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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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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도층 ‘산토끼’를 잡아라

서구에선 보수·진보 노선 비슷해지면서 등장…
2007년 대선 때 늘어난 뒤 매력적인 ‘정치 마케팅’ 대상으로
등록 2009-10-02 10:43 수정 2020-05-03 04:25

‘중도실용’은 해리 포터가 징그러운 괴물 디멘터를 쫓을 때 쓰는 ‘익스펙토 페트로눔’쯤 되는 마법의 주문인가? 정치인들은 위기 때마다 중도를 노래하고, 중도실용을 내세운 이명박 대통령은 “구체적인 정책이 없다”는 비판이 번지는데도 지지율이 솟구친다. 그 이유를 찾을 방법 한 가지는 ‘중도’가 대체 무엇인지부터 이해하는 것이다.

중도층은 보수와 진보 두 정치세력 모두가 꼭 끌어들여야 하는 ‘정치 마케팅’ 대상으로 인식된다. 9월14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한나라당 중립·개혁 성향 의원들의 중도실용 토론회 모습. 사진 연합 김병만

중도층은 보수와 진보 두 정치세력 모두가 꼭 끌어들여야 하는 ‘정치 마케팅’ 대상으로 인식된다. 9월14일 국회 의원회관 소회의실에서 열린 한나라당 중립·개혁 성향 의원들의 중도실용 토론회 모습. 사진 연합 김병만

실질 문제 관심부터 백낙청의 ‘변혁 중도’까지

중도의 정의는 조금씩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중도는 이념보다 실리를 추구하는 세력으로 인식된다. 강원택 숭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변화를 거부하지 않지만, 과격하고 급진적인 변화보다 점진적이고 동의에 의한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을 중도로 본다. 강 교수는 9월14일 한나라당 중립·개혁 성향 의원들이 연 중도실용 토론회에서 “중도는 변화 과정에서 통합과 설득, 동의를 중시하며 이념보다 실질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변혁적 중도주의’를 강조하는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는 중도를 ‘분단체제 극복’이라는 변혁을 이루는 일종의 수단으로 간주한다. 이 때문에 중도는 분단체제 유지를 주장하거나, 체제 극복을 위해 과격 노선에 경도된 양 극단을 제외한 나머지가 된다. 그는 최근작 에서 “줏대 있는 중도세력이 되려면 한반도 차원의 변혁과 국내의 개혁 작업을 결합하는 일이 필요하다. 우리 사회의 합리적인 보수와 책임 있는 진보가 협력해 폭넓은 중도세력을 형성해야 된다”고 강조했다.

두 견해의 공통점은 중도를 진보와 보수 사이 중간 어디쯤으로 보는 게 아니라, 이념적으로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은 세력으로 본다는 것이다. 노동과 분배, 국가, 연대 등에 초점을 맞추는 세력을 진보로, 자본과 성장, 시장, 경쟁을 중시하는 세력을 보수로 분류하는데, 중도는 어느 한 극단으로 기우는 걸 원치 않는 세력이다.

중도의 필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한 건 1960년대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각 정당의 노선이 비슷해지면서부터다. 대표적인 사례가 토니 블레어 총리가 주장한 영국 노동당의 ‘급진적 중도’다. 주요 산업의 국유화 목표 폐지, ‘일하는 복지’ 도입 등 보수당의 정책기조를 접목한 새 노선으로 노동당은 18년 만에 집권당이 됐다. 미국 민주당 소속 클린턴 대통령은 공화당의 의제인 균형예산과 탈규제를 채택한 ‘삼각화 전략’으로 집권에 성공했고, 공화당의 부시는 민주당이 강조하던 교육 문제에 주목한 ‘온정적 보수주의’로 대통령이 됐다. 스웨덴엔 아예 농민이 중심이 된 ‘중도당’도 생겼다.

하지만 ‘포괄 정당화’라고 불리는 서구 정당의 이런 흐름은 진보·보수 양쪽이 각각 노동자와 자본가라는 확고한 지지층을 근거로 출발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양쪽이 자기 정체성에 기반해 노선·정책 경쟁을 벌이면서 더 나은 대안을 찾는 과정에서 나온 선택이라는 얘기다. 신진욱 중앙대 교수(사회학)는 “서구에선 전후 자본주의의 황금기라는 1950~70년대에 구축된 복지제도를 진보·보수 누구도 일정 선 이상으로는 손대지 않겠다는 합의가 있었다. 이 때문에 서로의 노선을 차용해 중도로 수렴되는 일이 가능했다”고 지적했다.

