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를 골라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없다. 태어나면서 나라를, 피부 색깔을, 성별을 선택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국적과 인종과 성별에 의한 차별이 부당한 것처럼, 부모가 누군지, 아버지가 무슨 직위에서 어떤 일을 하는지에 따라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게 공정한 사회다.
유명환 전 외교통상부(외통부) 장관은 딸의 외통부 계약직 특별채용과 관련해 특혜 의혹이 불거지자 “장관 딸이기 때문에 더 엄격하게 (심사)한 것으로 보고받고 있었다”고 해명했다. 행정자치부 감사 결과 사실이 아니었다. 유 전 장관이 그렇게 보고받은 것은 사실일지 몰라도, 외통부 고위급들의 엄격함은 엉뚱한 방향으로 작용했다. 장관의 딸이 경쟁자들을 제치고 특별채용의 관문을 통과할 수 있도록 채용 일정과 심사위원 구성 등이 맞춰졌다.
‘꼼수 특채’,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유명환 전 장관과 그의 딸을 위한 ‘맞춤형 특채’에 연루돼 인사 조처된 외통부 고위 간부들은 특별히 더 부도덕했을까? 새로 드러난 2006년과 2007년의 ‘꼼수 특채’를 기획하고 실행한 외통부 고위 인사들은 특별히 더 비윤리적이었을까?
은 이번 일을 계기로 외통부에 현미경을 들이댔다. 취재 결과 그들은 억울할 만했다. 다른 정부부처의 ‘공무원 가족’에 비해 유독 ‘외교관 가족’이 많은 외통부. 아버지와 아들, 딸, 사위, 며느리가 한 건물에서 같이 일하는 것이 다반사인 그들은, 그런 ‘외교관 가족’을 이루기 위해 ‘약간의 무리’를 했던 것을 대단한 비리인 양 여기는 언론과 많은 ‘평민’들의 비판을 오히려 의아하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 내막을 들여다보자.
1997년 ‘외무고시 2부’라는 제도가 생겼다. 특별채용을 제외하고 외교관이 되는 유일한 관문은 외무고시였다. 외통부를 제외한 정부부처의 5급 공무원을 뽑는 행정고시, 법조인을 선발하는 사법고시와 함께 외무고시는 ‘개천’에서 나고 자랐어도 ‘용’이 될 수 있는 등용문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외무고시 2부가 도입된 취지는 “우수한 재외동포를 외교관으로 유치하기 위해서”였다. ‘1부’라는 이름을 얻게 된 기존 외무고시가 1·2차 시험을 통틀어 11과목이었던 데 비해 2부는 영어를 포함해 6과목뿐이어서 상대적으로 시험 준비가 수월했다. 외국에서 초등학교 이상의 정규과정을 6년 이상 이수한 사람만 응시할 수 있었다.
우수한 재외동포를 외교관으로 채용하기 위한 외무고시 2부 도입 첫해 모두 5명이 선발됐다. 그런데 이 가운데 3명인 강아무개·김아무개·손아무개씨는 외교관 자녀였다. 재외동포의 사전적 의미가 ‘해외에 체류 또는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또는 한국 출신 인사’인 점을 고려하면, 해외 체류가 잦은 외교관의 자녀도 엄밀한 의미에서 재외동포로 봐줄 수는 있다. 또 전체 합격자 가운데 아주 일부만이 외교관 자녀였다면 별문제가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런데 2부 제도 도입 직후 해마다 전체 합격자의 절반 이상이 외교관 자녀였다. 공개채용 방식이긴 하나, 응시 자격이 제한된 탓에 아는 사람만 알았던 2부 제도는 결국 논란 끝에 2003년을 끝으로 폐지됐다. 2004년부터 ‘영어 능통자 전형’으로 바뀌었다. 홍정욱 한나라당 의원은 9월5일 '전·현직 외교통상부 장,차관 및 고위 공무원(3급 이상) 자녀의 외교통상부 및 재외공관 근무현황’을 발표하면서 “1997년부터 2003년까지 22명을 선발한 외무고시 2부 시험에서 9명이 전·현직 장차관 및 3급 이상 고위직 외교관 자녀”라고 밝혔다. 비율로는 41%였다. 그런데 시기를 2부 제도 도입 초기로 좁히거나 분모를 국회의원과 외통부 이외의 정부부처 고위 공무원 자녀로 넓힐 경우, ‘있는 집 자식들’의 채용 비율은 배 이상으로 높아진다.
