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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우물을 담는 집으로

아파트 전문가 박철수 교수의 단독주택 이주기… 스스로 짓고 가족의 사연이 담기는, 시장이 제공하지 않는 집 만들기
등록 2011-06-02 15:23 수정 2020-05-03 04:26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으로. ‘아파트 독재’가 저무는 황혼에 어른거리는 풍경이다. 아파트 전셋값으로 단독주택을 지은 내용을 담은 책이 최근 화제가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아파트 전문가 가운데 한 명인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도 최근 ‘탈아파트’ 행렬에 동참했다. 그는 최근 지인과 함께 경기도 용인에 땅을 사들여 단독주택(사진)을 지어 올렸다. 박 교수로부터 사연을 들어봤다. _편집자

작가 김미월은 소설집 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이사(移徙). 어디론가 거처를 옮기는 일.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얼마나 다양하게 크고 작은 이사를 떠나는가. 이사는 존재가 머무르는 공간을 바꾸고 존재의 동서남북을 바꾸는 경험이다. 전이와 이행의 경험. 정주민에게 이사는 안락함과의 결별이며 유목민에게 이사는 심장을 뛰게 하는 모험의 시작이다.”

오랫동안 살던 ‘아파트’를 떠나 땅을 마주하고 접하는 ‘단독주택’을 지어 이사를 감행한 나는 그렇다면 정주민인가 유목민인가. 그 두 가지 모두가 아닐까 싶다. 단독주택으로의 이사는 안락한 가족만의 성채(城砦)와 결별을 의미하는 동시에 심장을 뛰게 하던 로망의 종착역을 향해 큰 걸음을 내딛는 것이기에 정주민의 삶을 은근히 기대하며 유목민의 꿈에 도전한 것과 다름없을 것이다.

» 박철수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가 지난 1월 입주한 경기도 용인의 단독주택. 그는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6년 동안 살던 아파트를 판 돈만으로 이곳에 집을 지었다. 건물의 설계는 조남호 건축가가 맡았다. 박철수 교수 제공

» 박철수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가 지난 1월 입주한 경기도 용인의 단독주택. 그는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서 6년 동안 살던 아파트를 판 돈만으로 이곳에 집을 지었다. 건물의 설계는 조남호 건축가가 맡았다. 박철수 교수 제공

베이비붐 세대의 아파트 전전기

흔히 베이비붐 세대로 불리는 집단의 구성원이기도 한 필자가 기억하는 잦았던 이사는 크게 1980년대를 축으로 그 앞과 뒤로 나뉘어 생각할 수 있다. 집주인과 마루를 공유하는 단독주택의 건넌방이나 소꿉놀이 정도가 가능한 크기의 부엌을 가진 문간방에서 안집 식구들과 더불어 생활하던 곳을 헤아릴 수 없이 전전했던 아동기에서 청년기까지가 1980년대 이전 상황이었다면, 결혼과 더불어 어머님을 모시고 전셋집을 돌아다니다 진짜 내 집을 가지게 된 뒤 아파트에서 아파트로의 이주 반복이 1980년대 이후의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움직임은 결코 개인의 주체적 의지가 발현해 벌어진 일이 아님은 물론이다. 적어도 주택이 시장에서 매매되는 물건이라는 점에서 도회인의 도리 없는 선택이었고, 시류에 편승할 수밖에 없는 별수 없는 가장이자 범부였기 때문이다.

단독주택으로 이주를 감행한 동기는 친구의 권유 때문이었다. 지금은 엄청난 크기의 집터 옆 살구나무를 경계로 윗집과 아랫집으로 나뉘어 일상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친구가 꽤 오랫동안 마당을 가지는 땅집을 꿈꾸다가 직접 실행에 옮기기 바로 전 과정에 나를 꾀었기 때문이다. 안락한 가족의 성채 속 친숙한 일상을 떠나 평온을 휘젓는 일은 비용의 문제를 떠나 자기 확신과 가족 구성원 모두의 동의가 필요한 지난한 설득 과정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친구의 권유로 친구가 눈여겨둔 집터를 함께 구경하고 돌아온 뒤 단독주택으로 떠나기 위한 나름의 이유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가장 그럴듯한 이유는 아파트와 달리 스스로 지은 단독주택은 늘 자라는 생명체이고 그런 이유에서 지나간 시간을 아름답게 반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기억의 우물이라는 것이었다. 땅을 보러 다니고 집을 짓는 과정을 살피고, 온갖 정성과 시간을 쏟아 가족들의 따사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놓으면 그것이 자라 집단 기억의 보물창고가 되리라는 것이었다. 공유하고 공감하는 시간과 사건을 기억하기에 아파트는 무언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아내와 두 딸들에게 집을 고정시키고 싶었고, 버섯의 포자 같은 삶을 느티나무처럼 한곳에 뿌리를 내린 거목의 삶으로 바꾸고 싶었다.