지지 정당·정치인 없을 때 늘어나

중도라는 개념은 실체가 없다고 보는 이도 있다. 의 저자 조지 레이코프는 “중도주의 세계관이란 결코 없으며, 중도는 정치적 이념이 아니다. 경제적으로는 보수적이면서도 사회적으로는 진보적인 것이나, 진보적인 국내 정책과 보수적인 외교정책을 동시에 지지하는 것은 특이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일이 아니다”라고 했다. 이념을 좌에서 우로 직선으로 펴놓고 볼 때, 한 사람이 모든 사안을 놓고 같은 지점에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중도는 ‘과도한 사회 안전망이 부른 도덕적 해이’라는 구호처럼 보수가 진보를 공격하고 부동층을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는 수단이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뭐가 됐든 중도가 정치인과 유권자 모두에게 매혹적이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는 유권자들이 자신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정당·정치인이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높을수록 스스로 중도라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진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한국사회과학데이터센터의 조사 결과를 보자. 자신이 중도적이라고 답한 사람은 2002년 30.4%, 2004년 37.8%, 2006년 47.4%로 늘어난다. 그런데 2007년엔 38.8%로 줄어들었고, 지난 5월 조사에선 39.8%로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다.

2002년은 대선을 앞두고 노무현·이회창 후보가 ‘진보 대 보수’로 팽팽하게 경쟁하던 때다. 중도가 적을 수밖에 없다. 2004년은 노 전 대통령 탄핵 역풍과 한나라당의 대선자금 ‘차떼기’ 문제로 보수가 열세에 처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보수 응답층이 중도로 돌아섰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마찬가지로 진보와 보수 어느 쪽도 확실한 대선주자가 부상하지 않았던 탓에 2007년엔 중도층이 급격히 늘었다가 ‘이명박 대세론’이 굳어진 2007년엔 도로 줄어든 것으로 볼 수 있다. 서복경 서강대 현대정치연구소 연구교수는 “정치적으로 경쟁하는 세력의 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으면 중도층이 늘어난다. ‘아무도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니 이도 저도 다 싫다. 내 정체성도 모르겠다’가 중도층의 성향”이라고 풀이했다.

이런 특성 때문에 중도층은 정치인에겐 꼭 붙잡아야 하는 ‘정치 마케팅’의 대상이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1992년 ‘뉴 DJ 플랜’을 비롯해 손학규 전 민주당 대표, 고건 전 총리,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한나라당 소장파 등 셀 수 없이 많은 정치세력이 중도개혁 혹은 중도실용을 강조한 것만 봐도 ‘산토끼’를 잡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절실했는지 드러난다.

흥미로운 건 중도를 내건 수많은 이들 가운데 ‘중도’로 꿈을 이룬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뿐이라는 점이다. 보수 정당 후보였던 이 대통령은 양극화, 빈곤, 중산층 몰락, 고용불안, 청년실업 등 전통적으로 진보 진영이 제기한 이슈를 ‘중도실용’이라는 슬로건으로 흡수했다. 이는 박근혜 전 대표의 강한 보수 이미지, 민주개혁 진영 후보의 지지부진함에 허공을 떠돌던 부동층에 제대로 먹혀들었다. 한나라당이 이제 수구꼴통·부패 정당이 아니라 새로운 비전을 주는 당이 됐다는 ‘탈색 효과’를 낸 것이다.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이념 과잉의 무능한 정부’로 낙인찍고, 이 대통령을 ‘민생 해결사’로 인식시키는 구실도 했다.

복지 이슈를 보수 프레임으로 해결

신진욱 교수는 “이 대통령의 ‘탈규제·민영화·친기업 정책 → 국내외 투자 활성화 → 경제성장 → 일자리 창출·국민소득 향상’이라는 해법과 도식은 기존 보수 진영의 주장과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이 대통령은 진보가 복지로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슈를 이런 방식으로 풀겠다고 나섰고, 진보·개혁 정부 들어 국민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는 광범위한 인식과 맞물리면서 지지를 얻게 됐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서랍 속에서 잠자던 중도실용을 이 대통령이 다시 꺼내든 이유가 분명해진다. 보수·중도층에 ‘이젠 진짜 서민·중산층을 위한 경제를 하겠구나’ 하는 기대를 심어주기엔 이만큼 매력적인 구호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당은 ‘신중도’를 핵심으로 한 ‘뉴 민주당 플랜’ 초안을 내놨다. 지난 대선·총선 참패 원인을 따져보고, 당의 노선을 재검토해보자는 1년여의 고민 끝에 나온 계획이었다. 뉴 민주당 플랜이 제시한 새 비전은 ‘지속 가능한 성장, 모두를 위한 번영’이었다. 합리적이라는 긍정적인 평가부터 보수가 되자는 얘기냐는 비판까지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검토가 이뤄지기 전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게 되면서 논의는 더 이어지지 않는 상태다.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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