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미 격변의 시대에 들어서 있다.
역설적이게도, 변화에 가장 둔감한 정치를 통해 그 실체가 충격적으로 확인됐다. 10월26일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통해서다. 시민운동가 출신의 박원순 변호사가 민주당 등과 후보단일화를 한 뒤 한나라당을 꺾고 서울시장에 당선되자, 언론들은 ‘정치 빅뱅’ ‘쓰나미’ 등 격변의 폭과 깊이를 표현할 수 있는 최대치의 단어를 뽑아내려 고심했다.
격변의 바람은 새로운 정치와 리더십을 갈망하는 시민들로부터 불어왔다. 과거와 다른 대목은 이들에게 욕구를 실현할 무기가 생겼다는 점이다. ‘뒷담화만 까는’ 수동적 시민이 아니다. 소통하며 놀며 즐기다가 정치적 공간이 열리면 참여하고 실천하고 심판하는, ‘개념 시민’이다. 스마트폰 2천만 대 시대, 트위터와 페이스북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다.
권력의지 없을수록 지지하는 대중
변화의 바람을 타고 극적으로 등장한 이는 누가 뭐래도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이다. 지난 8월 오세훈 전 서울시장의 ‘무모한 도전’에서 시작돼 ‘무상급식 주민투표→오세훈 사퇴→서울시장 보궐선거’로 이어진 두 달여 동안, 안철수 원장은 세상을 3번 들었다 놨다. 서울시장 출마 여부를 검토하는 것만으로 단박에 지지율 1위를 차지했다. 오랜 신뢰관계가 있다고는 하나 당시엔 경쟁관계이던 박원순 변호사에게 아무 조건 없이 ‘쿨하게’ 양보했다. 그리고 선거 막바지, 가장 극적인 순간에 등장해 투표 참여를 촉구하는 편지로 세간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그 어느 것 하나 기존 정치 문법으로는 해석이 힘든 신선한 방식이었다. 효과는 최대치로 나타났다. 지난 4년간 대세론의 주인공이던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는 “원래 대세론이란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끝났음에도, 그리고 안 원장이 정치와 거리를 두겠다는 뜻을 거듭 밝히고 있음에도 여전히 그의 일거수일투족은 관심 대상이다. 이미 대선주자 반열에 오른 그가 정치에 뛰어들지, 더 구체적으로는 2012년 총선 혹은 대선에 출마할지, 언제 어떤 방식으로 안철수의 길을 열어갈지에 대한 관심이다.
정치와 관련해 대중의 요구는 종종 이율배반적이다. 자신이 지지하는 인사가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둘수록, 이른바 권력의지라는 것을 드러내지 않을수록 더욱 주목하고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안철수 원장만큼은 아니지만, 안 원장의 급부상에 앞서 야권 성향 지지자들의 주목을 끌었던 문재인 노무현재단 이사장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안 원장이 내년 대선에 출마하겠다는 결심이 굳어졌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실행 계획이 나오기 전까지는 현실 정치와 거리를 둘 것으로 보인다. 멀어진다고 해서 그가 무대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그를 지지하는 열기가 쉽게 사그라지지는 않을 전망이다.
안 원장 자신이 속내를 털어놓지 않는 한 안철수의 길은, 그와 그의 주변 인사들의 입을 통해 미루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그는 10월27일 ‘정치인 안철수’의 ‘신당 창당 가능성’을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학교 일만으로도 벅차다”고 말했다. 지난 9월6일 박원순 후보와의 단일화 당시엔 “본업으로 돌아간다”면서도 “제 삶을 믿어주시고 성원해주신 기대를 잊지 않고 제가 아닌 사회를 먼저 생각하고 살아가는 정직하고 성실한 삶으로 보답하겠다”고 여지를 뒀다. 서울시장 도전을 저울질하던 9월 초엔 이런 얘기도 했다. “현실 정치 참여에 대해 10년 동안 꾸준히 기회가 많았는데도 거부할 의사를 계속 가지고 있었던 이유가 한 사람이 바꿀 수 없다는 일종의 패배의식 같은 거 때문이었다. 혼자 들어가서 혼자 높은 자리에서 잘 대접받다가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고 나오면 인생낭비다. 대통령이라면 한 사람이 크게 많이 바꿀 수 있는데 그럴 생각은 없다.” 여전히 모호하다. 그런데 안 원장과 서울시장 출마 여부를 검토했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은 10월6일 과의 인터뷰에서 “안 원장이 내년 대선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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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속 안철수, 가능성 높아
어느 시점이 될지는 분명치 않지만 안 원장의 대권 프로젝트가 가동된다면 가능한 시나리오는 대략 세 가지다. 새로운 정치를 표방하며 새로운 방식의 정당을 만들거나 무소속 상태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실제 안 원장이 “개인 의견일 뿐이다. 너무 나갔다”고 뒤에 단속을 했지만, 그의 주변 인사들에게선 스마트폰 시대에 맞는 모바일·디지털 정당 구상이 흘러나온 적도 있다.
