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적과의 동침 12시간

시의회에서 자택까지 동선을 쫓아 밀착 취재한 박원순 시장의 하루…
딴지거는 언론과 길들여진 관료들 사이에서 이해갈등 조정해야 하는 2년8개월을 미리보다
등록 2011-11-16 15:26 수정 2020-05-03 04:26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11월10일 오전 11시 서울시청 별관에서 2012년 예산안을 설명하고 있다. 시장이 직접 기자들에게 예산안을 설명하는 일은 파격적이다.  <한겨레21> 김경호 기자

박원순 서울시장이 지난 11월10일 오전 11시 서울시청 별관에서 2012년 예산안을 설명하고 있다. 시장이 직접 기자들에게 예산안을 설명하는 일은 파격적이다. <한겨레21> 김경호 기자

“서민 부담을 최소화할 것이라면서 가계 부담이 약 8만원 늘지않았습니까.” 기자가 질문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직전인 10월25일 “북 ‘남 청년들이 앞장서라’ 선거선동 강화-박근혜 나경원 비방 공세” 기사를 보도한 이 신문은 박원순 시장의 복지 공약에 관심이 많다. 사설에서 박 시장의 서울시립대 등록금 공약에 대해 “서울시립대는 8343명인데다 지방 출신 학생이 60%가량 된다. 서울 시민의 세금으로 등록금을 일률적으로 지원해야 하는지도 논란거리”라고 비난하기도 했다.

거대 언론의 비우호적 질문

박 시장이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 낮고 느릿한, 경상도 말투다. “기본적으로 세금 부담은 늘리는 것보다는 줄이는 게 좋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세금을 효율적으로 사용해서 더 많은 혜택을 돌려주는가도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서울시청 서소문별관 2층 브리핑룸은 10여 대의 방송카메라로 빼곡하다. 종편인 채널에이 카메라도, 박 시장의 일거수일투족을 빼놓지 않는다.

선거 기간 중 “서울시장 선거전이 갈수록 의혹 제기의 진흙탕 싸움판으로 빠져들고 있다”(10월19일 )라고 보도한 문화방송이 질문을 이었다. “흡연구역 취소 등 시장이 시민운동가의 모습을 벗지 못했다는 지적이 있습니다. 정책이 즉흥적으로 나오는 것 같고, 복지에 올인하다 보면 다른 정책이 타격을 받지 않겠습니까.”

박 시장은 덤덤하게 답했다. “걱정 안 해도 좋습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합리성과 상식 원칙에 기초해 일을 하면 작은 시행착오는 있을 수 있지만 망칠 수는 없을 거라 생각합니다. (흡연구역 취소는) 의견도 많이 받고 메일도 많이 왔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실무부서와 충분히 상의했습니다.”

한국방송 기자가 손을 들었다. “현장 중심 행정을 강조하시는데, 그러다 보니 떼쓰기 민원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시장님 입장이 무엇입니까.” ‘떼쓰기’라는 단어 선택에도 박 시장의 목소리 데시벨은 변함이 없다.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과거 1970~80년대 소통이 전혀 없던 시대에는 민원도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 시대의 가장 큰 화두는 소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원칙이 없는 게 아닙니다. 폭력이나 무질서는 용납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11월10일 오전 11시부터 50분간 기자들의 질문이 계속됐다. 시장이 직접 예산 설명을 하는 것은 전례 없던 일이다. 박 시장의 답변은 성실했다. 동석한 서울시 간부가 질의응답을 끝낸다고 말했다. 박 시장은 추가 질문을 받겠다고 나섰다. 이날 프레젠테이션의 마지막은 캐리커처였다. 머리가 빠진 가상의 모습이 화면을 채웠다. 기자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박 시장 본인의 아이디어였다.

박원순 시장은 ‘기록 중독’으로 유명하다. 말과 글의 힘을 믿는 사람이다. “아직도 친일분자의 행적은 기삿거리가 된다. …그만큼 한 시대의 지도적 인물들에 대한 이성적 평가가 충분하게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다 보니 글이나 말로써가 아니라 거친 몸짓이나 국가 공권력의 발동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1995년 4월 기고) 말과 글로 타인과 소통할 수 있다고 믿는 그는 고전적인 합리주의자에 해당한다. 이날 기자회견에서도 ‘소통’을 강조했다. ‘상식과 원칙’이 담긴 말과 글로 소통하면 적대적인 보수언론, 한나라당, 관료조직을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25조원의 서울시 부채를 해결하는 일과 2014년까지 복지예산을 30%로 끌어올리는 두 개의 목표는 상충한다고 주장하는 반대 집단은 견고하다. 이들과 엉켜 말과 땀을 섞어야 하는 2011년 11월10일과 같은 긴장된 하루를 박 시장은 앞으로 2년8개월간 더 보내야 한다.



