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일본이 천재에 인재가 겹쳐 고통받고 있다. 한국에서는 이웃 일본을 도우려는 움직임이 ‘달아올라’ 있다. 이런 현상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는 인지상정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니 뭐라고 폄하할 필요는 없다. 또 일본을 도우려는 것도 한국만이 아니니 이를 한국적인 현상이라고만 할 수 없다. 물론 한-일 양국의 일부 누리꾼 사이에서 상대방에 대한 욕설이나 중상의 소리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공감의 정서가 이런 소리를 압도했다. ‘타자의 감성을 정서적으로 공유하는 마음의 상태’를 공감이라 한다면, ‘이웃의 고통에 공감하는’ 도움의 손길은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국적 있는 원전, 국경 없는 방사능
그러나 한국 사회가 바깥 사회의 고통에 이 정도로 공감한 적은 내 기억에는 없다. 북한에 대한 식량 지원의 문제는 성격이 다를 수도 있으니 적절한 예가 되지 않을지 모른다. 하지만 불과 3년 전에 일어난 중국 쓰촨성 지진이나 1995년 발생한 일본의 한신대지진을 생각해보면, 이번 ‘일본 사태’에 대한 한국 사회의 관심과 지원의 움직임이 얼마나 ‘달아올라’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물론 사태의 피해 규모가 엄청난 점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하지만 피해 규모만을 가지고 관심의 높고 낮음을 설명할 수는 없다.
역시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유출이 한반도에 거주하는 사람들의 안위와 무관치 않다는 생각을 빼놓을 수는 없다. 이번 사태는 환경문제 등을 더 이상 ‘국경’ 안에 가두어둘 수 없다는 깨달음을 새삼 우리에게 던져준다. 원전 관리에는 ‘국경’이 있지만, 방사능에는 ‘국경’이 없다는 깨달음이다. 게다가 한국도 일본과 다름없는 ‘원전 대국’이니 일본 사태에 대한 공감은 구체적인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에 자리잡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왜냐하면 후쿠시마 원전 방사능 유출 가능성이 현실화되기 전부터 공감의 움직임이 이미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역시 한-일 관계의 변화 속에 공감을 푸는 열쇠가 있을 듯하다. 2000년대 들어 한-일 관계는 늘 긴장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민간 교류’가 늘어났다. 교류의 비대칭성은 여전하지만 관광·사업·유학 등을 통해 얼굴과 얼굴을 맞대는 교류가 일상화되었다. 이번 사태에서 사람들이 떠올린 것은 일본이라는 추상화된 국가가 아니라 얼굴을 맞대었던 일본 거주자들의 구체적 얼굴이다.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상상함으로써 지진·해일, 그리고 원전 피해 등을 재구성하고 이에 공감했을 것이다. 필자가 일본의 지인들에게 전화와 전자우편으로 연락을 취한 것은 고통받고 있을 지인들의 얼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 사회에 높은 관심을 가져다준 것은 공감이고 이 공감은 민간 교류의 산물이다.
한-일 갈등의 기본은 ‘일본 문제’
교류는 추상적 규범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정보·상품·돈 등이 오가는 이동의 문제다. 따라서 이동을 빠르고 싸게, 그리고 적은 리스크로 가능케 만드는 과학기술의 진화는 일상적 교류의 이유를 설명하는 데 빼놓을 수 없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서로를 찾고, 트위터·전자우편·페이스북 등을 통해 관계를 이어나가고 다져나간다. 일본에서 일어난 일은 같은 시간대에 한국의 안방으로 전해진다. 이런 진화된 과학기술을 이용해 공감의 유대가 퍼져나간다. 그런데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턱을 낮춘 과학기술은 안정적인 전기 공급을 필수로 한다. 전기의 안정적 공급은 원전에 의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일본의 고통에 공감하는 정서는 원전에 의해 가능해졌다고 볼 수 있다. 즉 공감은 과학기술의 진화에 의해 국경을 넘어서지만, 그 진화는 우리 삶의 기반을 송두리째 뒤흔든다. 공감을 통한 유대는 원전에 의해 만들어지지만 삶의 기반은 원전에 의해 파괴되는 역설에 우리는 직면해 있는 것이다. 인상적인 것은 원전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공감의 유대를 넓혀가는 것 이상으로, 원전 옹호론자들이 가지는 공감의 유대가 더욱 강건하다는 것이다. 일본이나 한국의 미디어에 등장해 후쿠시마 원전을 해설하는 사람들 거의가 원전 옹호론자라는 점에서 이를 알 수 있다.
