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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오와함의 교훈 “군 조사를 믿지 말라”

폭발 사고의 증거 감추고 희생양 만들기 나섰던 미 해군… 의회가 집요한 조사 끝에 치부 밝혀내
등록 2010-06-18 20:44 수정 2020-05-03 04:26

1989년 4월19일, 미국 전함 아이오와함의 포탑이 폭발했다. 47명의 군인이 현장에서 사망했다. 이후 2년6개월에 걸쳐 ‘진실게임’이 벌어졌다. 영국 서섹스대학에서 과학기술정책학 전공으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석광훈 녹색연합 정책위원은 “군의 독단적 조사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아이오와함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석 위원의 도움을 받아 아이오와함 사건의 전개 과정을 정리했다. 47명이 숨진 아이오와함 사건은 46명이 희생당한 천안함 사건을 이해하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_편집자

1989년 4월19일 아이오와함 2번 포탑의 가운데 포가 폭발하고 있다. 사고 직후 아이오와함 장교들은 병사들의 ‘현장 청소’를 지휘하며 증거들을 치워버렸다. 이 사진은 사고 당시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위키피디아

1989년 4월19일 아이오와함 2번 포탑의 가운데 포가 폭발하고 있다. 사고 직후 아이오와함 장교들은 병사들의 ‘현장 청소’를 지휘하며 증거들을 치워버렸다. 이 사진은 사고 당시를 찍은 유일한 사진이다. 위키피디아

군은 증거를 보존하지 않았다

오전 8시31분, 세 개의 포탑에 정위치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30분 뒤, 젊은 군인들은 사격 준비를 마쳤다. 1942년 취역한 낡은 배 아이오와함은 푸에르토리코 인근 해역에서 미 제2함대의 훈련에 참가하고 있었다.

9시33분, 1번 포탑이 사격했다. 그러나 재장전을 할 수 없었다. 규정에 따르자면 사격은 중단돼야 했다. 프레드 무살리 함장은 이를 무시했다. 함장은 2번 포탑에도 사격 명령을 내렸다. 1분여 뒤, 2번 포탑의 통신선을 타고 비명이 들렸다. “비상, 비상, 비상.” “이런 젠장, 화약이 불타고 있어.” 화급한 고함 소리는 오래가지 않았다. 1989년 4월19일 오전 9시53분, 2번 포탑의 가운데 포가 폭발했다. 1500도가 넘는 화염과 초속 610m로 날아간 파편, 그리고 장약 포장재에서 나온 유독가스가 군인들을 휘감았다. 2번 포탑에 있던 47명 모두 사망했다.

사고 직후, 아이오와함 장교들은 병사들의 ‘현장 청소’를 지휘했다. “최대한 정상적으로 보일 수 있도록” 2번 포탑의 안팎을 쓸고 닦았다. 손상된 각종 장비와 파편들은 바다에 던져 버렸다. 사고 다음날엔 2번 포탑 내부를 새로 페인트칠했다. 현장 사진은 찍지 않았다. 주검은 곧바로 수습돼, 헬기로 인근 해군기지까지 이송했다. 부서진 포탑을 제외하면 모든 증거가 치워진 상태로 아이오와함은 나흘 뒤 미국 남동부 노퍽 군항으로 돌아왔다. 군의 ‘현장 수습’은 사고 원인을 미궁에 빠뜨리는 결정적 이유가 됐다.

군은 ‘희생양’을 찾아 언론에 흘렸다

사고 당시, 아이오와함 근처에 있던 코럴시함에는 해군수사국 요원들이 타고 있었다. 군 관련 사건·사고 수사의 베테랑들이었지만 이들은 “아이오와함 사고(조사)에 참여할 필요가 없다”는 지시를 받았다. 대신 미 2함대 제독이 지명한 리처드 밀리건 해군 중장이 ‘비공식 초기 조사’를 맡았다. 이 분야에서 특별한 이력이 없던 밀리건 중장은 자신의 참모를 데리고 사고 다음날인 4월20일 아이오와함에 올랐다.

‘현장 청소’ 작업이 진행 중이었으나 비공식 조사단원들은 이를 막지 않았다. 1번 포탑을 지휘한 댄 마이어 대위가 “규정에 어긋난 화약을 과다하게 사용했다”고 증언했지만, 조사단은 이를 제지하고 그 발언을 진술 기록에서 지웠다. 조사단 가운데는 해군무기체계사령부의 조셉 미켈리 대위가 참여하고 있었다. 그는 아이오와함에서 사용한 화약·포탄·대포·화약 포장재 등의 생산과 조달을 책임지고 있었다. 조사를 받아야 할 사람이 조사에 참여한 것이다.

