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도 우리처럼.’
국가 원수를 모욕하면 가혹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고위 공직자의 심기를 거스르면, 그에 상응하는 보복을 감수해야 한다. 잘나가는 언론사라도 예외일 수 없다. ‘반정부 세력’을 동정하거나 또는 그에 동조한다면, 국가의 안위를 위해 당신의 인권은 유보될 수 있다. 어이없는 상황에 화가 나지만, 한편으로 귀찮고 또 두려워진다. 이른바 ‘위축 효과’다. 하나 둘 내줘야 할까?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옛얘기 속 호랑이는 팔과 다리마저 내놓으라 했다. 그예 목숨을 집어삼켰다.
지난 10월13일 오전 서울 안암동 고려대학교 인촌기념관 1층 대회의실에서 조촐한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포럼아시아와 국제인권네트워크, 고려대 글로벌리걸클리닉 주최로 전날 방한한 프랑크 라뤼 유엔 의사표현의 자유에 관한 특별보고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이날 심포지엄의 주제가 눈길을 끈다. ‘사이버상 의사표현의 자유: 동아시아 지역의 실태와 과제.’ 타이·싱가포르·말레이시아에서 온 발표자 3명의 증언은 우리의 현실을 되짚어보게 했다.
‘미소의 나라’ 타이, 헌법상 권리를 하위법이 짓밟아
“타이 하면 그저 ‘미소의 나라’쯤으로 알고들 계실 거다. 하지만 지난 2006년 9월 군부 쿠데타로 탁신 친나왓 총리가 축출된 이후, 타이에선 정치적 긴장이 유례없이 높아졌다. 여론의 다양성도 실종됐다. 탁신 전 총리에 반대하는 ‘노란 셔츠’ 시위대와 그를 지지하는 ‘빨간 셔츠’ 시위대로 갈려 극한 대립을 하고 있다. 노란색과 빨간색 사이에 중간지대는 없다.”
첫 번째 발표자로 나선 타이 인터넷 대안매체 (prachatai.com)의 치라눗 프렘차이폰 사무국장은 시민운동 경험을 한 언론인이다. 지난 2004년 6월 언론인과 학자, 정치인, 시민운동가 등이 의기투합해 창간한 는 특히 언론의 자유 문제에 천착한 보도와 활발한 온라인 게시판 운영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이 매체가 별도 사이트로 운영하는 토론 게시판(prachataiwebboard.com)은 등록회원만 3만여 명에, 하루 평균 300~400개의 의견과 이에 대한 수천 개의 댓글이 올라오고 있단다. 타이의 인터넷 인구가 전 국민의 20%에 못 미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의 영향력을 가늠해볼 수 있겠다.
지난 2007년 쿠데타 세력이 개정을 주도한 타이 헌법도 제7장 45조에서 ‘개인과 언론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고 있다. 물론 ‘예외 규정’이 있다. 국가 안보와 공공의 안녕, 낯익은 문구다. 헌법 개정과 때를 같이해 제정된 국내보안법(ISA)과 컴퓨터범죄법(CCA)은 이를 위한 도구다. 상위법이 보장한 권리를 하위법이 짓밟고 있는 것도 낯설지 않다. 치라눗 국장이 소개한 정유업체 엔지니어 출신 수위차 타콜(34) 사건은 이들 법령이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세 자녀를 둔 평범한 가장인 수위차가 타이 특별수사국(DSI) 요원들에게 전격 체포된 건 지난 1월14일이다. 이내 방콕으로 이송된 그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법원이 세 차례나 보석 신청을 기각하면서 결국 체포 두 달여 만에 유죄를 인정했다. 그는 지난 4월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수위차를 ‘장기수’로 전락시킨 범법 행위는 뭘까? 치라눗 국장은 “인터넷에서 왕실의 정치 개입을 비판하는 동영상을 내려받아, 동영상 공유 사이트 ‘유튜브’에 올린 것이 전부”라고 설명했다.