<font color="#C21A8D">사태 수습 뒤 일본 사회는 이번 사태를 ‘국난 극복의 국민 이야기’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과 이어진 패전의 ‘잿더미’ 기억을 대지진 참사에 덧씌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다.</font>
이번 사태가 한-일 관계를 바꿀 수 있을까? 사실 이같은 물음은 지금 시점에서 다소 성급하다. 이런 물음에는 다음과 같은 전제가 깔려 있다. ‘한국 사람들이 이웃의 고통에 공감한다. 공감을 통해 기존에 가졌던 일본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꾼다. 그리고 많은 도움을 준다. 도움을 받은 일본 사회는 이런 도움에 감사하고 지금까지의 한국관을 바꾼다. 그래서 한-일 관계가 호전된다.’ 이런 선순환을 기대하는 것은 한-일 관계의 갈등이 서로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인식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일 간의 갈등은 기본적으로 ‘일본 문제’다. 물론 한국 사회의 일본 사회에 대한 ‘오해’가 한몫을 거든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 사회의 책임이 면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이번 사태로 역사교과서, 식민지 지배 책임, 전후보상 문제 등이 호전될 것이라고 기대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민간 교류가 상대방에 대한 오해를 불식시키고 국경의 벽을 낮추어 국가 간 관계를 호전시킬 수 있다는 것은 쉽게 듣는 ‘올바른 상투어’다. 만일 이 가정이 사실이라면 동아시아의 반목과 갈등을 설명할 수 없다. 민간 교류가 비약적으로 늘어났음에도 갈등과 반목이 줄어들었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도적 교류는 그 자체로 숭고한 것이지만 교류의 비정치성·탈정치성을 말할수록 그 교류는 매우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공감에 반응해 일본에 도움을 주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일이지만, 이런 흐름이 국가 간 관계를 바꿔놓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는 건 이미 정치적이다.
‘국난 극복의 이야기’가 불러올 후폭풍정당 체제의 유동화가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번 사태로 일본 사회의 정치적 향방은 더욱 불투명해졌다. 그래서 이번 지진이 역사적으로 일본열도의 ‘변경’이라 불린 동북지방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을 수 있다. 1930년대 이른바 군국주의자들의 발호가 동북지방의 빈곤을 배경으로 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런 과거의 경험을 현 상황으로 직접 끌어오는 것은 지나치게 몰역사적이다. 하지만 사태 수습 뒤 일본 사회의 정치적 향방이 우려스럽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필자는 과거에 소설과 영화로 만들어진 이라는 작품을 분석한 적이 있다. 은 ‘패전=국가 멸망의 위기’라는 역사적 기억을 ‘대지진=국토의 위기’를 통해 되살리려는 작품이다. 사태 수습 뒤에 일본 사회는 이번 사태를 ‘국난 극복의 국민 이야기’로 만들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1945년 히로시마·나가사키 피폭과 이어진 패전의 ‘잿더미’의 기억을 대지진 참사에 덧씌울 것이다. 이 과정에서 국민주의적 내셔널리즘의 목소리가 높아질 것이고 이런 목소리가 한-일 관계의 비대칭성을 더욱 악화시킬 것으로 보는 건 필자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이번 사태에 보여준 한국 사회의 공감이 일본 사회의 공감과 연동돼 한-일 간에 반복해온 비대칭적 관계를 극복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될 수 있는가 여부일 것이다. 물론 그 공감은 일본국, 일본인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일본열도 거주자들에 대한 공감이어야 할 것이다.
권혁태 성공회대 교수·일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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