나쁘진 않지만 피로감 누적된

따라서 필자의 집짓기는 거개의 사람들이 항용 말하는 것처럼 아파트는 나쁜 집이고 단독주택은 좋은 집이라는 극단적 편가르기 생각에서 시작된 것은 전혀 아니다. 아파트만큼 한국인의 삶과 일상, 그리고 우리 사회의 가치를 당차게 받아낸 주택 유형은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아파트를 떠나 땅집을 지어 들어간 다른 이유는 묵직한 신문 사이에 끼워 배달되는 부동산 섹션의 아파트 가격 동향에 더 이상 일희일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파트에서 누적된 경험은 늘 어디론가 탈출이나 이주를 꿈꾸게 되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다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바라던 곳에 안착하기 무섭게 다시 이사에의 욕망이 꿈틀거렸던 불안정한 삶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롭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지극히 개인적인 이런 이유를 다른 보편적 경향으로 포장하기 위한 내심도 크게 작동했고, 가족들을 위한 설득의 도구로 이를 활용하기도 했다. 다름 아니라 아파트 생활의 피로감 확대가 여러 가지 증거를 통해 밖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나름의 주장이었다.

몇 가지를 꼽아본다면, 타운하우스의 등장과 선호도 확산, 블록형 단독주택에 대한 대중의 관심, 펜트하우스에 대한 열망, 도시 한옥에 대한 갑작스런 환호, 테라스하우스의 부동산 시장 가격 앙등 등과 같은 여러 가지 징후를 아파트가 가지고 누렸던 나름의 장점을 그대로 유지하며 무언가 다른 주택 유형을 찾는 경향으로 파악한 것이다. 이와 더불어 안팎을 상업공간으로 활용하는 크고 작은 커피전문점의 확산과 발코니와 테라스에 대한 기이할 정도로 열띤 찬사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과거의 발코니를 온전한 내부 생활공간으로 만들게 한 통상의 아파트와는 그 방향과 궤적을 달리하는 현상으로 받아들였고, 결국은 외부 공간 지향의 생활 욕구가 분출한 것으로 판단하는 동기가 되었다. 바로 이런 개인적 이유와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징후들을 내 집짓기의 동력으로 삼기도 했다.

살구나무집에서 오랫동안

그러므로 이웃과 더불어 이름 지은 ‘살구나무집’으로의 과감한 이주는 옳은 쪽으로의 방향 선회가 결코 아니라 부동산 시장이 제공하지 못하는 주택 유형을 개인적 이유를 들어 만들고 선택한 행위이며, 굳이 객관적 이유를 들라 한다면 아파트 피로 누증 현상에 대한 나름의 돌파구 모색이었다.

박범신의 장편소설 에 등장하는 말처럼 “집은 나의 고유한 공간이며, 그러므로 나와 동일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세대차이라고 지적한다고 해도 할 수 없다. 요즘 사람들은 집을 얼마짜리라는 교환가치로만 생각할는지 모르지만, 나에게 내 집은 나의 근거이고 유일무이한 피난처이고 중심”인 것이다. 마치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을 빌린 것처럼 보이는 이 문구는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을 좀더 어렵게 써놓았을 뿐이며, 결국은 나와 가족들의 마음의 안정과 생활의 평온을 통해 그리고 그악스럽게 살지 않으려고 선택한 지극히 개인적인 인생 유랑의 한 방편인 셈이다. 그래서 앞으로의 삶은 아마도 ‘살구나무집’에서 아주 오랫동안 계속될 것처럼 여겨진다. 더불어 자그마한 희망이 있다면 아파트 피로 누증 현상을 해소할 대안으로서의 새로운 주택을 기대하는 것이다. 딱히 단독주택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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