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는 지난 7월15일 백혈병 산재 사건을 자체 조사하기 위해 안전보건 컨설팅 회사인 인바이론(Environ)사를 주축으로 국내외 전문가가 참여하는 조사단을 꾸렸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럼에도 투자자가 직접 회사를 방문해 인권침해 문제를 살핀 것이다. 그 배경에는 삼성전자의 태도가 미흡하다는 평가가 작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전자는 앞서 8개 기관 투자자에게 보낸 한 장짜리 답변서를 통해 “독립기관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피고용인이 아픈 것과 (노동환경과는)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럼에도 피고용인을 중요하게 생각해 계속 노력할 계획이다. 세계 어느 기업도 퇴사한 종업원을 도와주는 경우는 없지만, 퇴사한 종업원이라도 건강 문제가 기업의 작업환경과 연관이 있다고 나오면 의료지원 등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며 기존 입장만을 반복했다. 이에 대해 APG 관계자는 “과거 인텔이 비슷한 사건에서 투자자에게 수백 페이지에 달하는 답변을 보내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고 이후 법원 판결과는 별도로 피해자에게 보상을 해준 것과 달리 삼성전자는 (노동자 인권보호에) 매우 소극적”이라고 평가했다. 또 “투자자 입장에서 삼성전자의 노동자 인권침해 문제가 계속된다면 지속 가능한 성장을 막는 매우 큰 위험 요소(리스크)가 될 수 있다고 판단한다”고 말했다.
#2. 포스코는 수년째 인도 오리사주에 세우려는 일관제철소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2005년 인도 오리사주와 30년간 사용할 철광석 채굴권을 얻고 연산 1200만t 규모의 일관제철소를 건립하는 투자양해각서(MOU)를 체결했다. 이에 따라 2010년까지 300만t 규모의 제철소를 세울 예정이었지만, 현재까지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 8월6일에는 인도 환경부가 산림권익법(Forest Rights Act) 위반을 이유로 토지 매입 등 모든 사업을 중단하라고 포스코에 요구했다고 현지 언론이 전했다. 포스코의 어려움은 제철소를 지으려는 곳에 사는 원주민의 반발이 주된 원인이다. 2007년 오리사주 정부가 원주민을 강제 이주시키려다 폭력 사태가 일어났고, 아직까지도 원주민과 시민단체가 반발하고 있다. 국내 시민단체 관계자는 “포스코가 처음부터 원주민의 인권을 생각하는 정책을 폈다면 이같은 어려움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사례는 국내 기업들도 ‘인권경영’에 힘쓸 때가 왔음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백혈병 산재 사건은 국내에서 발생한 일이지만 세계 시민단체는 물론 투자자들까지 관심을 보이고 있다. AMRC(Asia Monitor Resource Centre), ATNC(Asian Transnational Corporation Monitoring Network), 워크세이프(Worksafe) 등 15개국 62개 단체가 지난 4월28일 ‘삼성전자는 암 사망 책임을 인정하라’는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다.
다국적기업과 함께 등장한 인권경영 원칙
다른 기업들도 인권경영의 중요성을 실감하는 계기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LG전자는 올 초 스웨덴과 네덜란드의 비정부기구(NGO)인 스웨드와치(SWEDWATCH)와 소모(SOMO)가 작성한 중국 광둥성 공장에 대한 조사 보고서를 받았다. 2008년에 이어 두 번째다. 보고서에는 LG전자에 휴대전화 부품을 납품하는 광둥성 2개 공장의 노동환경에 대한 조사 결과가 담겨 있었다. 이 NGO들은 2007년 조사 때보다 노동환경이 개선됐지만, 불법적으로 연장근무를 하거나 20살 이상은 채용하지 않는 등 여전히 인권침해가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LG전자는 “2008년 해당 납품업체에 연락해 노동환경 개선계획을 세우라고 한 바 있다”며 “2010년에는 광둥성 공장을 비롯한 1차 공급업체는 물론 모든 하청업체들의 노동환경 개선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답했다. 스웨드와치와 소모는 LG뿐 아니라 노키아, 모토롤라 등에 부품을 공급하는 중국 내 업체들을 집중적으로 감시하고 있다. 이 밖에도 현대자동차, 한국타이어 등 많은 국내 기업들이 인권과 관련해 투자자와 시민단체로부터 다양한 요청을 받고 있다. 한국인권재단 정선애 사무처장은 “인권경영은 이제 기업이 피할 수 없는 대세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인권경영이란 개념은 다국적기업이 성장하면서 등장했다. 과거 인권은 정부 차원의 문제로만 다뤄졌지만, 웬만한 정부의 힘을 능가하는 다국적기업의 성장으로 기업 차원에서도 인권 문제가 대두됐다. 특히 제3세계에 투자한 기업들이 현지에서 인권침해에 연루되는 사례가 늘어나면서 인권경영을 촉구하는 국제사회의 목소리가 커졌다.
