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인해.’ 사람이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다는 말은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열린 유엔기후변화협약(UNFCCC) 제15차 당사국회의(COP-15)에 딱 어울리는 말이다. 12월7일 회의가 시작된 첫날, 세계 각국에서 온 참가자들로 아침 일찍부터 회의가 열리는 코펜하겐 중심가 벨라센터 앞에 수백m 줄이 늘어졌다. 북유럽의 쌀쌀한 날씨 속에 협약 사무국에 참가 등록을 마치는 데만 짧게는 서너 시간에서 길게는 예닐곱 시간까지 기다려야 했다.
기후변화 ‘공로상’, 우크라이나·캐나다…
역대 최다 참가자를 기록했던, 2007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13차 당사국회의 때 참가자는 모두 1만828명이었다. 올해 초 덴마크 정부가 예상 참가자를 1만2천 명에서 최대 1만8천 명 수준으로 내다본 것도 이 때문이다. ‘꿈’이 너무 소박했다. 12월8일 주최 쪽이 발표한 ‘잠정’ 참가자 수는 모두 3만123명에 이른다. 기존 ‘최다 기록’을 3배 가까이 앞지른 게다.
이번 회의에 대한 관심은 비단 참가자 규모에 그치지 않는다. 공항과 지하철 등지에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의 얼굴을 넣은 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정책홍보 광고를 비롯해, “이제는 구체적인 활동을 해야 할 때”라고 적어넣은 덴마크계 세계적인 풍력업체 베스타스의 광고 등이 넘쳐난다. 지난해 폴란드 포즈난에서 열렸던 14차 회의가 참가자를 중심으로 조용히 치러졌다면, 이번 회의는 코펜하겐 전역을 들썩이게 하고 있다.
분위기가 달아오른 까닭이 있다. 이번 회의가 여느 때와 다른 시점에 열리기 때문이다. 1997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당사국회의에서 세계 각국은 온실가스 배출의 ‘역사적 책임’이 있는 선진개발국들이 온실가스를 1990년 대비 평균 5.2% 감축하는 것을 뼈대로 하는 ‘교토의정서’에 합의한 바 있다. 교토의정서는 체결 당시에도 선진국들의 배출량 감축 의무가 너무 낮고, 직접적인 감축이 아니라 탄소거래나 청정개발 체제와 같은 ‘유연성’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이번 코펜하겐 회의는 2012년 만료되는 교토의정서를 대체할 새로운 의정서를 도출해내기 위한 사실상 ‘마지막 회의’다. 협상에 임하는 세계 각국 정부는 물론 업계와 환경단체 등의 관심이 집중될 수밖에 없는 사세다.
공식 회의는 국가 간 협상을 중심으로 진행되지만, 매년 회의에서 실제 내용을 채우는 것은 비정부기구(NGO)다. 환경단체를 비롯해 각종 연구단체와 노동조합,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는 각국 원주민단체에 이르기까지 세계 각국의 NGO는 정부 간 회의에서 공식 발언권을 확보하고 있을 정도다. 올해부터는 농민과 여성·청소년 단체도 사무실 등을 지원받고 있다. 이들은 회의장 안팎에서 각국 정부의 협상 내용을 감시하고, 문제점을 지적하는 활동을 꾸준히 벌이고 있다.
대표적으로 전세계 500여 환경단체들로 이루어진 ‘기후행동네트워크’(CAN)를 들 수 있다. CAN은 회의 기간에 일간 소식지 (ECO)를 발행해, 전날 진행된 회의 내용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국제 시민사회의 입장을 발표한다. 또 회의 진행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친 나라를 선정해 매일 오후 6시에 ‘공개 시상’하는 행사를 열고 있다. 나름의 촌철살인이 숨겨져 있다 보니, 회의 참가자 사이에서 제법 인기가 있다.