하지만 신당을 만들 가능성은 높지 않다. 개인 안철수의 높은 지지와 인기만으로 정당이 뚝딱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돈과 사람과 정책이라는 기본 골격은 어떻게든 갖춘다고 하더라도 어느 기반 위에 정당을 ‘짓느냐’의 문제가 남는다. 안 원장이 정당을 만든다면 진보개혁이나 보수가 아닌 중도의 땅에 집을 지을 가능성이 크다. 중도가 확장성을 지녀 양쪽으로 지지를 넓혀갈 수 있다면 좋겠지만 진보와 보수의 대결 양상이 본격화되면 오히려 중도가 양쪽으로 견인돼 흔들리는 경향성을 띠게 된다. 이인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모래밭 위에 집을 지을 수는 없기 때문에 안 원장이 신당을 만들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자칫하면 존경받는 성공한 기업인 출신으로 중도와 무당파층 기반의 제3의 정치세력을 만들려 했던 창조한국당의 ‘문국현의 길’을 따라갈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안 원장이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지나오는 동안 ‘반한나라·비민주’ 노선을 분명히 한 만큼 기성 정당에 몸담을 가능성도 별로 없다.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문재인 이사장, 이해찬 전 총리, 문성근 ‘국민의 명령’ 대표 등이 주도하는 시민정치운동 ‘혁신과 통합’의 성과가 민심을 얻는 범야권 대통합정당 건설로 이어진다면 달라질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안 원장이 대선 출마를 목표로 한다면 야권 통합 정당에서 다른 후보들과 경쟁하는 구도보다는 ‘박원순 모델’을 따를 가능성이 높다. 범야권의 대선 후보가 결정된 뒤 그와 단일화를 꾀하는 방식이다. 즉 안철수 원장이 내년 대선으로 직행한다면, 신당을 통한 독자 출마보다는 야권 단일후보를 목표로, 야권의 여러 후보와 경쟁하기보다는 ‘1차 예선’을 거친 야권 후보와 ‘2차 예선’을 치르는 방안을 염두에 두고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쉽지 않지만 그나마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 안 원장에게 여러 갈래의 길이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나 하나하나 따져보면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안철수 원장이 그 경로를 걸어가게 된다면 누구를 만나게 될까. 야권의 잠재적 대선주자들이다. 손학규 민주당 대표가 될 수 있고, 문재인 이사장일 수도 있다. 여론조사 기관마다 다르긴 하지만 유시민 국민참여당 대표, 김두관 경남도지사, 한명숙 전 총리, 정동영 민주당 최고위원, 진보정당에서는 노회찬·심상정 전 의원이 후보군에 속한다.
내년 대선까지 변수가 널려 있지만 현재의 지지율대로라면 문재인 이사장이 안 원장의 잠재적 경쟁자가 될 가능성이 크다. 두 사람 모두 당적을 가진 적이 없어 비정치인 이미지가 강한데다 권력의지를 내보이지 않았음에도 야권 지지층에서 박근혜 전 대표의 대항마로 여긴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 때문에 안 원장이 서울시장 보궐선거 전후로 급부상하기 전까지는 문 이사장의 총선과 대선 출마 가능성에 대중의 관심이 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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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앞의 통합 문제
문재인의 길은 안철수의 길에 비해 명료하다. 단일 경로다. 하나의 관문을 통과하면 다른 길이 열리고, 그 길 끝에 또 다른 문과 또 다른 길이 이어져 있는 식이다. 문 이사장은 오랜 고심 끝에 현실 정치에 발을 내디뎠다. 시민정치운동인 ‘혁신과 통합’의 상임대표를 맡아 야권 통합 작업에 전념하고 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시범적으로 가동돼 위력을 발휘한 야권 통합이 그가 통과해야 할 첫 번째 관문이다. 11월 초 범야권 대통합정당 추진기구 발족, 12월 초 통합정당 창당대회를 목표로 야당 대표와의 연쇄 회담을 계획하고 있다. 진보정당들이 통합보다는 연대 방식을 선호하고 민주당 일각에서도 반대 기류가 있어 순탄치는 않을 전망이다.
