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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법정에 소환당한 청바지

청바지 ‘벗겨짐의 임계점’을 놓고서 엇갈린 성범죄 판결…여성의 ‘행실’을 따지는 성차별적 관점은 쉽게 변하지 않아
등록 2011-07-20 17:56 수정 2020-05-03 04:26
청바지는 입고 있는 여성의 '도움' 없이는 강제로 벗기기 쉽지 않다는 판결이 종종 나온다. 주먹으로 때리고 흉기로 위협하고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벗겨지는 청바지는 어쩌란 말인가. 한겨레 김명진

청바지는 입고 있는 여성의 '도움' 없이는 강제로 벗기기 쉽지 않다는 판결이 종종 나온다. 주먹으로 때리고 흉기로 위협하고 죽이겠다고 협박해서 벗겨지는 청바지는 어쩌란 말인가. 한겨레 김명진

조선시대 여성들의 저고리도 유행을 탔다. 16세기에 허리선을 덮기에 충분한 길이(65cm 전후)였던 저고리는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짧아졌다. 19세기에 이르러서는 28cm 정도로 확 줄었다. ‘어우동 패션’이다. 심지어 14.5cm 길이의 초미니 저고리까지 등장했다. 요즘 말로 ‘상의 실종’이다. 가슴을 가리기에도 벅찼다. 에로틱한 노출 패션은 애초 기녀들의 트렌드였다. 통념상 ‘헤픈 여자’(Slut·슬럿)들의 복식이던 초미니 저고리가 정숙한 양반가 여인들에게까지 번졌다. 사회적 논란이 됐고, 짧은 걸 참지 못한 남자들이 나섰다. 영·정조 연간의 실학자 이덕무는 문집 에서 이런 유행이 “기녀의 아양 떠는 자태를 세속의 남자들이 자기 처첩에게 본받게 해서 생겨났다”고 지적했다. 한복 디자이너 김혜순씨가 최근 펴낸 에 이런 내용이 잘 정리돼 있다.

이탈리아 여성의 청바지 시위

양반이 기녀를 따라하고 훌렁훌렁 벗어던지기 쉬운 저고리가 짧아지기까지 했으니 신분제 유교사회가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를 건드렸을 수 있다고 치자. 왕후장상 남녀노소 따로 없이 청바지를 입는 21세기에도 청바지를 둘러싼 새로운 임계점이 생겨났다. 청바지와 여성 하체 사이의 마찰계수를 고려할 때 청바지를 강제로 벗기려는 남성의 완력이 어느 정도가 돼야 벗겨지는지, 그 ‘벗겨짐의 임계점’이다.

1999년 2월10일 이탈리아 대법원이 벗겨짐의 임계점을 판례로 남기는 획기적 선고를 했다. 운전연습 교사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는 로자양 사건에서 이탈리아 대법원은 “청바지는 입은 여성의 적극적인 도움 없이는 벗길 수 없다”며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하급심에서 징역 2년10개월이 선고된 이 남성은 여성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는데, 대법원은 “청바지는 입은 여성이 전력을 다해 저항할 경우 강제로 벗기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성범죄의 대상이 될 경우 ‘전력을 다해 저항할 의무’가 여성에게 부과된 것이다. 중세적 판결에 여성단체들이 발칵 뒤집혔다. “청바지가 무슨 정조대라도 되느냐” “대법원은 청바지에 붙은 지퍼의 존재를 생각하라” “청바지를 입은 여자라도 상대가 주먹이나 흉기로 위협해 옷을 벗길 수 있다”는 항의가 쏟아졌다. 이탈리아 여성 의원들은 청바지를 입고 의사당 앞에서 시위를 벌였다.

청바지가 무슨 밤송이라도 되는 양 ‘벗기기 쉽지 않다’는 판결은 한국에서도 나왔다. 1990년대 초 서울지법의 한 판사는 청바지를 입은 여성을 포니 승용차 안에서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사는 자신의 아내에게 청바지를 입히고 포니 승용차에서 재연을 했다. 결국 여성이 반항하는 상황에서 찢어지지 않는 청바지를 내리고 성폭행하는 것은 어렵다고 판단했다.

2008년 서울고법은 강간치상 혐의로 구속 기소돼 1심에서 징역 7년이 선고된 남성의 항소심에서 1심 판결을 완전히 뒤집어 무죄를 선고했다. 9가지에 이르는 성폭행 정황에 대해 “강간치상의 범행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하는 강한 의심이 들기는 한다”고 운을 뗀 재판부는 곧이어 30여 가지의 반대 논리를 제시했다. 이 가운데 하나가 여성이 입고 있던 청바지의 바지폭이었다. 재판부는 “당시 피해자는 아래로 갈수록 폭이 좁아져 벗기기 어려운 청바지를 입고 있었고, 모텔 바닥에 청바지와 팬티가 함께 가지런히 말린 상태로 놓여져 있었던 점”을 거론했다. 벗기기 어려운 청바지가 팬티와 함께 ‘가지런히’ 말려 있는 점으로 보아 강제로 벗긴 것이 아니라 스스로 벗었다는 얘기다. ‘가지런히’라는 주관적 부사는 논외로 치더라도 바지 위에 팬티를 입는 슈퍼맨이 아닌 이상, 스스로 바지와 팬티를 동시에 벗어 말아두는 사람은 없다는 ‘합리적 의심’은 제외됐다.