대신 해군은 절대로 자신을 변호할 수 없는 희생양을 골랐다. 5월 초부터 등 유력 언론이 병사 클레이턴 하트위그를 ‘용의자’로 지목하는 기사를 썼다. 하트위그는 2번 포탑에 있다 사망한 병사였다. 그가 다른 동료 병사와 동성애를 나눴는데, 군 지휘부가 이를 문제 삼자 불만을 품고 기폭장치를 들고 2번 포탑에 들어가 폭발시켰다는 내용이었다. 기사는 군 내부 ‘익명의 취재원’을 인용해 작성됐다. 이후 6주 동안 점점 더 선정적인 보도가 확산됐다.

군은 조사 주도권을 틀어쥐었다

밀리건 중장의 비공식 조사단은 ‘사전 정지’ 역할을 했다. 이들은 클레이턴 하트위그를 유력 용의자로 지목하고 있다는 점을 아이오와함의 장교·병사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리며 압력을 넣었다. 5월 초, 미군은 비로소 해군조사단(NIS)에 공식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새로 구성된 해군조사단의 단장 역시 밀리건 중장이었다. 초기 조사의 ‘의도’를 그대로 관철하겠다는 뜻이었다.

해군조사단은 하트위그의 개인 사물함에서 이라는 책을 발견했다. 내용 가운데는 기폭장치 제조법도 있었다. 조사단은 이 책이 하트위그의 ‘의도적 자폭’을 입증하는 결정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군대 외부의 협조도 구했다. 조사단은 미연방수사국(FBI)에 “기폭장치에 의한 의도적 폭발인지”에 대한 조사를 의뢰했다. 그러나 FBI는 관련 자료를 분석한 뒤, “기폭장치에 의한 폭발이라는 증거를 발견하지 못했다”고 통보했다. 조사단의 ‘가설’을 뒤집을 만한 내용이었지만, 그 내용은 조사 보고서에 반영되지 않았다. 불리한 근거를 묵살해버린 것이다.

조사단은 7월28일 60쪽짜리 보고서를 해군사령부에 제출했다. 8월 말, 해군사령부는 “일반인들은 믿기 힘들지 모르겠으나, 하트위그가 자폭했다는 점은 사실에 기초한 논리적이고 명쾌한 분석으로 입증되고 있다”며 보고서를 승인했다. 사건 발생 5개월이 지난 1989년 9월7일, 밀리건 중장은 미국 펜타곤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열어 조사결과를 발표했다. 한 달 뒤 해군은 아이오와함의 무살리 함장 등에게 지휘 소홀의 책임을 물어 ‘경고’ 처분을 내렸다. 47명이 사망했지만, 형사적 책임은 물론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군의 독단을 막은 것은 의회였다

‘군에 대한 시민 통제’의 원칙에 충실한 미 의회는 군 보고서를 신뢰하지 않았다.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1989년 11월 관련 청문회를 처음 열었다. 상원 군사위원회 의장은 민주당이 맡고 있었다. 그러나 청문회에는 훗날 대통령 선거에 나서게 될 존 매케인 등 공화당 의원들도 적극 참가했다. 의원들은 △장교·병사들의 훈련 상태 △화약의 종류 △화약 과다 사용 여부 △규정에 어긋난 사격 훈련 여부 △해군 조사 과정의 적합성 △해군 조사 보고서 결론의 근거 △조사 내용의 언론 유출 등에 대해 폭넓게 캐물었다.

청문회에는 미 2함대 제독과 조사단장은 물론 아이오와함 함장 및 부함장 등 주요 장교들이 모두 출석했다. 아이오와함에 승선했던 일반 병사들도 출석해 증언했다. 지휘관들은 하트위그의 ‘의도적 자폭’을 확신한다고 발언했지만, 동료 병사들은 하트위그가 자살할 이유가 없으며 “군 지휘부가 사건을 덮으려는 것 같다”는 의견을 밝혔다. 군 조사단 앞에서 입을 다물던 병사들이 의원들의 끈질긴 질의를 통해 비로소 속을 털어놓은 것이다. 미 상원 군사위원회는 1989년 11월부터 두 달 동안 6차례 이상 아이오와함 관련 청문회를 열었다.