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9월9일 외통부에 ‘전·현직 국회의원과 외교통상부를 포함한 행정부의 장차관 및 고위 공무원(3급 이상) 자녀의 외교통상부·재외공관 근무현황’ 자료를 요청했으나 외통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채용 과정이 특별했던 이들은 외교관이 된 이후에도 특별했다. 해외연수와 유학휴직, 인사 등에서 2부 출신과 외교관 자녀에게 특혜가 집중되면서 외통부에는 이른바 ‘로열패밀리’와 ‘못난 부모를 둔 외교관’이 명확하게 갈렸다. 이전에는 없던 연수와 유학휴직 제도가 새로 생기는가 하면 ‘로스쿨 금지령’이 풀렸다가 다시 묶이기도 했다. 그때마다 로열패밀리가 혜택을 입었다. 정말 우연인지 몰라도 로열패밀리는 외통부의 ‘꽃 보직’을 거쳤고, 로열패밀리가 아닌 외교관들이 가고 싶어하는 나라를 갔다.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관은 “다른 정부부처 공무원들은 출신 학교나 지역으로 뭉치기도 하는데, 외통부의 가장 강력한 ‘빽’은 하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가 말한 유일한 배경은 ‘외통부 고위 인사의 친인척’이다.
원래 1997년 2부 출신 외교관들에게는 해외연수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재외동포 출신이기 때문에 외국어(주로 영어) 구사 능력 향상을 주목적으로 하는 연수 대상에서 제외됐다. 합리적인 제도였다. 그런데 이들과 같은 시기에 들어온 1부 출신 외교관들이 해외연수를 가게 될 즈음 로열패밀리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2부 출신도 해외연수를 보내는 쪽으로 제도를 바꾸려는 움직임이었다.
제도가 바뀔 때는 언제나 그럴듯한 명분을 앞세우는 법이다. ‘학창 시절 영어와 외교관이 구사해야 할 영어는 차원이 다르다’ ‘통상 등 경제 영역처럼 영어 이외에도 외교관으로서 갖춰야 할 전문성을 기르기 위해 해외연수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해외연수의 취지가 무엇이냐를 두고 영어 능력 습득이냐 전문성 확보냐로 관점이 갈렸다. 개인적으로는 2부 출신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외연수 기회를 주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지만 결론은 그렇게 나지 않았다.” 외통부 사정에 밝은 다른 정부부처 공무원의 말이다.
결국 2부 출신들도 2002년부터 영어권 국가로 해외연수를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외통부 안팎에서 특혜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이후 2부와 영어 능통자 전형 출신 외교관은 영어 이외의 제2외국어를 사용하는 국가만 연수 대상지로 선택할 수 있도록 제도가 바뀌었다. 대부분의 로열패밀리들이 영어권 국가로 연수를 다녀온 뒤였다.
로열패밀리의 파워를 보여주는 사례는 무수히 많다. 아버지가 외통부의 고위 간부였던 강아무개씨. 1997년 2부 제도 도입 첫해 ‘유능한 재외동포’ 자격으로 외교관이 된 그는 해외연수를 가고 싶었으나 제도에 막히자 유학을 가기 위해 휴직을 신청한다. 유학휴직은 해외연수와 달리 예산으로 연수비를 지원하지는 않지만, 급여가 절반가량 지급되고 호봉 승급도 인정된다.
2부 출신에게 해외연수가 막혀 있던 시절, 강씨는 유학휴직이라는 ‘다른 길’을 찾은 것이다. 유학휴직은 공무원교육훈련법상 기관장의 재량에 따라 허용되는 제도지만 아무나 신청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 외통부는 잠재적 유학휴직 신청자가 많아 내부적으로는 이를 금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강씨에게는 유학휴직이 허용됐다. 그는 2년 동안 미국 대학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을 밟고 외통부로 복귀한다. 외통부의 ‘평민’들을 황당하게 만든 사건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이후 제도가 바뀌어 2부 출신에게도 해외연수 기회가 열리자 강씨는 다시 해외연수를 신청하고 2년 동안 연수를 간다. 로열패밀리가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씨와 같은 해 ‘유능한 재외동포’로 외교관이 됐던 손아무개씨도 로열패밀리의 힘으로 새 길을 개척했다. 2003년 손씨는 통상 2년인 유학휴직을 3년으로 늘려 미국 로스쿨에 진학한다. 당시는 해외연수로 로스쿨을 선택했던 외교관들이 새로운 길을 찾아 줄줄이 사직하자 ‘로스쿨 연수 금지령’이 내려져 있던 때다. 손씨의 로스쿨 연수는 이례적인 일로 받아들여졌다. 은 손씨의 3년 유학휴직이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확인하기 위해 외통부에 당시 인사위원회 자료를 요청했으나 받지 못했다. 손씨의 아버지도 잘나가던 외교관이었다. 그가 새 길을 열자 몇몇 외교관이 비슷한 처우를 요구했지만 묵살당했다.
