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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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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잃어버린 리더를 찾아서

‘잃어버린 10년’ 경제 실패에 위기극복 리더십 부재까지 겹친 일본…

도호쿠 지진 계기로 전화위복 리더십이 나올까
등록 2011-03-23 14:57 수정 2020-05-03 04:26

2009년 말 는 일본 특파원 철수를 검토했다. 경비 절감을 위해서였다. 검토 뒤 유지하기로 결정했지만, 이 때문에 특파원 교대가 예정보다 몇 달간 늦춰졌다. 중국 특파원 철수는 고려되지 않았다. 앞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당시 는 특파원을 아예 철수시켰다. 일본 특파원이 아니라, 중국 특파원이었다. 10여 년 사이, 일본의 위상 추락과 중국의 부상을 상징하는 일이다. 한 선배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옛날에는 일본이 트렌드에서 앞서가 국내에서 소개되는 기사가 많고, 중국은 해괴한 불량식품처럼 해외 토픽성 기사나 나왔는데….” 그 사이 세상은 참 많이 달라졌다.

‘탈구입아’ 이어 ‘친미입아’ 등장

지금 일본은 최대 위기다. 폐허가 된 지진·쓰나미 피해 현장, 원전 사고로 연기가 치솟는 모습 등은 일본의 위기를 상징한다. 문제는 일본이 이번 재난 이전부터 위기였고, 이번 사건은 엎친 데 크게 덮쳤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일본은 이번 사태 이전부터 왜 위기였나?
언제부턴가 일본은 동아시아 등 국제 무대에서 목소리가 크게 줄어들었다. 거품경제가 붕괴된 1991~2002년 일본의 장기 침체 기간을 일컫는 ‘잃어버린 10년’의 영향이 그 원인으로 많이 꼽힌다. 곧 경제력 위축이 국가 위상 하락으로 이어졌다는 설명이다. 김성철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이렇게 분석했다. “일본이 세계화와 정보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뒤처졌다. ‘잃어버린 10년’을 지나면서 10년 넘게 뒤처지다 보니 국제 경쟁력에서 밀렸고, 경제력이 약화되면서 외교안보적 면에서도 위상이 약화되고 있다.” 결국 기존 경제사회 시스템이 변화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면서 한계에 봉착했다는 설명이다. 주요 2개국(G2)으로 성장한 중국의 급격한 부상에 견줘 상대적으로 일본의 위축이 더 커 보인다.

간 나오토 일본 총리(오른쪽)와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이 3월17일 중의원에서 본회의에 앞서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을 하고 있다.연합 AFP

간 나오토 일본 총리(오른쪽)와 노다 요시히코 재무상이 3월17일 중의원에서 본회의에 앞서 희생자를 기리는 묵념을 하고 있다.연합 AFP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세계질서 변화에 나름 적응을 시도해왔다. 일본은 과거 ‘탈아입구’(脫亞入歐), 곧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선진국을 지향했다. 1980년대까지 일본 정책은 아시아와의 연대보다는 미국 등 선진국과의 협조에 치우쳤다. 하지만 2001년 9·11 테러 이후 안보는 친미적 정책을 강화하면서 경제정책에서는 동아시아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중국을 의식한 이른바 ‘허브 앤드 스포크’(바퀴와 살) 전략이다. 과거의 탈아입구에서 이제는 ‘탈구입아’(脫歐入亞)를 시도하고 있다.

2008년 미국이 경제위기를 겪은 이후 미국에만 의존하던 경제의 한계가 다시 드러났다. 중국과 한국과의 협력 없이 생존하기 어렵다는 것을 일본은 절감했다. 특히 중국은 이제 일본이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양으로 삼았던 그 중국이 아니라, 미국과 함께 세계를 떠받치는 G2로 자리잡았다. 중국과 한국은 상승세가 예상되는 반면, 일본은 하락세다. 이 때문에 ‘친미입아’(親美入亞)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미국을 버릴 수 없지만 아시아에 더 무게를 둬야 한다는 주장이다. 2009년 8월 중의원 총선거에서 압승하고 출범한 민주당의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는 취임 직후 외교정책의 기조로 ‘아시아 중시’를 제시했고, 같은 맥락에서 ‘동아시아 공동체’ 논의가 달아올랐다. 일본이 이번 재앙 뒤 경제를 회복하고 재건하는 데도 미-일 동맹에만 의존하거나 독자적으로는 어렵다고 지적된다.

