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정의는 어디에나 있다. 적과 맞닥뜨리면 애니메이션 주인공 세일러문은 이렇게 외친다.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 동네 놀이터에서 장난감 칼을 휘두르는 꼬마도 자신을 “정의의 사도”로 소개한다. 남녀노소 모두 서슴없이 정의를 말하는 시대에 ‘정의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낯설다.
삼청교육대와 10·27 법난의 악몽누구나 정의를 말하지만 아무도 정의를 명쾌하게 정의하지 못하는 역설의 1차적 책임은 어쩌면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있다. 아직도 ‘정의사회 구현, 선진조국 창조’라는 구호가 입에 착착 감기는 사람이라면, 그는 ‘전통’ 시대를 경험한 30대 이상일 가능성이 높다.
1980년 5·17 쿠데타로 사실상 정권을 접수한 전두환 신군부는 시도 때도 없이 정의를 부르짖었다. 이를테면 그해 6월18일 계엄사는 김종필·이후락 등 권력형 부정축재자 9명의 명단을 발표했다. 부정축재액이 853억여원에 이른다고 덧붙였다. ‘정의사회 구현’을 위한 조처라는 배경 설명이 뒤따랐다. 7월9일부터는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가 부패 공직자 숙청을 시작했다. 명분은 역시 정의사회 구현이었다.
정의사회 구현을 위해 국보위가 저지른 역사적 행패가 있다. 삼청교육대 설치였다. 국보위는 사회악을 일소한다며 6만여 명의 ‘불량배’ 등을 연행했다. 이들 가운데 4만여 명이 군대에서 원치 않는 ‘삼청교육’을 받았다. 시위에 참여한 노동·농민 운동가도 대거 끌려갔다. 최근 TV 드라마 가 소개한 것처럼 삼청교육이란 기합과 고문, 가혹한 노동 등으로 육체적 고통을 극대화하는 ‘순화교육’이었다. 그해 10월27일에는 계엄군이 전국 사찰에 난입해 승려 150여 명을 연행했다. 10·27 법난이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이 모든 조처가 정의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강조했다.
1980년 8월27일 체육관 선거를 통해 공식 출범한 전두환 정권은 ‘선진조국 창조’라는 국정지표 아래에 ‘정의사회 구현’과 ‘복지국가 건설’을 국정목표로 내걸었다. 1984년 1월17일 국회에서 이뤄진 그의 국정연설 일부다.
“질곡의 민족사를 청산하고 새 역사를 향해 떨쳐 일어선 제5공화국이야말로 폭력의 배제, 즉 평화와 정의가 그 행동지표가 되고 있다는 것을 본인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이와 관련하여 본인이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지향하는 선진국은 평화롭고 정의로운 사회, 즉 폭력이 없는 가운데 명랑하고 활력이 넘치는 사회가 되어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법과 질서가 파괴되는 사회 속에서 안정과 발전과 민생의 행복은 보장될 수 없습니다.”
전두환 정권은 이듬해 3·25 총선을 앞두고 여당을 새롭게 조직했다. 정의를 강조한 정권답게 여당의 이름도 ‘민주정의당’(민정당)이었다. 민정당은 당의 5대 이념으로 민족·민주·복지·통일과 함께 정의를 내세웠다. 전두환 정권은 아울러 누범자를 장기간 감옥에 가두는 사회보호법, 언론통제를 쉽게 하려는 목적의 언론기본법, 노동통제를 강화한 노동관계법을 새로 만들거나 고쳤다. 겉으로는 법질서를 강조했지만 ‘그들만의 정의’에 도전하는 세력을 압박하겠다는 의도였다.
‘코미디의 시대’ 시민은 속지 않았다
정의롭지 못한 방식, 즉 쿠데타로 집권한 뒤 정의의 이름으로 시민사회 세력을 탄압했다는 점에서 박정희 정권도 다르지 않았다. 1961년 5월16일 박정희 군부는 ‘국민 도의의 앙양’과 ‘국가 경제의 재건’을 주창하며 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 정권이 정의사회를 구현한다며 초법적 기구인 삼청교육대를 설치한 것처럼, 박정희 정권은 쿠데타 직후 ‘깡패 소탕’에 나섰다. 이정재와 임화수 등 대표적 정치깡패 혐의자들이 사형에 처해졌다. 퇴폐를 몰아낸다며 비밀 댄스홀을 급습해 춤추는 사람을 체포했다. 양담배도, 미니스커트도, 장발도 모두 사회악으로 간주됐다.
김대호 사회디자인연구소장은 “박정희 정권이 말한 ‘도의’란 정의와 같은 뜻”이라고 말했다. 쿠데타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 오른 박 전 대통령은 1962년 시정연설에서 본격적으로 ‘사회정의’를 강조했다.
“국가 사회생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한 모든 법령을 정비하여 사법 운영과 재판 및 검찰 업무에 적정을 기함으로써 국민의 권리 보장과 준법정신을 앙양케 할 것이고 형사정책의 합리적인 시행과 형화의 효율적인 운영을 기하여 사회정의를 구현할 것입니다. 치안에 만전을 기하고 사회악을 조성하는 각종 범죄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서 경찰 장비의 현대화와 과학적인 수사 방법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경찰 행정의 민주화를 도모함으로써 명랑한 사회질서를 유지하도록 노력을 할 것입니다.”
사회정의 구현이라는 혁신의 가면 아래 숨은 의도는 따로 있었다. 독재에 저항하는 반대 세력 봉쇄였다. 국민 도의 앙양과 용공세력 처단을 한 묶음으로 내건 박정희 정권의 진면목은 조용수 사장 처형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 독재정권은 저항하는 지식인과 언론인, 종교인의 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정의를 내세워 불의를 실천한 독재정권에 맞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만들어졌다. 박원순 희망제작소 상임이사는 1970~80년대를 가리켜 “대단히 불의한 과정을 거쳐 불의한 권력을 잡은 정권이 정의사회 구현을 외친 코미디의 시대”라고 말했다. 아울러 박 상임이사는 “시민이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언어적 유희에 휘둘리지 않았기 때문에 불의에 가까운 권력을 내쫓고 정의로운 정권 교체를 이룰 수 있었다”고 덧붙였다.
정의가 사라진 시대에 정의가 가장 유행했던 한국 사회의 경험을 돌이켜볼 때 최근 정의 열풍은 반갑지 않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의 견해다.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한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서전이 많이 팔리는 현상, 시민단체인 참여연대 회원이 급증하는 현상, 그리고 에 열광하는 현상은 모두 한국 사회의 상식과 정의가 물구나무서 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명박 정부가 ‘법질서’를 말하는데, 법질서라 하면 권력에 대한 통제가 우선돼야 한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현 정부는 오히려 시민에게 법질서를 윽박지르고 있다. 상식의 위반, 상식의 역전이다.”
중도실용→친서민→정의?종종 정의 열풍의 진원지로 지목되는 이명박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정의를 언급할 것으로 보인다. 8월로 5년 임기의 반환점을 돌고 있는 이 대통령은 집권 후반기의 국정운영 화두로 ‘정의가 살아 있는 공정한 사회’를 내세울 예정이다. 집권 초기 ‘중도실용’을 내세웠고, 2년차부터 ‘친서민’ 구호를 본격적으로 활용해온 그가 이제 ‘정의’를 꺼내들었다. 역사는 이명박 대통령의 정의를 어떻게 정의할까.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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