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프로축구연맹은 올 시즌 개막에 앞서 지난 2월 선수들은 물론 구단 직원들에게 각서를 받았다. 내용은 ‘불법 베팅을 하다 적발될 시, 벌금 5천만원과 영구 제명 조처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4월에는 선수들을 상대로 불법 베팅 사이트의 문제점과 실태를 집중 교육했다. 프로축구연맹 박용철 홍보부장은 “승부조작과 관련된 소문이 돌면서 교육을 강화한 것”이라고 말했다.
가난한 시민구단 선수들 표적
소문은 사실이었다. 경남 창원지검은 지난 5월 대전 시티즌 박아무개, 광주 FC 성아무개 선수와 브로커 2명을 승부조작 혐의로 구속했다. 2006년 전북 현대가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할 때 주역인 정종관씨는 “승부조작에 관여한 것이 부끄럽다”는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여기에 전 국가대표 김동현(상무)씨는 군검찰에서 구속영장이 청구된 상태다. 6월2일 포항 스틸러스 구단은 승부조작 정보를 입수해 스포츠토토에 1천만원을 넣어 배당금 2천만원을 챙긴 미드필더 김정겸(35)씨와 계약을 해지했다.
아까운 청춘이 목숨을 끊는 일까지 발생했지만 승부조작 의혹은 계속되고 있다. 프로축구를 넘어 ‘대학축구리그’(U리그) 등 아마추어 대회까지 의심받고 있다. 농구·배구 등 다른 종목도 승부조작이 있으리라는 의혹을 받고 있다.
승부조작은 왜 일어나는 것일까? 전 프로축구 선수는 ‘예견된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선수들의 잘못은 당연히 인정한다”면서도 “형편이 어려운 선수들이 돈의 유혹에 빠지기 쉬운 구조”라고 지적했다. 또 “실업리그인 내셔널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보통 월 300만~500만원을 받고, 잘하는 선수는 월 700만원을 받는다”며 “하지만 K리그에서 뛰는 프로선수 가운데 상당수가 연봉 2천만원의 박봉에 시달리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로 구속된 두 선수는 월급이 박한 시민구단에서 뛰고 있다. 자살한 정씨나 구속된 김동현씨는 공익요원이나 군인 신분이었다. 기업이 대주주인 구단은 유명 선수의 연봉이 대개 2억~3억원의 수준이고, 특A급 선수는 10억원에 달한다. 여기에 경기에 출전할 때마다 받는 출전수당이나 팀이 이기면 받는 승리수당 등은 별도다. 반면에 연 예산이 70억~90억원에 불과한 시민구단의 선수들은 기업이 소유한 구단보다 훨씬 박하다. 삼성전자의 계열사인 수원 블루윙즈는 2010년 매출이 363억원에 이르지만, 대전 시티즌은 70억원에 불과했다. 게다가 프로축구 구단에 소속된 연습생은 몇년째 월 100만원에 고정돼 있다. 2001년 프로구단에 입단한 한 선수는 “내가 입단할 때 연습생이 월 100만원을 받았는데 지금도 100만원이다”라고 말했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은 “선수들 간 연봉 차가 많이 나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열악하고 힘든 선수들이 있다”며 “연봉이 많은 선수들도 승부조작 의혹을 받기는 하지만, 상황이 어려운 선수들이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구조”라고 말했다. 전용배 동명대 교수(체육학)도 “비리에 연루된 이들이 대개 시민구단 선수들”이라며 “과거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일어난 ‘블랙삭스 스캔들’처럼 결국 돈이 승부조작의 주요 원인”이라고 말했다. 블랙삭스 스캔들은 1919년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도박사들과 연계해 신시내티 레즈와의 월드시리즈 챔피언전에서 일부러 진 사건이다.