미숙한 민주당, 비협조적 관료들

과거 일본은 1930~40년대 ‘대동아공영권’ 건설을 20세기 외교의 틀로 내세우며 아시아 침략의 명분으로 활용했다. 이 때문에 일본으로서는 진정한 ‘입아’(入亞)를 위해서는 아시아의 신뢰를 회복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일본은 1950년대 후반에도 동아시아 공동체 구상을 꺼냈으나 미국이 반대했고, 아시아 국가의 반일 감정으로 벽에 부닥쳤다. 전진호 광운대 교수(국제협력학부)는 “과거를 한 번 매듭짓는 환골탈태가 필요하다”며 “일본은 ‘과거사’라는 폭탄을 안고 중국과 한국 등 동아시아와의 협력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했다. 결국 일본이 아시아로 돌아오는 ‘미래’를 위해서는 ‘과거’를 매듭지어야 한다는 얘기다.

<font color="#C21A8D">일본은 2001년 9·11 테러 이후 안보는 친미적 정책을 강화하면서 경제정책에서는 동아시아를 중시하는 정책으로 돌아섰다. 중국을 의식한 이른바 ‘허브 앤드 스포크’(바퀴와 살) 전략이다. 과거의 탈아입구에서 이제는 ‘탈구입아’(脫歐入亞)를 시도하고 있다.</font>

일본이 ‘잃어버린 10년’을 겪고 아시아와의 과거를 청산하는 데 실패한 이유에는 리더십의 부재가 자리잡고 있다. 일본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2001∼2006년)처럼 장수한 총리를 찾기 어렵다. 이후 일본은 총리 이름을 기억하기 어려울 정도로 채 1년을 못 넘기는 ‘단명’ 총리가 잇따랐다. 일본 민주당은 1955년부터 54년간 집권한 자민당을 물리치고 2009년 8월 중의원 선거에서 정권 교체에 성공했지만,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8개월 만인 2010년 6월 물러났다. 하토야마의 ‘과욕’에 스스로 발이 묶였다. ‘대등한’ 미-일 관계와 아시아에서 동아시아 공동체를 형성하는 균형외교를 추진한 하토야마 총리는 후텐마 미군기지 이전을 둘러싼 미국과의 갈등으로 물러났다.

민주당은 54년간 집권 경험이 없었고 미숙했다. 지도부와 의원 간에 발이 맞지 않으면서 관료들도 협조하지 않았다. 소비세 인상을 둘러싼 당내 찬반 논란, 하토야마 총리와 당내 실력자 오자와 이치로 전 간사장 사이의 갈등도 빚어졌다. 고이즈미 이후 총리의 정치적 영향력이 커진데다 연립정권 수립 뒤 총리의 정치력이 더 중요해지면서 총리가 자주 희생양이 된 것이다. 경기불황 역시 리더십 위기를 부추겼다. 하토야마 정권이 2009년 9월 탄생할 때 70%의 지지율을 넘어섰지만, 퇴임 직전인 2010년 5월에는 8개월 만에 19%로 떨어졌다.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오른쪽)가 지난해 6월 일본 의회에서 사임 의사를 밝힌 뒤 인사하고 있다.연합 AP

하토야마 유키오 전 일본 총리(오른쪽)가 지난해 6월 일본 의회에서 사임 의사를 밝힌 뒤 인사하고 있다.연합 AP

고이즈미는 대외정책 실패라는 비난에도 불구하고 국내적으로는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했지만, 하토야마와 간 나오토 현 총리는 그런 지도자의 카리스마 없이 조정자 수준의 리더십을 보였다. 특히 하토야마 정권은 대미관계 재정립에 실패했고 간 정권에서 복구하려다 보니 미국을 향해 고유한 목소리를 내기가 더 어려워졌다. 전진호 광운대 교수는 “대등한 미-일 관계는 보기 좋은 슬로건이지만 실천할 능력이 없는 상태에서 내세웠다”며 “구상이 무모했다기보다는 구상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정책 실행의 미숙함이 구상을 와해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리더십이 문제라는 것이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하토야마 정권에서 미-일 동맹을 재조정하려는 시도가 좌절한 뒤 미-일 동맹 재조정은 시기상조라는 생각이 퍼졌고, 대지진이 그런 생각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200년 이상 지속된 제도의 피로 상태”