유엔은 2000년 글로벌콤팩트(UNGC)와 책임투자원칙(PRI) 등을 만들고 이를 담당하는 산하 기구를 세워 인권경영을 장려하고 있다. 글로벌콤팩트는 인권·노동·환경·반부패 분야에서 기업이 지켜야 할 10대 원칙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 인권에 관해 ‘기업은 국제적으로 선언된 인권보호 원칙을 지지하고 존중해야 한다’ ‘기업은 인권침해에 가담하지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글로벌콤팩트에 가입하는 것은 이같은 인권존중 원칙을 준수하겠다는 약속이다. 가입 기업·단체는 매년 이행 상황에 관한 보고서(COP)를 작성해 제출한다. 전세계적으로 135개국 8천여 기업·단체가 가입했고, 국내에서는 현대차·LG전자·KT·아모레퍼시픽·STX·신한은행·한겨레신문 등 177개 기업과 단체가 가입한 상태다(표 참조).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도 1976년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데 이어, 2000년 1차 개정을 통해 노동자 권리 존중, 아동노동 근절, 건강 및 안전 기준 충족, 개인정보 보호 등 인권경영의 가치를 강조했다. 2011년에는 2차 개정을 할 예정이어서 인권경영 요구 수준이 더욱 높아질 전망이다.
미국 대학생들의 ‘안티 코카콜라’ 운동
또 국제표준화기구(ISO)가 2010년 말 출범시킬 사회책임 표준규범인 ISO 26000도 인권보호에 큰 비중을 두고 △인권침해 위험 상황 예방 △인권침해 가담 지양 △차별 방지와 취약 계층 보호 △직장 내 기본 근로 원칙과 권리 등 기업이 지켜야 할 인권원칙을 상세히 규정할 예정이다.
업종별로도 인권경영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국제 전자업계에서는 2004년 ‘전자산업 행동규범’(EICC)을 만들어 기업 경영에서 노동자 인권을 보호하고 환경·윤리 등을 고려하도록 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를 비롯해 마이크로소프트, 인텔, HP, 소니 등이 가입했다. 통신업계에서는 SK텔레콤이 가입한 ‘세계 e-지속가능성 이니셔티브’(Global e-Sustainable Initiative)가 있다. 알루미늄·코발트 등 제품 원료로 사용되는 광물의 채굴·구매·유통 과정에서 인권침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강조한다. 또 에너지업계의 ‘안전과 인권에 관한 자발적 원칙’(Voluntary Principles on Security and Human Rights), 금융업계의 ‘적도 원칙’(Equator Principles) 등도 인권경영을 규정하고 있다. 이 두 원칙에 가입한 국내 기업은 아직 없다(각 규범·원칙의 내용은 상자 기사 참조).
미국 뉴욕대 학생들은 지난 4월26일 캠퍼스 안 코카콜라 제품을 금지하는 캠페인을 시작했다. 이들은 2005년부터 시작된 ‘안티 코카콜라’ 운동에 참여한 것인데, 현재 미국 내 50개 대학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 운동은 1989년 이후 콜롬비아의 코카콜라 공장에서 노조 간부가 잇따라 살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이에 항의하기 위해 조직됐다. 코카콜라는 2006년 글로벌콤팩트에 가입하는 등 뒤늦게 인권경영을 시도하고 있지만, 사건의 진상 조사에는 적극적이지 않아 계속 항의를 받고 있다.