왕실모독죄 비판 동영상 보냈다고 체포
컴퓨터범죄법은 ‘문제가 있는’ 콘텐츠를 게시한 인터넷 서비스업체도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치라눗 국장은 이 조항의 위력을 몸소 경험했다. 그는 “토론 게시판에 누군가 왕실과 관련된 소문을 다룬 글을 올렸다는 이유로 지난 3월 초 체포됐다”며 “다행히 당일 보석으로 풀려났지만, 사건은 지난 6월 검찰로 송치돼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10월16일 오전 는 “영국인 블로거에게 왕실모독죄 폐지를 촉구하는 동영상을 전자우편으로 보내준 혐의로 스물일곱 청년 낫 사타야폰피숫이 특별수사국에 체포됐다”는 기사를 머리에 올렸다. 지금도 어디선가 ‘호랑이’는 입을 벌린 채 고갯마루를 지키고 있을 터다.
“인권 측면에서 싱가포르는 따분하기 그지없다. 시위 자체가 불법이니, 아무도 시위를 하지 않는다. 그러니 경찰도 강제 진압할 필요가 없다. 전체 84개 의회 의석 가운데 82석을 1959년 이후 계속 집권해온 인민행동당(PAP)이 장악하고 있다. 모든 언론을 사실상 장악하고 있으니, 정치인 비판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 외신의 비판 기사는 ‘국내 정치 개입’이란 이유로 접근을 차단하거나, 아예 해당 언론사를 추방시킨다.”
푸념인지 탄식인지, 싱가포트 독립영화 감독 마틴 시는 쓰게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시 감독은 “싱가포르에선 표현의 자유에 대한 검열이 크게 세 단계로 나눠 이뤄진다”고 지적했다. 헌법이 보장한 표현의 자유를 제한하는 각종 하위입법이 첫 번째 단계다. ‘국내보안법·신문 및 인쇄물법·방송법·선동법·민사 및 형사상 명예훼손 규정·의회선거법·공공질서 방해법·공연 및 행사법·불온출판물법·영화법….’ 한번에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시 감독의 체험담을 들어보자.
싱가포르 영화법 제33조는 “싱가포르의 정치 인사 또는 정치 인사에 대해 왜곡된 견해를 줄 수 있는 모든 영화의 제작, 수입 배포 및 전시 행위”를 금하고 있다. 지난 2005년 시 감독이 내놓은 야당 지도자 치 순 주안의 삶을 다른 다큐멘터리 가 상영금지 처분을 받은 이유다. 시 감독은 “15개월에 걸쳐 여러 차례 당국에 출석해 제작비 출처와 내 정치적 성향 등에 대해 조사를 받아야 했고, 원본 테이프와 카메라까지 경찰에 넘겨야 했다”고 말했다. 조사 기간에 시 감독은 정치범이자 장기수인 사이드 자하리를 다룬 이란 또 다른 ‘문제작’을 완성했지만, 이 작품 역시 상영이 금지됐다. 시 감독은 “두 영화 모두 유튜브 등 동영상 공유사이트를 통해 몇십만 관객과 만났다”고 말했다.
두 번째 단계는 관련 법령에 근거해 정치적 의사표현과 관련된 각종 제한 규정을 수립·집행하는 정부 기관에 의해 이뤄진다. 명색과 달리 인터넷 통제에 앞장서는 미디어발전국(MDA)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 감독은 “무엇보다 강력한 것은 마지막 세 번째 단계의 검열”이라고 강조했다. 꽁꽁 묶여버린 표현의 자유, 그것에 좌절하다 어느새 익숙해지고 겁을 내다가 길들여진 시민들의 ‘자기검열’이 그것이다. 그는 “정치적으로 민감한 문제가 공개적으로 거론될 때마다 전화 도·감청과 전자우편 감시, 행적과 발언이 추적당할 것이란 불안감이 만연해 있다”며 “이 때문에 정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민감한 내용에 대한 활동과 발언을 회피하는 자기검열의 문화를 낳고 있다”고 말했다.
