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한국콘텐츠산업협회에 굴지 기업 협찬금, 왜?

정인철 전 비서관 인맥이 활동하는 신생 협회에
기업은행·포스코·우리은행 등 6천만~1억원 후원 확인
등록 2010-07-23 21:21 수정 2020-05-03 04:26
신생 협회에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협찬금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 상암동 첨단산업센터에 있는 한국콘텐츠산업협회 사무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신생 협회에 국내 굴지의 기업들이 협찬금을 낸 이유는 무엇일까. 서울 상암동 첨단산업센터에 있는 한국콘텐츠산업협회 사무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국정 농단’ 논란의 중심에 선 박영준 국무총리실 국무차장과 가까운 인사들에게서 서서히 ‘돈 냄새’가 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냄새를 풍기는 곳은 한국콘텐츠산업협회(이하 협회)다. 협회는 박 차장이 이끈 선진국민연대에서 사무총장을 지낸 유선기 선진국민정책연구원(선진국민연대 후신) 이사장이 부회장이고, 선진국민연대 대변인 출신인 정인철 전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운영한 ㅋ사의 김아무개 이사가 사무처장으로 활동하는 단체다(819호 표지이야기 ‘메리어트 모임의 폭식 스캔들’ 참조) 그런데 정 전 비서관은 이석채 KT 회장, 정준양 포스코 회장, 윤용로 기업은행장, 이종휘 우리은행장, 민유성 산업은행장, 오연천 서울대 신임 총장 등과 서울 시내 ㅍ호텔에서 정례모임을 열고 참석자들에게 이 협회 후원을 요청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은 협회가 이 모임에 참석한 은행과 기업으로부터 받은 협찬금 일부를 확인했다.

‘정인철 정례모임’ 참석 5곳 중 4곳 협찬

협회는 지난해 12월9일 서울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치른 ‘글로벌 콘텐츠 포럼’과 ‘대한민국 콘텐츠 공모전’ 두 행사의 협찬금 명목으로 기업들한테서 돈을 받았다. 협회가 지난해 8월25일 한 업체에 보낸 협찬금 요청 공문을 보면, 협회는 두 행사에 각각 3천만원씩 모두 6천만원의 협찬금을 요구했다. 공문은 모두 6장으로 각각의 행사 협찬 계획이 3쪽씩 적혀 있다.

실제로 기업은행은 2009년 11월 협회에 6천만원을 준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기업은행의 ‘법인세 과세표준 및 세액 신고서’(이하 신고서) 가운데 기부금 명세서엔 이런 사실이 적혀 있다. 신고서는 기업의 최종 법인세를 결정하기 위해 1년 동안의 수입과 지출을 정리해 국세청에 제출하는 것으로, 개인으로 치면 연말정산 때 제출하는 서류라고 보면 된다.

그러나 기업마다 협회에 협찬금을 건넨 규모와 방식은 일률적이지 않았다. 우리은행과 포스코는 각각 1억원씩을 냈는데, 우리은행은 협회에 직접 후원금을 줬다. 포스코는 이 행사의 후원사인 를 통해 1억원을 전달했다. 협회 관계자는 “협찬금 액수를 정하는 기준은 모른다. 김아무개 사무처장이 얘기하면 그에 따라서 공문을 보냈을 뿐”이라며 “위에서 다 얘기가 된 내용에 따라 일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인철 전 비서관과의 정례모임에 참석한 기업·은행 5곳 가운데 산업은행을 제외한 4곳이 모두 협회 행사에 협찬금을 냈다. 모임에 참석하지 않은 SK텔레콤과 국민은행, NHN, 한전 등도 협찬사로 참여했다. 이 가운데 국민은행은 조재목 선진국민정책연구원 이사가 사외이사를 지냈으며, 유선기 협회 부회장이 행장 선임에 개입했다는 의혹을 받는다.

2008년 12월에 생긴 협회의 협찬사 리스트가 이렇게 화려한데다, 공교롭게도 정 전 비서관 모임에 참석한 기업·은행 대부분이 협찬사로 참여한 점에서 그 배경엔 정 전 비서관의 영향력이 자리잡고 있다는 의혹이 나오고 있다.