반면 세계적 화장품업체 ‘더바디숍’은 인권경영으로 브랜드 가치를 높였다. 1976년 창업한 이후 인권보호와 동물실험 반대, 자아존중 고취 등의 가치를 기업 목표로 내세워왔다. 특히 1999년 ‘더바디숍 인권상’(The Body Shop Human Rights Award)을 제정해 2년마다 인권보호를 위해 노력한 단체에 30만달러씩 지원하고 있다. 덕분에 영국 소비자연합(Consumers Association)으로부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 2위로 선정되는 등 호평을 받았다. 더바디숍은 한국 등 60여 개국에 진출한 상태다.
인권경영 안 하면 투자도 못 받는다
중소기업들에도 인권경영은 위기이자 기회가 될 수 있다. HP, 인텔 등 세계적 대기업을 비롯해 많은 기업들이 거래 업체에 인권경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주철기 사무총장은 “파트너사로부터 글로벌콤팩트에 가입하지 않으면 지속적인 거래를 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듣는 사례가 많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분쟁지역인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생산되는 탄탈룸, 텅스텐 등을 사용하지 말아달라는 전자우편을 최근 수십 통 받았다. ‘이너프’(ENOUGH)라는 시민단체가 발송한 것으로, 수백만 명의 학살이 벌어지는 나라에서 생산된 원료를 쓰지 말아달라는 요구였다. 애플의 최고경영자(CEO)인 스티브 잡스 역시 이같은 요구를 소비자로부터 받은 바 있다고 밝혔다. 이처럼 인권경영 요구는 생활용품을 뛰어넘어 원재료 제공업체, 하청업체 등 제품 공급망까지 확장되고 있다.
여기에 책임투자(Responsible Investment) 원칙을 도입한 투자기관이 해마다 늘어나는 것도 인권경영 도입을 재촉한다. 책임투자는 투자자들이 투자 대상을 선정할 때 기업의 이윤 외에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는 정도를 고려하는 것이다. 한국사회책임투자포럼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책임투자를 하는 기금 규모는 2007년 기준으로 유럽 2조6650억유로(약 4235조원), 미국 2조7천억달러(약 3221조원)에 달할 정도로 크다. APG(규모 3100억달러)가 삼성전자의 반도체 공장 백혈병 산재 사건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것처럼, 이들 투자기관은 단순히 투자 여부를 결정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인권 개선을 촉구하는 행동에까지 나서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글로벌경쟁력강화포럼 안젤라 강주현 대표는 “소셜 미디어가 발달하면서 시민사회·언론·소비자·투자자들이 같은 업종이나 경쟁 기업들의 인권침해 및 인권경영 이행 결과를 손쉽게 비교하는 시대가 됐다. 기업들은 인권경영이 실제로 수익과 리스크, 경쟁력에 직결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인권경영의 필요성은 나날이 커져가지만 국내 기업들은 아직 국제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는 상태다. 국내 매출 50대 기업 가운데 글로벌콤팩트에 아직 가입하지 않은 곳이 28곳에 이른다. 가입 뒤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는 기업도 상당수다(표 참조).
전세계 46개 투자기관의 협의체인 ‘신흥시장 환경·사회·지배구조 정보공개 프로젝트’(EMDP)는 지난 4월 국내 10개 기업을 대상으로 ‘한국 기업의 환경·사회·지배구조 정보공개 현황’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2006년 이래 한국 기업의 기업사회책임(CSR) 관련 보고서 발간은 늘었지만 양과 질 면에서 개선의 여지가 많다”며 “특히 인권에 관해서는 거의 공개된 내용이 없거나 피상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조사에서는 삼성전자, 신한금융그룹, SK텔레콤, LG전자, LG화학, KT, 포스코, 하이닉스반도체, 한국전력, 현대차 등이 대상이었다.
걸음마 단계인 국내 인권경영
지난 2008년 국가인권위원회가 국내 주요 기업을 대상으로 한 ‘2008 주요 한국 기업의 인권정책 현황 분석과 한국형 기업인권 가이드라인 연구’를 위한 설문조사를 벌였으나, 질문을 보낸 100곳 기업 가운데 37곳만 답변을 했다. 응답을 거절한 기업들은 ‘관련 부서가 없어서’(26.2%), ‘너무 바빠서’(23.8%), ‘민감한 내용이어서’(19%) 등의 이유를 들었다.