여성을 자살로 몰아간 2차 가해

재판부는 “형사재판에서 유죄의 인정은 법관으로 하여금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확신을 가지게 할 수 있는 증명력을 가진 증거에 의하여야 한다”는 판례를 들어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 판결로 해당 여성은 성폭행도 아닌데 상의만 입고 6층 모텔 창문에서 뛰어내려 하체 마비 등 전치 20주의 ‘자해’를 한 ‘정신 나간’ 여자가 됐다. 다행히 대법원은 “바지와 팬티가 따로 정돈돼 있지 않고 함께 돌돌 말려져 올라간 상태로 있었던 점에 비춰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옷을 벗은 것이 아니라 피고인이 강제로 피해자의 하의를 한꺼번에 벗겼음을 추측할 수도 있다”며 다시 유죄로 판단했다.

벗기기 힘든 청바지가 피해 여성에게 유리하게 해석되는 경우도 있다. 2008년 인천지법은 “피해 여성이 입은 청바지는 몸에 달라붙는 것이어서 술에 취한 상태에서 혼자 벗기 힘들었을 것”이라는 피해자 쪽 진술을 “추측에 불과하다”며 가해 남성에게 일부만 유죄를 인정하는 유리한 결론을 내렸다. 반면 서울고법은 이 사건의 항소심에서 “피해자는 몸에 꽉 끼는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피고인의 집에서 깨어났을 때 바지는 현관 앞에 처음부터 끝까지 뒤집힌 상태로 있었다. …바지가 벗겨진 형상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스스로 벗은 경우와는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뒤집힌 상태였던 점” 등을 들어 모두 유죄로 인정했다.

성기 삽입을 기준으로 하는 강간죄는 피해 여성이 얼마나 ‘무력화’됐는지가 중요한 판단 근거가 된다. 이 때문에 강간죄가 적용된 재판에서는 폭행의 정도와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피해자의 복장, 반항 정도, 옷을 벗기는 과정이 어떠했는지를 따지게 된다. 청바지가 성폭행 재판에서 곧잘 등장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법원의 남성적·보수적 시각도 간과하기 어렵다.

지난 6월 성폭행을 당한 여성이 재판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여성은 숨지기 이틀 전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성폭행 사건 공판에 피해자 자격으로 출석해 증언을 했다. 가해 남성의 변호인은 이 여성이 예전에도 해당 남성을 여러 차례 만났고, 성관계가 이뤄진 장소도 남성이 사는 고시원이었던 점 등을 들어 일방적 성폭행으로 볼 수 없다는 쪽으로 변론했다. 재판부도 변호인 쪽 자료 등을 바탕으로 과거에 노래방 도우미로 일한 전력, 성경험 여부 등을 여성에게 따져 물었다. 여성은 “너무 수치스럽고 억울하다”는 유서를 남겼다. 한 여검사는 “노래방 도우미 경력, 성경험이 있다는 것은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런 경험이 있으면 성폭행을 당해도 된다는 의미인가? ‘나는 너에게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질문밖에 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여성이 죽은 뒤 이뤄진 선고에서 가해 남성에게 징역 3년을 선고하며 “이 사건을 계기로 성폭행 피해자에 대한 증거조사 과정에서 2차적 정신적 충격을 받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밝혔다.

국민참여재판 때도 편견 작용 경우 많아

성범죄 재판에서 성폭행이라는 실체적 진실과 관련 없는 여성의 ‘행실’을 따지는 것은 오래된 관행이다. “방문을 열어놓은 채 혼자 잠을 자고” “옷을 약간 벗은 채 잠을 자고” “피해자는 술을 마시고 피고인을 따라가고” “잠옷 바람으로 문을 열어주고” “새벽에 혼자 정류장에 서 있고” 등 일상에서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들이 성범죄에서는 문제가 된다(박선미, ).

일반 시민들이 배심원으로 참여하는 국민참여재판에서도 성폭행 사건이 종종 다뤄진다. 한 부장판사는 “가해자 쪽 변호인이 실체적 진실과 상관없는 피해여성의 행실을 문제 삼아 ‘꽃뱀’으로 몰아가는 경우가 있다. 훈련되지 않은 배심원들은 ‘그러면 그렇지. 여자가 빌미를 줬겠지’라며 오히려 가해자를 동정하는 사람들이 생기기도 한다”고 말했다. 혹시나 배심원이 되면 다들 마음 단단히 먹고 가야겠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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