회의 개막 첫날인 12월7일엔 기후변화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은 ‘모든 선진개발국’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튿날엔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계획을 ‘-20%’(1990년 대비 75%나 늘리겠다는 뜻)로 발표한 우크라이나가 선정됐다. 셋쨋날인 9일엔 캐나다와 크로아티아가 공동 1위를 차지했는데, 특히 캐나다는 온실가스 배출량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1990년이 “너무 먼 과거이니, 좀더 현재와 가까운 시기로 기준연도를 바꾸자”고 제안했다가 맹공을 당했다. 이 밖에 이날 CAN은 사상 처음으로 ‘오늘의 햇살’상을 선정해 발표했는데, 해수면 상승으로 나라 전체가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한 투발루가 첫 번째 수상국으로 뽑혀 박수갈채를 받았다.
빈집 찾아 기거하며 포럼 참석한 고등학생들정부 간 회의에 버금가는 NGO 간 회의도 진지하게 열리고 있다. 이번 회의를 앞두고 100여 개국 환경단체가 참가해 구성한 ‘클리마포럼’(Klimaforum)은 당사국회의가 열리는 벨라센터에서 버스로 20분 정도 떨어진 코펜하겐 중앙역 부근의 ‘DGI-비엔’이란 체육관에서 워크숍과 토론회, 영화 상영, 전시회 등을 하고 있다. 삼엄한 경계 속에 허리띠까지 풀고 검색대를 통과한 단정한 정장 차림의 각국 공무원들로 둘러싸인 벨라센터와 달리 클리마포럼 행사장은 공기마저 자유롭다.
위도가 높아 태양이 서서히 지기 시작하는 코펜하겐의 오후 3시께, 클리마포럼 행사장 정문 앞 도로에 주저앉아 준비해온 빵을 나눠먹고 있는 스웨덴 고등학생들은 이번 회의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이들은 “사흘 전 코펜하겐에 와서 버려진 빈집에서 먹고 자며 포럼에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버려진 집이나 공공시설을 점거해 사용하는 이른바 ‘스쿼팅’은 유럽 젊은이들이 종종 사용하는 시위 방법이자 숙박 해결책이다. 친구들끼리 코펜하겐에 왔다는 스웨덴 시민단체 ‘환경정의행동’ 소속 고등학생 활동가 샘 매츠손은 소감을 묻자 “회의 기간 중 수많은 다국적기업들이 코펜하겐에서 기후변화를 이용해 장사를 하고 있다”고 날을 세웠다.
기후변화의 구체적인 피해 사례를 고발하는 목소리는 클리마포럼 곳곳에서 들을 수 있다. 또 정부 간 체결하는 기후변화협약에 맞서 시민사회가 ‘민중의정서’(People’s protocol)를 만들기 위한 토론회 등을 잇따라 열고 있다. 필리핀 출신으로 네덜란드 환경단체 ‘IBON-유럽’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40대 활동가 댄 보르자는 “부자 나라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정부 간 협상은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며 “기후변화의 피해를 몸으로 받아내고 있는 남반구 저개발국가 시민의 목소리가 협약에 반영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벨라센터 옆은 ‘친환경 기업 엑스포’?교토의정서 체결 이후 당사국회의가 “환경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라, 각국의 경제적 실익과 기업의 이해를 대변하는 마당으로 전락했다”는 비판도 끊이지 않는다. 실제 공식 회의 장소인 벨라센터 옆에는 ‘친환경 자동차’를 자임하는 각국 자동차 업체의 쇼룸이 있고, 세계풍력발전협회도 매일 커피를 나눠주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벨라센터 출구를 지날 때면 역시 ‘친환경’을 내세우는 조명업체의 전시관을 지나야 한다. 흡사 ‘친환경 기업 엑스포’에라도 온 느낌이다.
“기후 변화가 아니라, 시스템 변화다.”(System Change, Not Climate Change) 클리마포럼 행사장 어디를 가든 흔히 볼 수 있는 이 구호는 인류가 개척해야 할 새로운 미래의 영감을 던져준다. ‘희망’은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거대기업 홍보관에 둘러싸인 채, 지나친 난방으로 겉옷을 벗고 있어야 할 정도인 벨라센터의 ‘온난화’한 공식 회의장은 아닌 듯싶다.
코펜하겐(덴마크)=글·사진 이헌석 에너지정의행동 대표 greenreds@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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