“당신의 답변에는 비약이 있습니다. (군 조사 보고서에는) 과학적·기술적 설명이 없어요. 무기의 오작동을 입증할 근거도 없지만, (군이 주장하는) 의도적 폭발을 입증할 근거도 없잖아요.” 청문회 당시 민주당 아스핀 상원의원의 발언이다. 청문회를 진행하던 미 상원은 군 조사 보고서의 허술함을 발견하고, 1989년 12월 독자적 조사를 시작했다. 우선 미 회계감사원(GAO)에 군 조사 결과에 대한 ‘재검토’를 의뢰했다. 이와 별개로 폭발 원인을 규명할 공신력 있는 연구기관도 물색했다.

모든 가능성을 검토하고 과학적으로 입증해야 한다

미 의회는 미국 기술과학학회의 추천을 받아 국립 산디아 연구소에 특별조사를 맡겼다. 1949년 설립된 산디아 연구소는 핵무기 등의 안정성을 연구하는 기관이었다. 물리학 연구자인 리처드 슈워벨 박사를 비롯해 산디아 연구소 소속 과학자 40명이 조사팀을 구성했다. 이들은 이듬해 5월까지 450차례에 걸쳐 모형 실험을 벌였다.

그 결과 ‘기폭장치에 의한 의도적인 폭발’이 아니라 ‘화약 과다 사용에 따른 폭발’의 가능성이 더 큰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미 상원에 통보한 산디아 조사팀은 ‘실제 환경’에서의 실험을 해군에 요청한 끝에 관철시켰다. 해군과 함께 벌인 공동 실험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비슷한 시기, 미 회계감사원도 해군이 사건 초기 각종 증거를 없애고 진술 기록을 조작한 사실을 밝혀냈다.

관련자 모두의 진술을 다시 듣고, 과학적·기술적 실험을 수백 차례 거듭해 진행된 조사 앞에서 결국 해군도 물러섰다. 산디아 연구소와 미 회계감사원이 미 상원 국방위원회에 각각 보고를 마친 직후인 1990년 6월, 미 해군은 2차 조사단을 구성했다. 1차 조사를 이끌었던 밀리건 중장은 제외됐고, 대신 산디아 조사팀이 합류했다.

군 사고의 경우, 군으로부터 독립된 의회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5월24일 국회 천안함 침몰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서 박정이 민·군 합동조사단 공동단장이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군 사고의 경우, 군으로부터 독립된 의회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5월24일 국회 천안함 침몰사건 진상조사특별위원회에서 박정이 민·군 합동조사단 공동단장이 조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진실을 밝히려면 집요하게 조사해야 한다

2500만달러를 투입해 17개월에 걸쳐 진행된 2차 조사 결과는 1991년 10월17일 공식 발표됐다. 2차 조사단은 “(1차 조사 때 사고 원인으로 제시됐던) ‘의도적 폭발’은 없었던 것으로 밝혀졌으나, 이번 사고의 정확한 원인이 무엇인지는 특정할 수 없다”고 밝혔다. 아울러 혐의자로 지목했던 하트위그의 유족에게 “깊은 유감”을 표시했다.

미 의회의 집요한 청문회, 회계감사원의 독립적 조사, 그리고 과학자들의 엄밀한 분석 등은 해군의 1차 조사 결과를 뒤집었다. 사건 초기 결정적 증거를 없애버린 탓에 사고 원인을 최종 규명하진 못했지만, 군 당국의 치부를 낱낱이 밝혀내는 데 성공했다. 군 내부의 처벌 또는 문책은 없었으나, 관련자 대부분은 조사결과 발표 뒤 1~3년이 지나 스스로 퇴역했다. 해군은 ‘화약 과다 사용’이 사고 원인이라는 점을 공식적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지만, 이후 아이오와함 등을 퇴역시키는 한편 화약 과다 사용도 엄격히 규제했다.

이 사건을 연구해온 석광훈 녹색연합 정책위원은 “당시 해군의 1차 조사에만 3개월이 걸렸고, 산디아 팀의 조사에 다시 6개월, 해군의 2차 조사에 다시 17개월이 걸렸다”며 “1개월 만에 조사를 끝낸 천안함 사건에 대한 체계적 검증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국 국회는 뭐하나

산디아 조사팀을 이끌었던 슈워벨 박사는 1999년 펴낸 책 에서 “군 사고의 경우, 군으로부터 독립된 기관의 조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적었다. 체계적 검증의 권능은 의회에서 나온다. 그러나 국회 천안함 진상조사 특위는 지금까지 딱 두 차례 열렸다. 지난 5월24일 처음 열렸고, 감사원의 천안함 감사 결과 발표 직후인 6월11일 다시 열렸다. 민주당이 특위 소집을 요구했으나 한나라당 의원들이 집단 불참해 무산된 경우도 한 차례 있다.