그나마 단초는 나타나고 있다. 지난 6월부터 삼성전자, LG전자, 현대차, SK텔레콤, KT, 유한킴벌리, 유니베라 등 13개 기업이 국가인권위원회, 한국인권재단, 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주최로 ‘기업과 인권 포럼’을 진행하고 있다. 여기에는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국제민주연대, 좋은기업센터, 노동환경건강연구소 등 시민단체들도 참여하고 있다. 8월5일에 세 번째 회의를 연 이들은 올해 말까지 포럼을 진행해 그 결과물을 ‘한국 기업의 인권경영 사례집’(가칭)으로 발간할 계획이다. 한국인권재단 정선애 사무처장은 “국내 기업들은 아직까지 ‘굳이 해야 하나’라며 주저하고 있다”며 “기업이 인권경영을 중요한 경영전략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사회적 대화의 장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노력도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2000년 개정된 OECD의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에 따라 설치된 지식경제부 산하 NCP(National Contact Points)는 제 역할을 못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NCP는 국내 기업이 해외에 진출해서 발생하는 인권침해 문제를 조정하는 기구다. 지난 2008년 버마에서 슈웨 가스전 사업을 하는 대우인터내셔널과 한국가스공사에 대해 시민단체들이 “개발 과정에서 원주민들이 충분한 보상도 받지 못한 채 강제 이주를 당하고 있다”고 문제 제기를 했으나, NCP는 “다국적기업 가이드라인 위반으로 보기 힘들다”는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진보신당 조승수 의원실은 “NCP가 시민단체의 자료 대신 대우인터내셔널이 작성한 자료만을 토대로 판단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국제민주연대 관계자는 “한국 NCP가 다른 선진국과 달리 정부 관계자로만 구성된 데다, 외국인 투자 유치를 촉진하기 위한 지식경제부 외국인투자실무위원회가 담당하고 있어 인권침해 감시 역할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네덜란드의 경우 NPC는 4명의 독립된 전문가와 4개 정부 부처에서 파견한 공무원들로 구성된다.
이런 가운데 인권 및 환경 보호와 관련한 기업의 정보를 의무적으로 공개하는 법률이 추진 중이다. 박선숙 민주당 의원은 지난 7월 기업이 인권을 비롯해 노사관계, 지역사회 참여, 환경, 반부패 등에 대한 사회적 책임 활동을 의무적으로 공개하도록 하는 ‘자본시장과 금융투자업에 관한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세계은행이 지난 7월 발표한 ‘세계개발지표’(WDI)를 보면, 2009년 한국의 명목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8325억달러로 192개국 가운데 15위였다. 1996년 OECD에 가입한 경제 선진국이자, 글로벌콤팩트를 주도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배출한 나라다. 유엔과 OECD 등 국제사회가 추구하는 인권경영에 뒤처진 우리 현실이 더욱 초라하게 다가오는 이유다. 유엔 글로벌콤팩트 한국협회 주철기 사무총장은 “기업 활동 전반에 인권 요소에 대한 배려를 효과적으로 포함시키는 것은 지속 가능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업으로 커나갈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라며 “최고경영자(CEO)와 기업 중간관리층의 과감한 인식 전환이 필요한 시기”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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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훈 기자 ljh9242@hani.co.kr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참고 문헌: (국가인권위원회 펴냄), (한스 바이저 지음, 프로메테우스 펴냄), ‘인권경영의 모색: 쟁점과 비판’(조효제 지음, 2008년 9월호)
참고 사이트: 유엔 글로벌콤팩트(unglobalcompact.org), 유엔 책임투자원칙(unpri.org), 국제표준화기구(iso.org), 경제협력개발기구(www.oecd.org), MAKEITFAIR(makeitfair.org), GRI(www.globalreporting.org), SourceWatch(www.sourcewatch.org), 한국인권재단(www.humanrights.or.kr), 국제민주연대(www.khi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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