또 한가지 이상한 점은 애초 협찬사 명단엔 우리은행, 기업은행, 포스코가 포함돼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해 3월 ‘콘텐츠 공모전’ 응모를 알리는 공고문을 보면 정 전 비서관의 저녁 모임에 참석한 기업 가운데 협찬사는 KT가 유일하다. 그런데 8월25일 협회가 보낸 협찬 요청 공문엔 이 세 곳이 추가됐다. 다섯 달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다는 의심을 품을 만한 대목이다.

물론 정 전 비서관은 협찬사 쪽에 유선기 이사장을 언급하며 “잘 아는 형님인데 찾아가면 도와주시라”고 했다는 의혹을 부인하고 있고, 청와대는 아직 진위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유선기 이사장도 자금 지원을 거절한 은행장에게 “내가 누군지 알게 될 것”이라며 ‘협박성’ 발언을 했다는 의혹을 전면 부인하고 있다.

한국콘텐츠산업협회가 지난해 8월25일 한 업체에 보낸 협찬금 요청 공문(왼쪽)과 기업은행의 기부금 명세서. 한국콘텐츠산업협회는 두 행사에 각각 3천만원씩을 요구했고 기업은행은 6천만원을 줬다.

한국콘텐츠산업협회가 지난해 8월25일 한 업체에 보낸 협찬금 요청 공문(왼쪽)과 기업은행의 기부금 명세서. 한국콘텐츠산업협회는 두 행사에 각각 3천만원씩을 요구했고 기업은행은 6천만원을 줬다.

이석채 KT 회장 “준조세 요구 심각”

그런데 최근 주목할 만한 언급이 나왔다. “공직에 있을 때는 몰랐는데, 기업에 와보니 ‘준조세’ 요구가 심각하더라.” 지난 7월12일 이석채 KT 회장이 서울 광화문 올레스퀘어에서 열린 ‘중소기업 동반성장’ 선언 기자간담회에서 한 말이다. 정인철 전 비서관의 저녁모임에서 요청을 받아 협회를 지원한 것 아니냐고 기자가 묻자 나온 답이었다. 물론 “준조세 부담은 돈을 버는 대기업의 숙명”이며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해소하는 효과가 있어 대기업이 거부하면 사회적으로 더욱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전제가 깔려 있었다. 정치권이 기업에 돈을 요구하는 것을 그 나름대로 필요한 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기자의 질문과 이 회장 대답의 맥락에 비춰볼 때, 이 발언은 협회에 구체적으로 얼마나 지원했는지는 밝히지 않았지만, 정 전 비서관의 요구 때문에 돈을 지원했다는 것을 에둘러 시인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

한편 과 를 포함한 ‘후원사’ 명단 역시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는다. 문화체육관광부와 중소기업청은 각각 콘텐츠 공모전의 최우수상과 우수상에 ‘문화관광부 장관상’과 ‘중소기업청장상’으로 이름을 쓸 수 있게 해 행사의 신뢰도를 높였다. 대통령직속 미래기획위원회와 방송통신위원회도 후원 명단에 무게를 더했다.

그런데 협회의 행사 준비는 겉으로 드러난 ‘위세’를 따라가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가장 중요한 행사 날짜가 두 차례 변경된다. 3월엔 행사일을 2009년 9월9일로 알렸다. 그런데 8월25일 공문에선 11월18일로 두 달 넘게 늦춰진다. 그러나 진짜 행사는 12월9일에야 성사됐다. 시간이 변동됨에 따라 장소도 춤을 췄다. 애초 서울 밀레니엄힐튼호텔로 공지된 행사 장소는 신라호텔로 바뀌었다가 다시 밀레니엄힐튼호텔에서 열렸다.

협회 행사 준비는 ‘위세’에 못 미쳐

이는 같은 날 열린 딸림 행사로 종합편성채널 운영 방안을 논의하는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콘텐츠 산업의 활성화 방안’ 토론회가 추가로 잡히면서 벌어진 일로 보인다. 후원사인 와 이 모두 종편채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진 만큼, 여론 확산 차원에서 이런 행사를 잡은 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그러나 협회 쪽은 “호텔 예약 등 실무적인 부분 때문에 날짜가 바뀌었다. 일이라는 게 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게 아니지 않으냐”고 반박했다. 종편채널 토론회에 대해선 “답변 드릴 말이 없다”고 했다. 쪽은 “회사가 후원하는 행사가 한두 개가 아니어서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 행사 이름은 처음 듣는 것 같다”고 답했다.