검열 시도에 맞서는 말레이시아 독립언론표현의 자유는 애초 타협이나 협상의 대상일 수 없다. 하나를 잃는 순간 모든 것을 내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다. 최근 정부의 검열 시도에 단호하게 맞서고 있는 말레이시아 인터넷 매체 (malaysiakini.com)의 싸움은 우리의 관심을 자극할 만하다. 1999년 11월 창간한 이 매체는 지난해 검색업체 구글이 선정한 말레이시아 1위의 뉴스 웹사이트다. 영어·말레이어 등 4개 언어로 운영되는 이 매체는 유료 회원제로 운영함에도 한 달 평균 3700만 건의 조회 수와 75만 건의 동영상 다운로드, 160만 방문자를 확보하고 있단다. 모든 인쇄매체와 텔레비전, 위성방송 운영을 정부가 관리하는 말레이시아에서 독립언론 의 존재감이 큰 것은 당연할 터다.
“말레이시아에선 공적기밀법·국내보안법·선동법 등 모두 35개 법령이 언론 통제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례 발표에 나선 이 매체 케이 카빌란 편집부장은 “여기에 1998년 통신 및 멀티미디어법이 새롭게 제정돼 온라인상의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고 전했다. 지난 8월 말 촉발된 말레이시아 통신·멀티미디어위원회(MCMC)의 검열 시도 역시 이 법에 기대고 있다. 사건의 전말을 들여다보자.
지난 8월28일 쿠알라룸푸르의 셀렝공 지방정부 사무소 앞에서 말레이족 주민들의 시위가 벌어졌다. 무슬림이 절대다수인 말레이족 집단 거주지역으로 힌두교 사원을 이전시키기로 한 지방정부의 결정에 항의하는 시위였다. 사무소 앞까지 1km 남짓 거리행진을 벌인 시위대는 힌두교도들이 신성시하는 소의 머리를 잘라 짓밟고 침까지 뱉었다. 이른바 ‘소머리 시위’다. 다민족국가인 말레이시아에서 이 사건은 자칫 인종 갈등으로 번질 수도 있는 사안이었다. 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현장 화면을 담아, 기사와 함께 동영상으로 보도했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시위 동영상은 삽시간에 조회 수 20만 건을 넘어섰고, 비난 여론이 비등했다. 하지만 9월2일 히샤무딘 후세인 내무장관이 일부 시위대와 면담한 뒤 기자회견을 열어 이들을 두둔하고 나서면서 논란이 엉뚱하게 번지기 시작했다. 의 관련 보도와 회견 동영상이 전해지면서 후세인 장관에 대한 비난 여론이 비등한 게 화근이었다.
정부 탄압에도 동영상 내리지 않아회견 이튿날인 9월3일 통신·멀티미디어위원회는 이 매체로 전화를 걸어 ‘소머리 시위’와 후세인 장관 기자회견을 담은 동영상 2건을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두 영상이 “공격적이고 불쾌감을 준다”는 게 이유였다. 쪽이 이를 거부하자, 이튿날엔 경고서한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회견 사흘 만인 9월5일 위원회는 전격 조사에 착수했다. 카빌란 부장은 “사장을 포함한 경영진은 물론 편집국장과 해당 기사 편집자, 기사를 작성한 현장 기자, 동영상을 찍은 영상 기자까지 모두 오렌 시간 조사를 받아야 했다”며 “서버 관리업체도 조사를 받았고, 동영상 보도와 관련된 모든 장비와 하드디스크, 서버까지 수색당했다”고 전했다.
사건이 커지면서 지지 여론도 모였다. 정치권에선 탄압을 중단하라는 성명을 내놨고, 시민사회도 지원활동에 팔을 걷어붙였다. ‘국경 없는 기자회’와 ‘휴먼라이츠워치’ 등 해외 단체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위원회는 여전히 조사를 진행 중이다. 카빌란 부장은 “위원회는 문제가 된 사이트를 차단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며 “조사 결과에 따라 최악의 상황이 올 수도 있다”고 무겁게 말했다. 그럼에도 타협은 없다. 하나를 내주면 모두를 잃게 된다. 10월16일 오후 현재까지 는 관련 동영상을 내리지 않고 있다.
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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