25조원의 서울시 부채를 해결하는 일과 2014년까지 복지예산을 30%로 끌어올리는 두 개의 목표는 상충한다고 주장하는 반대 집단은 견고하다. 이들과 엉켜 말과 땀을 섞어야 하는 2011년 11월10일과 같은 긴장된 하루를 박 시장은 앞으로 2년8개월간 더 보내야 한다.

“의로운 일하다 과로사 하기를”

당선 16일째인 이날, 박 시장은 평소보다 한두 시간 늦게 집을 나섰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때문이다. 그는 시민운동을 할 때부터 일벌레로 유명했다. 당선 이후 출근 시간은 아침 7시 안팎이다. 이날 고교생만 시험을 치른 건 아니다. 박원순 시장도 시험을 치렀다. 기자회견을 마친 오후 2시, 그는 서울시의회에 2012년 예산안을 제출했다. 전년 대비 13.3% 늘린 복지예산(5조1646억원)도 거기 포함됐다. 이날 재석의원 93명 중 19명의 시의원이 ‘서울특별시장 등 관계공무원 출석요구의 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7명이 기권했다. 현재 서울시의회에 민주당 소속이 77명, 한나라당은 27명이다. 민주당이 이대영 서울시교육청 부교육감의 출석을 거부한 것이 쟁점이 됐다. 교육과학기술부는 곽노현 교육감이 수감되자 권한대행으로 보수 관료인 이대영 부교육감을 임명했다. 학생인권조례 등 곽 교육감의 정책 추진이 주춤해졌다. 민주당은 권한대행의 시의회 출석을 거부했다. 한나라당은 출석시켜야 한다고 맞섰다. 토론과 반대토론이 박 시장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한나라당 의원들은 설득되지 않았다. 이명박 행정부도 쉬 설득당하지 않는다. 박원순 시장이 당선된 하루 뒤인 10월28일, 이명박 행정부는 부교육감을 전격 임명했다. 법률이 허락한 모든 권한을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예정보다 뒤늦은 오후 3시10분께 박 시장은 시정연설을 할 수 있었다. “(2012년 예산에서) 전시성 토건사업에 투자되었던 재원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재배분을 할 것입니다. 이렇게 확보된 재원은 시민의 복지·교육·주거·일자리·도시안전 등 시민의 삶을 보듬고 그 품격을 높이는 일에 투자할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들은 서울의 나침반을 사람 중심의 미래로 돌려놓을 것입니다.” 민주당 시의원도, 반대표를 던진 설득당하지 않는 19명의 한나라당 시의원도 연설을 들었다.

박 시장의 카니발 밴이 다산콜센터 정문에 도착한 시간은 오후 4시40분께였다. 시의회 일정이 예정보다 길어졌다. 시의회가 있는 광화문과 동대문구 신설동 사잇길은 이날 교통 정체가 심했다. 박 시장은 아이디어맨으로 유명하다. 아이디어는 메모에서 나온다. 그는 메모광이다. 아마 이날 이동하는 밴에서도 끊임없이 시정 관련 메모를 했을 게다. 그와 국외 출장을 함께 갔던 지인은 혀를 내둘렀다. “(박 시장은) 메모광이다. 해외 출장을 가면 반드시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기록한다. 그래서 출장 한번 갔다오면 책이 한 권 나온다는 거 아닌가. 대단한 사람이다.” 박 시장은 해외 출장 때 술도 입에 대지 않는다고 지인은 전했다. “내가 가장 열망하는 죽음의 형태가 바로 의로운 일을 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죽는 것”()이라고도 썼다. “사실 재미는 좀 없는 분”이라고 말한 지인도 있다. 그만큼 일에 몰두한다는 취지다.



밤 10시25분께 박 시장의 카니발 전조등이 방배동 아파트 입구를 비추며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12시간 넘게 일한 셈이다. 12시간 넘게 일할 날이 앞으로도 2년8개월 남았다. 11월10일 같은 이해갈등 조정의 날이.