특위에 참가한 최문순 민주당 의원은 “일단 특위 차원에서 생존자 면담을 비롯한 조사를 진행하고, 오는 9월 정기국회에서 국정조사를 통해 전면적인 재조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한나라당은 물론 민주당도 여러 의혹을 국회 차원에서 규명하려는 열의가 적다. 군에 대한 ‘시민통제’라는 국회의 권능과 의무를 스스로 접고 있는 형국이다. 국회를 우습게 아는 군의 자세도 문제다. 민주당 관계자는 “군이 특위가 요구하는 자료의 90% 이상을 내놓지 않아서 특위 활동에 어려움이 크다”고 토로했다.



조작을 밝힌 과학의 힘
검출 물질 분석으로 ‘의도적 폭발’설 뒤집어

2차 대전과 한국전쟁을 치른 아이오와함은 1958년 이후 ‘예비 전력’으로 분류돼 사실상 퇴역했지만, 레이건의 군비증강 정책에 따라 1984년 다시 상시 전력으로 배치됐다. 노후한 배는 함포의 전기시설, 유압 시스템, 장약 운반시설 등에서 많은 문제를 드러냈다. 그러나 미 제2함대 훈련에서 ‘성과’를 보여주고 싶었던 아이오와함 함장은 함포의 사정거리를 늘리기 위해 장약 분량과 포탄 중량을 바꿔 탑재했다.
사고 발생 뒤, 미 해군은 2번 포탑에서 사망한 병사 클레이턴 하트위그가 ‘의도적으로’ 화학 기폭장치를 장약 사이에 끼워넣어 폭발이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해군 조사단이 제시한 증거는 2번 포탑 포신에서 검출된 폴리에틸렌 테트라프탈산, 글리콜, 칼슘, 염소 등의 물질이었다. 보통의 포신에서 발견되지 않는 이런 폭발 물질의 존재가 누군가 의도적으로 기폭장치를 만들었음을 입증한다는 논리였다.
산디아 연구소의 과학자들은 이를 뒤집었다. 우선 화학 기폭장치의 존재를 입증하는 가장 유력한 물질이던 폴리에틸렌 테트라프탈산(일종의 플라스틱)이 실제로는 2번 포탑 잔해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을 발견했다. 해군 또는 해군 조사단이 ‘없는 물질’을 있는 것처럼 보고서에 써놓은 것이다. 그 밖에 글리콜은 탄피가 잘 빠져나오게 하려고 해군이 평상시에도 사용하는 윤활유의 한 성분이고, 칼슘·염소 등도 아이오와함의 다른 포신에서 똑같이 검출된다는 점을 밝혀냈다. 하트위그가 일부러 삽입한 기폭장치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아이오와함 포탑에 있던 물질이라는 이야기다. 이를 통해 산디아 연구소 조사팀은 “화학 기폭장치를 썼다”는 해군의 주장을 뒤집었다.
아울러 50시간에 걸친 슈퍼컴퓨터 분석 결과, 2번 포탑에 사용된 장약의 양이 해군 조사단의 보고서보다 8㎝ 더 많은 61㎝(포에 들어가는 장약의 분량은 그 두께로 측정한다)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이를 바탕으로 산디아 팀은 아이오와함에서 사용한 것과 같은 장약을 실제 포탑보다 작은 모형에 적재한 뒤 450차례에 걸쳐 충격실험을 했고, 과다 적재된 장약이 폭발로 이어진다는 점을 입증했다.
해군은 이런 과학적 근거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반발했다. 산디아 연구소 과학자들이 “그렇다면 2번 포탑과 동일한 조건과 크기의 실제 모형으로 공동 실험을 하자”고 제안했으나, 해군은 이 역시 거부했다. 결국 산디아 팀은 미 상원 군사위원회에 이 사실을 보고했고, 의회가 직접 강제해 공동 조사를 성사시켰다. 해군이 참가한 가운데 2번 포탑과 동일한 종류의 포신에 동일한 장약을 실어 사격 실험을 했더니, 18번째 사격 때 주변의 모든 장비를 날려버리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이 실험 직후 해군은 2차 조사단을 새로 구성했다.
해군은 2차 조사에서 같은 실험을 다시 했는데, 실제보다 장약을 줄이거나 충격을 덜 주는 방식으로 끊임없이 조작을 시도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장약이 조금 줄거나 충격이 조금 덜해도 충분히 폭발이 일어난다는 점이 추가로 입증됐다. 그럼에도 해군은 최종 조사결과 발표 때 과도한 장약 적재가 폭발의 원인이라는 점을 ‘완전히’ 인정하지는 않았다. 해군의 주장을 그저 ‘반증’하는 것조차 과학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불가능했던 것이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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