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책임투자(SRI) 동향을 국내와 국제로 나눠보면 큰 온도차를 느낀다. 지난 6월과 최근 미국 워싱턴DC와 프랑스 파리에서 각각 열린 SRI 콘퍼런스에서 필자가 느낀 소감이다. 이미 유럽과 북미 지역의 SRI는 주류 금융권에 상륙했다. 해외 콘퍼런스 현장마다 세계적 규모의 연금·보험·자산운용사 관계자들이 넘친다.
정보 공개를 부담으로 여기는 기업
환경·사회·지배구조(ESG) 분석을 원칙으로 삼는 유엔책임투자원칙(UN PRI)에 서명한 투자기관들의 총 운용자산 규모가 30조달러에 이르고,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블룸버그·톰슨로이터 등의 금융정보회사들이 ESG 데이터를 생산·제공한다. 캘퍼스·PGGM 등 세계적 연금펀드들은 투자 방식에 ESG 분석을 접목시키기로 하고 구체적 방법론을 모색 중이다. 이처럼 최근 3~4년 동안 국제적 SRI 판도는 흡사 여울성 파도와 같이 민첩하게 변화했다. 이들을 변화시킨 핵심 동인은 무엇이었을까? 장기적으로 ESG 성과가 우수한 기업이 투자수익률도 높다는 재무적 투자자로서의 경험적 확신이다.
그러나 국내로 눈을 돌리면 여전히 호수 위 잔잔한 표면을 보는 듯하다. 물론 국민연금이 SRI 투자 규모를 늘려가고 있지만, 여타 투자기관들은 아직도 무관심 지대에 머물러 있다. 단기 성과에 집착하기 때문이다. SRI 투자에 기본 인프라를 제공하는 ESG 분석기관들도 여러 문제를 안고 있다. 평가방법론의 한국적 적실성, 정보의 엄밀성, 무엇보다 그들 스스로의 이해 상충 문제로 인한 독립성 측면에서 신뢰를 받지 못한다. ‘기업의 ESG 성과’에 대한 각종 시상, 평가 등은 요란하지만 그 진정성에는 의문부호가 달린다. 평가, 회계감사 등이 무리한 장사로 연결됐을 때 엔론·리먼브러더스와 같은 대재앙을 불렀고, 그 반작용으로 등장한 것이 윤리경영·지속가능경영이었다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ESG 업계 스스로가 먼저 윤리적이고 지속 가능하게 판을 짜고 키우는 노력이 요구된다. 그것이 자기모순을 배제하고, 기업들에 평가기관으로서 권위를 인정받으며, 무엇보다 지속 가능성의 철학에 합치하는 것이다.
해외 투자기관들을 중심으로 SRI가 확대되는 가운데, 기업의 ESG 정보 공개 이슈가 최전면에 등장한다. 정보가 존재해야 분석이 가능하고 분석 이후에 투자가 성립한다는 점에서, 신뢰할 만한 정보 입수는 곧 SRI 투자의 첫걸음이다. 기업들에는 이것이 추가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지속 가능 보고서를 발간하려면 ESG 정보와 실적 관리를 위한 자원 배분이 요구되지만, 그로 인한 비용효과는 불확실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야를 조금만 넓히면 기업 경영에서 ESG 이슈들은 전통적 경영 요소들 못지않게 중요함을 알 수 있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례는 많다. 도요타 대량 리콜 사태에서 제기된 협력업체와 관련된 부정적 측면과 실적 악화, 브리티시페트롤리엄(BP)의 멕시코만 기름 유출 사건에서의 주가 대폭락 등은 ESG 중대성에 대한 반면교사다. ESG 성과와 재무성과 간의 긍정적 상관관계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연구 또한 속속 발표되고 있다. 재무적 투자자인 SRI 펀드들이 ESG 분석을 확대하는 이면에는 양호한 투자성과가 자리잡고 있다는 점을 기업들은 읽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은 비용 지출이라기보다는 무형자산에 대한 미래 투자에 가깝다.
장기 가치 기업엔 오히려 지원군
이런 배경하에 연기금들을 중심으로 주주권 행사가 확대되는 추세다. 이들은 장기 주주 가치를 지키기 위해 경영진과의 대화 및 제안, 주총에서의 적극적인 의결권 행사를 실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곧 경영진과의 적대를 의미하진 않는다. 오히려 장기 기업 가치를 창출하는 경영진에게는 든든한 지원군이 된다. 이제 기업들에 ESG 성과 관리는 점점 더 중요한 양날의 칼이 되고 있다. 한 면은 양질의 장기자금인 SRI 투자자를 유치하는 기회의 칼이며, 다른 한 면은 기업에 새로운 재앙을 방치하는 위험의 칼이다. 기회의 칼날을 갈고, 위험을 무디게 하는 작업은 이제 기업의 몫이다.
류영재 서스틴베스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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