언론단체나 콘텐츠 사업 관련 종사자들도 “어디?”라고 다시 이름을 확인하는 신생 협회를 굴지의 기업과 주요 은행이 후원하는 데 정말 아무런 ‘뒷배’가 없었던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협찬금을 낸 기업과 은행들은 왜 떳떳하게 후원금 액수를 공개하지 못하는 것일까? 협회가 받은 돈은 문서로 확인된 액수에 그치는 것일까? 남는 건 또다시 물음표다.



의혹의 진원지 ‘은행장·CEO 정례 모임’
오연천 서울대 신임 총장도 참석



정인철 전 청와대 기획관리비서관이 인사 개입과 민원 해결 창구로 운영했다는 의혹을 받는 은행장·기업 최고경영자(CEO)와의 ㅍ호텔 정례모임에 오연천 서울대 신임 총장도 참석한 것으로 확인됐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장으로 이명박 정부에서 ‘공기업 선진화추진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이 모임 참석 대상 중 한 곳인 산업은행의 사외이사도 맡았던 오 총장이 모임의 멤버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이 모임의 성격과 목적을 둘러싼 의혹은 더 부풀고 있다.
오 총장은 7월15일 과의 통화에서 “지난해 그 모임이 시작될 때 이석채 KT 회장이 오라고 해서 갔다. 내 전공이 재정학이고 김대중 정부 때부터 공기업 쇄신 관련 작업을 많이 했기 때문에 부른 것 같다”며 “(참석자들과) 잘 지내면 우리(서울대)랑 산학협력 하기도 좋을 것 같아서 갔다”고 말했다. 그는 이 모임의 성격에 대해 “만나서 서로 덕담 나누고 격려하는 자리였다. ‘노사 관계에 문제가 생길 때 사장이 폭풍을 맞고 쓰러지면 괜찮아지더라’고 누가 이야기하면 웃고, 다른 사람이 좋은 아이디어나 경험을 얘기하면 ‘아, 저런 건 배우자’고 얘기하는 분위기였다”고 덧붙였다.
정 전 비서관은 지난 7월12일 인터뷰를 통해 이 모임과 관련한 의혹을 부인하면서 “매달 한 차례 공기업 혁신에 대해 정보를 교류하는 목적이었고 이 자리에는 전문가도 참여했다”고 해명한 바 있다. 결국 이 ‘전문가’가 오 총장을 뜻한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전문가로서 오 총장의 역할은 그리 두드러지지 않았던 것 같다. “참석자들 가운데 내가 공기업 선진화추진 특별위원장을 했다는 걸 알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이석채 회장이 아이디어가 많으니까 주로 얘기를 많이 했고, 다른 CEO들한테서도 내가 많이 배웠다”는 게 오 총장의 얘기다.
그는 “정 비서관이 상황실장 역할도 하기 때문에 현장 이야기를 듣는 게 주요한 미션이라고 들었다. 언론에 보도된 것처럼 정 비서관이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는 자리는 아니었다”며 이 자리에서 정 전 비서관이 각종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도 부인했다. 오히려 “CEO들이 ‘금융위에서 대출 문제는 이렇게 해달라’거나 ‘경제 살리기나 청년실업 해결이 정부 방침이지만 현장에서는 제약 조건이 많다’는 이야기를 정 비서관한테 하면서 다른 청와대 수석들에게도 전해달라고 요청하기는 했다”고 말했다. 또 모임에서 논의된 정책 분야는 중소기업 상생 방안, 기업 내 탁아소 설치, 청년실업 해결, 고용창출 방안 네 가지뿐이었다고 했다.
오 총장은 “특별히 모임을 주도하는 사람이 없어서 만나면 수첩 꺼내들고 서로 편한 날로 다음 약속을 잡았다. 두어 달쯤 전 ‘(주로 만났던) 일요일엔 성당·교회도 가야 하니까 연말에나 한번 보자’ ‘서울대 총장 됐으니 공관에서 밥 한번 사라’는 이야기를 나눈 뒤론 안 만났다”고 덧붙였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