첫 번째 문을 통과해야 내년 4월 총선까지 가는 길이 열린다. 문 이사장은 부산·울산·경남 의석수의 3분의 1 이상 확보를 목표로 밝힌 바 있다. 한나라당의 텃밭에서 의미 있는 성적을 거둬야 그에게 대선주자로서의 가능성이 열린다. 총선의 전초적 성격을 띠어 부산 민심을 가늠해볼 수 있는 10·26 부산 동구청장 선거에서 문 이사장은 이해성 민주당 후보의 후원회장을 맡아 직접 선거운동에도 나섰다. 하지만 한나라당과 박근혜 전 대표의 높은 벽(득표율 14.5%포인트 차이)에 부닥쳤다. 문 이사장은 “저희 능력이 부족하고 힘이 모자라 동구 주민의 열망을 다 감당하지 못해 송구스럽다”며 “야권 대통합만이 유효적절한 대안이라는 점을 확인한 선거였다”고 평가했다.
문 이사장은 지난 8월 과의 인터뷰에서 “통합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니 이 시기에는 통합에 전념하려 한다. 총선 때는 총선에 전념하고. 그러다 보면 상황이 저절로 정리될지 모른다. 기대를 걸어봤더니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정리되든가(웃음)”라고 말한 바 있다. 문 이사장과 가까운 한 인사는 “호랑이 등에 올라탄 상태여서 내리고 싶어도 내리지 못해 갈 데까지 가보지만, 꼭 자신이 그 주인공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박원순 시장의 경우처럼 안철수 원장이 어떤 국면에서는 경쟁자가 될지도 모르는데, 그에 대한 문 이사장의 평가는 후하다. 안 원장의 정체성과 안철수 신드롬의 유불리를 놓고 정치권에서 논쟁이 오가던 즈음, 문 이사장은 안 원장을 와락 안아버렸다. “안철수 신드롬은 저로서는 아주 기분이 좋은 현상으로,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을 심어줬다. 내년 대선 국면에서 (정권 교체를 위해) 안 원장과 힘을 합쳤으면 좋겠다. 안 원장이 박근혜 대세론을 일거에 무너뜨릴 가능성을 보여줬다. 새로운 정치를 여는 대열에 합류하기를 기대한다.” 지난 9월7일 부산 지역신문인 의 초청 강연에서 한 말이다. 안 원장이 문 이사장을 어떻게 보는지에 대해서는 이밖에 공개된 내용이 없다.
시민의 힘이 그들을 어디로 밀까
안철수의 길과 문재인의 길을 놓고 보면 이런 비유도 가능할 것 같다. 안 원장은 와의 ‘직설 인터뷰’에서 “혼자 열심히 공부하는데 뒤에서 웅성웅성 소리가 나서 돌아봤더니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더라”고 말한 적이 있다. 대선주자로 급부상한 시간을 보더라도 안 원장은 ‘스타’다. 반면 문 이사장은 야권 통합이라는 성과를 바탕으로 내년 총선에서 어려운 관문을 통과해야 가능성이 열린다. 오디션 프로그램의 도전자 같다. 두 사람이 각자의 길을 간다면, 두 길이 만났다가 갈라지기도 할 것이고 어떤 길은 중간에 끊길 수도 있다. 그 길은 혼자 가는 길이 아니다. 시민들과 함께 간다. 격변의 시대 이전에는 지도자가 “나를 따르라”며 선도했다면, 이제는 시민들의 힘에 밀려간다. 안철수의 길과 문재인의 길에 서 있는 시민들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이 때문에 둘은 경쟁자이자 동시에 동반자가 될 수도 있다. 10·26 서울시장 선거 때의 박원순·안철수처럼.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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