아쉬운 소리 못하는 스타일

다산콜센터에서도 박 시장은 성실했다. 도착하자마자 전화상담을 직접 실행하는 외주업체 대표 및 담당 공무원들과 면담했다. 노동조건, 개선점 등을 물었다. 등 기자가 3명 있었다. 박 시장은 언론을 신경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끈질기게 개선점을 물었고, 꼼꼼하게 본인의 개선 아이디어를 던졌다. 인터넷으로 시민이 직접 시정 관련 신고를 하는 ‘커뮤니티 맵핑’이나 시정 제안용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개발 등 아이디어가 바로 튀어나왔다. 사무실 구석에 서 있던 공무원들에게 “가까이 오라”며 앉기를 권했다. 그렇게 1시간이 흘렀다. 콜센터에서 상담 체험을 하려고 엘리베이터로 이동했다.

엘리베이터에 함께 탄 박 시장에게 “(부채로 인한) 재정 축소와 복지 확충이라는 두 마리 토끼에 대해 여전히 가능하냐는 질문이 나온다”고 물었다. 박 시장은 머리를 만지며 “그래서 그 방안을 찾느라고 제 머리가 이렇게 됐습니다”라고 웃었다. 질문을 더 하려 하자 옆에 있던 류경기 대변인이 “아까 브리핑룸에서 다 말씀하셨다”고 가로막았다. 그는 세빛둥둥섬 등 오세훈표 토목사업을 지휘하고 옹호했던 전 한강사업본부장을 지낸 관료다. 그는 앞으로 박원순 시장의 마이크 구실을 한다. 시민들이 수줍어한 탓에 박 시장의 상담체험은 이뤄지지 않았다.

박 시장의 밴이 떠난 오후 6시, 신설동엔 벌써 땅거미가 졌다. 대변인실은 그의 이후 일정과 퇴근 시간은 공개하지 않았다. 밴이 사라질 때까지 공무원들은 콜센터 정문에 도열했다. 그것이 관료들의 행동 코드다. 박 시장은 그런 관료 코드와도 싸운다. 박 시장은 말과 글의 힘, 소통의 힘을 믿는 이성주의자다. 말과 상식으로 반대자를 설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참여연대부터 희망제작소 시절까지 그는 먼저 다가가 허리를 굽히는 ‘정치적 어법’과 거리가 먼 인물로 알려져 있다. 경제계의 한 지인은 “(청탁류의 말은) 절대 안 한다. (박 시장은) 점잖은 사람이다. ‘협찬 인생’이라는 보수언론의 보도와 달리, 희망제작소 안에서 기업 기부를 좀더 많이 유치하자는 의견이 나오면 박 시장은 외려 ‘우리 목적은 기부문화 창달이지 돈 끌어내는 게 목적이 아니다’라며 거부하곤 했다. 워낙 아이디어가 좋아서 기부가 알아서 찾아오는 거지 (박 시장이) 먼저 나서서 돈을 구걸하는 스타일이 절대 아니다”라고 말했다. 뒤집어 해석하면 ‘아쉬운 소리’를 못한다는 취지도 된다.

박원순 시장은 11월10일 오후 다산콜센터를 방문해 상담 체험을 시도했다. 수줍어하는 시민들이 통화를 피해 실제 상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겨레21> 김경호 기자

박원순 시장은 11월10일 오후 다산콜센터를 방문해 상담 체험을 시도했다. 수줍어하는 시민들이 통화를 피해 실제 상담은 이뤄지지 않았다. <한겨레21> 김경호 기자

전쟁 같은 2년8개월이 남았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6년 인터뷰에서 서울시정의 핵심에 대해 ‘이해갈등의 조정’을 꼽았다. 허리를 굽혀본 적이 별로 없는 박원순 시장은 앞으로 지지자, 반대자, 시장 선거에 투표하지 않은 무관심 시민 377만 명 사이의 갈등을 조정해야 한다. 박 시장은 전임 시장의 실패한 뉴타운 정책 뒷수습을 해야 하고, 야권의 시장 선거 승리가 부동산 시장 위축을 불러온다고 보도하는 경제지와 보수언론을 맞상대해야 하며, 여전히 시장 앞에서 도열하는 게 익숙한 관료와 그런 관료 출신 대변인 등 공무원들의 헌신을 이끄는 과제를 가진 동시에, 자신의 당선 하루 뒤 주저 없이 서울교육청 권한대행을 임명하는 이명박 행정부와 맞서 ‘복지’와 ‘사람 중심’이라는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

밤 10시25분께 박 시장의 카니발 전조등이 방배동 아파트 입구를 비추며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12시간 넘게 일한 셈이다. 12시간 넘게 일할 날이 앞으로도 2년8개월 남았다. 11월10일 같은 이해갈등 조정의 날이.

고나무 기자 dokko@hani.co.kr

*참고 문헌 (검둥소), 박원순의 아름다운 가치사전>(위즈덤하우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