학창시절 시작된 승부조작 불감증여기에 중국과 동남아의 검은돈까지 유입됐다는 의혹까지 일고 있다. 이미 2008년 대한축구협회 주관 ‘K3 리그’에서 일부 선수가 중국 도박업자에게서 100만~250만원을 받고 승부조작을 해 처벌을 받은 사실이 있다. 중국에서는 이들 경기를 대상으로 도박판이 벌어졌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는 “2008~2009년 중국의 프로축구가 승부조작 사실이 드러나고 지난해 중국축구협회 부회장이 체포되는 등 정부 차원에서 대대적인 정화운동이 일어났다”며 “그쪽의 도박자금이 한국으로 몰릴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스포츠토토는 최근 프로축구연맹이 주관한 워크숍에서 500여 개의 불법 스포츠베팅 사이트가 있고, 그 규모는 4조원으로 추정된다고 밝혔다. 또 이들 사이트는 해외에 서버를 두고 있으며, 폭력조직과 연계돼 있다고 발표했다.
한켠에서는 학창 시절부터 익숙해진 선수들의 ‘도덕 불감증’을 원인으로 꼽았다. 프로축구 관계자는 “4강이나 8강에 진출하면 팀 선수 전원에게 대학에 진학할 수 있는 자격을 주는 ‘4강제’ ‘8강제’ 때문에 일부러 져주는 경우가 많았다”며 “어릴 적부터 그런 것에 익숙해진 선수들이 ‘져주는 게 부도덕하다’는 인식이 없는 경우가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해 9월 고교축구리그에서 광양제철고가 포철공고에 고의로 진 사실이 드러나 양팀 지도자들이 자격정지의 징계를 받기도 했다. 이런 비리를 막으려고 지난해 교육과학기술부는 대학이 야구·축구 등 고교 구기종목 체육특기자를 뽑을 때 팀 성적 외에 개인 성적도 합산하도록 했다.
이런 상황에서 프로축구연맹이나 축구협회는 대비책 마련에 부산하다. 프로축구연맹은 지난 5월31일 1박2일간 ‘K리크 워크숍’을 열었다. 이 자리에서 전체 16개 구단 선수들을 상대로 승부조작 등 불법행위에 연루된 의혹이 생기면 계좌 입출금 및 통화 내역 등 개인정보를 스스로 제공하겠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았다. 또 선수·심판·코칭스태프·구단 관계자의 자진 신고를 받고, 고발자에게는 포상도 할 예정이다. 향후 부정 및 불법 행위자가 나올 경우 구단과 감독에게 책임을 물을 계획이다. 축구협회도 축구계 비리를 근절하려고 ‘승부조작 비리근절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런 움직임은 승부조작이 축구 인기를 끌어내릴 수 있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과거 이탈리아 프로축구 세리에A는 2004~2005 시즌 중 유벤투스 회장이 팀에 우호적인 심판을 배정받으려고 한 시즌 38경기 중 29경기에 개입한 사실이 2006년 밝혀지면서 관중이 15.7% 줄어드는 악영향을 받았다.
‘걸리면 망한다’ 인식 심어야하지만 이런 대책으로는 미흡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준희 한국방송 해설위원은 “지난 2008년 내셔널리그와 K3 리그에서 승부조작 사건이 발생했는데 그때 엄정한 관리를 못해 승부조작 사건이 다시 발생했다”며 “프로축구연맹과 축구협회에서 대안을 내놓았지만 실효성이 있을지 의심된다”고 말했다. 또 “형편이 어려운 선수나 구단에 ‘걸리면 망한다’는 압박이 되도록 가혹한 처벌과 함께 리그에서 퇴출하는 등 강력한 대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아울러 검찰 등 사정 당국의 강력한 수사를 주문했다. 한준희 위원은 “축구계 등 스포츠계가 수백 개에 이르는 불법 베팅 사이트를 막을 수는 없다”며 “검찰 등 사정 당국에서 수사해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윤수 평론가도 “예산이 수백억원에 달하는 축구협회가 자정 시스템을 꾸렸지만 지금까지 효과가 없었다”며 “선수들의 뒷배경에 있는 브로커 자금줄과 조직을 잡아야 승부조작 비리를 없앨 수 있다”고 말했다.
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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