들에게 이렇게 유리한 협정도 미 의회는 몇 년간 반대를 해왔다. 그런 미 의회가 과연 자신들에게 불리한 개정을 받아줄지 의문”이라고 했다. 개정 요구는 ‘개량’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장 정책결정권 등 주권침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부분에 적극 대응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공동위원회가 이른바 ‘조선총독부’처럼 주권침해 통로 구실을 할 수도 있기 때문에 끊임없는 개정 요구 등을 통해 ‘견제’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통상법 전문가로 한-미 FTA를 추진 초기부터 감시해온 송기호 변호사는 “광범위한 ‘불복종운동’을 통해 FTA 폐기를 위한 국민의 지지와 인식을 획득해내야 한다”고 제안했다. 송 변호사가 말하는 불복종운동이란, 예를 들어 지방자치단체에서 골목상권과 재래시장 보호를 위한 조례를 제정하거나 학교급식에 우리 농산물을 우선적으로 사용하는 조례를 제정하는 방식으로, 이를 규제하려는 한-미 FTA를 무력화하자는 얘기다.

국내법적으로 한-미 FTA 비준동의안 날치기 처리를 되돌릴 가능성도 남아 있다. 민주당 등에서는 한-미 FTA가 헌법 제119조 제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 등을 위반했다며 헌법소원을 준비하고 있다. 헌법학계 관계자는 “해당 조항은 국민에게 직접 주어진 헌법상 권리라기보다는 국가에 대한 선언적·권고적 명령의 의미가 강하다. 그 규정에 따라 곧바로 위헌을 주장하기는 힘들 수 있다”고 설명했다.

헌재 전원일치 “의원 심의·표결권 침해”

헌법재판소 판례에는 헌법 제119조 제2항에 근거한 것들이 몇 건 있지만 모두 합헌 결정이 났다. 대신 헌법소원과 함께 국회의원의 권한침해를 주장하는 권한쟁의심판을 청구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11월22일 당시 국회 본회의 속기록을 보면, 정의화 국회 부의장은 이정희 민주노동당 대표 등의 토론 신청을 무시하고 날치기 표결을 진행했다. 헌법학계 관계자는 “헌재는 2009년 국회 언론관련법 강행 처리 사건 이후 반대토론 기회를 주지 않은 것은 권한침해에 해당한다는 판례를 이어왔다”고 설명했다. 지난 8월 헌재는 이정희 대표가 청구한 권한쟁의심판 청구 사건에서 “국회의장이 본회의에서 반대토론 신청을 묵살하고 표결을 진행한 것은 국회의원의 심의·표결권을 침해한 것”이라고 전원일치로 결정한 바 있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