로열패밀리라는 틀 말고는 해석이 되지 않는 특별한 일이 채용과 연수, 휴직에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외통부 직원이라면 대부분 가고 싶어하는 요직을 필수 코스처럼 거쳤다. 북미국, 북미유럽연합통상과, 주미대사관 등이다. 전직 외교장관을 아버지로 둔 홍아무개씨와 또 다른 전직 외교장관의 아들인 유아무개씨는 ‘해외연수→영사과→북미국 북미1과→주미대사관’으로 동일한 경로를 밟아 외통부 내에서 입길에 올랐다.
은 홍정욱 한나라당 의원이 발표한 30명의 명단을 토대로 이들의 현재와 과거 직책을 추적해봤다. 전직 장관의 아들인 홍아무개 서기관을 포함해 현재 북미국과 북미유럽연합통상과, 주미대사관 등에 근무 중인 전직 외통부 고위 인사들의 자녀는 모두 5명이었다. 30명 가운데 5명이니 비율로는 얼마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자리를 거쳐간 사람까지 포함하면 20명가량 된다. 북미국만큼 선호도가 높은 유엔, 중국, 일본 등의 근무지를 포함하면 그 비율은 100%에 가깝다. 외통부 직원은 대략 2천 명. 이 가운데 간절히 원하면서도 북미 관련 부서나 주미대사관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이가 적지 않다.
이 밖에도 ‘평민’의 상식으로는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 싶은 얘기들도 취재 과정에서 들을 수 있었다. 어느 장관은 아들의 합격을 위해 외무고시를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젊은 사무관들로 팀을 꾸려 예상문제와 답안지를 작성하도록 했고, 또 다른 장관은 사법고시를 준비하다 외무고시로 갈아탄 아들을 위해 시험 과목을 조정했다고 한다. 외통부 직원들은 사실로 받아들이는 전설 같은 일화들이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지켜봐온 유명환 전 장관 입장에서는, 학력과 경력을 겸비한 딸의 특채 때문에 야단법석을 떠는 ‘평민’들을 이해하기 힘들 수도 있다.
물론 외교관 가문 출신 외교관 모두가 특혜와 특권을 누리는 것은 아니다. 안전하지 않은 나라나 선호도가 높지 않은 나라를 임지로 자원하는 경우도 간혹 있다. 또 일찍부터 외국 문물을 익혀 영어를 잘하고 외국 매너에 익숙한 외교관 자녀들이 애초 외교관으로서 능력이 뛰어나다는 반론도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특혜와 특권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핵심은 배타적 순혈주의”문제는 로열패밀리에 집중돼온 채용과 인사, 연수에서의 탈법과 불법의 경계를 오가는 특혜가 몇몇 개인의 일탈이나 부도덕의 문제만은 아니라는 점이다. 외통부의 3급(부이사관) 이상 고위 간부 대부분이 외무고시 출신이어서 조직문화가 폐쇄적이라는 점, 한 번 인사발령을 받으면 본인뿐 아니라 가족 전체가 큰 영향을 받는 탓에 윗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부당한 지시를 받더라도 거부하기 힘든 문화가 강하다는 점 등이 외통부의 고질적인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홍정욱 의원은 과의 인터뷰에서 “핵심은 외통부의 배타적 순혈주의”라며 “끼리끼리 끌어주고 밀어주고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하면서도 외부의 비판과 견제에는 둔감하던 오만이 이런 사태를 빚게 했다”고 말했다.
새 외통부 장관의 하마평이 언론에 오르내리고 있지만, 이 가운데 과거의 적폐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있을까. 장관을 포함해 고위 인사 몇몇이 바뀐다고 고질적인 문제가 사라질까. 2010년 외통부는 벼랑 위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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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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