일본 최고 지도자의 리더십 실종은 이번 위기 상황에서 드러나고 있다. 사태를 진두지휘해야 할 간 총리가 보이지 않는다는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다. 간 총리는 지진 발발 이전부터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지면서 사퇴 궁지에 내몰렸고, 재일 한국인에게 금지된 정치헌금을 받은 사실까지 드러났다. 이 때문에 일본 언론은 “정부의 무대책으로 불안이 증폭되고 있다”(), “정부 위기 대응에 일관성이 없다”(), “정보 공개가 너무 늦고 설득력도 없다”() 등 정부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있다. 일본 정부는 “안전에 심각한 문제는 없다”고만 되풀이하다가 “도쿄전력이 제대로 보고하지 않아 정보가 부족하다”며 책임을 전가하고 있다. 도쿄전력이 원전 피해 상황을 숨기는 등 일본의 고질병으로 지적되는 관료제 문제도 드러나고 있다. 이상훈 한국외국어대 교수(일본어과)는 “일본 시스템이 고도성장하고 근대화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20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제도적 피로 상태인 것은 확실하다. 의식이나 기존 시스템의 변화를 분석하고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어야 하는데 늦었다”며 “제도적 피로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게 관료제다”라고 지적했다.

동아시아 질서는 어떻게 재편될까

간 총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현 위기 상황에서는 한동안 간 총리 체제로 갈 수밖에 없다. 자민당이 무력해진 상태인데다 민주당 쪽 역시 대안이 없다. 간 총리의 최대 지원자이자 차기 총리로 거론되던 마에하라 세이지 외무상도 재일 한국인에게서 정치헌금을 받아 3월6일 물러났다. 오카다 가쓰야 간사장 정도가 차기 총리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전진호 광운대 교수는 “단기적으로는 통합된 리더십이 중요하니 사퇴는 거론되지 않겠지만 위기가 회복되면 정책 실수 및 위기관리 실패에 대한 책임 공방이 나올 테고, 간 총리 체제가 오래가기는 어렵다”고 내다봤다. 반면 김성철 연구위원은 “새로운 인물과 비전이 없다. 새로운 정치세력이 나타나서 ‘제3의 개국’을 이끌어야 하는데, 자민당으로 돌아가기도 그렇고 민주당에는 인물이 없다 보니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간 총리로 계속 갈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민주당이 스스로 정권을 내던질 리도 만무하다. 원전을 둘러싼 책임 공방이 정계 계편으로 이어질 수 있지만, 민주당이 분열되지 않는 한 대대적인 정계 개편은 기대하기 힘들다.

<font color="#C21A8D">“일본 시스템이 고도성장하고 근대화하는 데는 적합하지만 20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제도적 피로 상태인 것은 확실하다. 제도적 피로가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게 관료제다.”-이상훈 한국외국어대 교수(일본어과)</font>

일본은 1930년대 세계경제 대공황 때 군부가 정권을 장악하면서 태평양전쟁으로 번져갔지만 오늘날 일본이 다시 그런 전철을 밟기는 어렵다. 일본으로서 최상은 전화위복, 곧 이번 사태를 계기로 시스템을 점검하고 새로 마련하는 것이다. 김성철 연구위원은 “제3의 개국이든 개혁이든 새롭게 장기 침체 시스템을 벗어날 경제개혁을 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말했다.

실제로 1995년 한신 대지진 역시 위기관리 시스템이 정립되지 않아 정부에 치명상을 입혔다. 하지만 그 뒤 시스템이 정비됐던 만큼, 이번 위기 상황이 전화위복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이번 지진 이후 일본 안에서 손상된 시스템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고,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남기정 서울대 일본연구소 교수는 “일본이 전전 세대와 전후 세대로 구분하는 것처럼, 동일본 지진 전과 후로 시기를 구분할 정도로 이번 사건은 큰 사건이다. 국제적 네트워크가 어떻게 짜이고 일본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도 새롭게 짜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결국 민주당 정권의 운명은 원전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느냐도 중요하지만, 이번 사태를 돌파하고 전화위복의 계기로 삼는 리더십이 등장하느냐에도 달려 있다. 위기일수록 리더가 절실하고 빛나는 법이다.

김순배 기자 marco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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