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하고 싶지 않다. 소설이라니, 청년에게 소설을 쓰라고 권하다니, 나라의 기둥이자 소중한 일꾼들에게 삽질을 시키지는 못할망정 소설을 쓰라고 하다니, 차마 내 입으로는 그렇게 말 못한다. 내 목에 칼이 들어와(봐야 아는 일이지만서)도, 내 눈앞에 수천억원을 펼쳐놓는데도(흠, 이건 좀 구미가 당기지만, 원칙적으로는) 말할 수 없다. 청년이여, 사랑을 하라. 이건 가능하다. 백만 번 천만 번 말하고, 쫓아다니면서 말해줄 수 있다. 그런데, 소설을 쓰라고는, 아, 이 소설이라는 것을, 거참, 뭐랄까, 뭐라고 말해주기가, 참으로, 힘들다. 소설의 세계로 잘못 들여보냈다가는 비행청년이 되어 훗날 복수의 칼날을 들이밀지도 모른다. “어이, 형씨, 10년 전에 나한테 소설 쓰기를 추천하셨지? 내 인생 어떻게 할 거야?”라는 질문을 (깜깜한 골목에서) 받게 된다면 뭐라고 변명할 수 있을까. “그래, 이해한다. 네 인생을 허비했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말이다. 너는 인생에서 중요한 교훈을 얻은 거야.” “교훈? 무슨 교훈?” “인생은 하나뿐이라서 소설 같은 걸 쓰면서 함부로 낭비하면 안 된다는 교훈.” “닥쳐.” “네.”
낭비를 생활화해온 내가 한 일소설을 쓰기 위해서는 낭비해도 괜찮다는 신념이 필요하다. 인생을 낭비해도 괜찮다면, 시간을 낭비해도 괜찮다면, 종이를 낭비해도 괜찮다면, 코앞에 목적지가 보여도 돌아갈 마음이 있다면, 소설을 써도 상관없을 것이다. 낭비를 낭비로 느낀다면 곤란하다. 10년 뒤, 누군가에게 복수의 칼을 내밀지 모른다. 피 같은 시간에, 금쪽같은 나이에, 허무맹랑한 이야기나 생각하면서 세상에 있지도 않은 인간을 상상하고 있다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어렸을 때부터 낭비를 생활화해왔다. 시간을 절약한다거나(아니, 그 많은 시간을 왜?) 잠을 줄인다거나(아니, 푹 자도 시간이 남던데) 하는 일은 거의 해본 적이 없다. 아마 그래서 남들보다 더 쉽게 소설 쓰는 일에 매달릴 수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처음으로 소설을 쓴 것은 군대에 있을 때였다. 상병 때가 아니었나 싶다. 나의 보직은 의무병이어서 일반 병사와 다른 막사를 쓰고 있었는데(즉, 아무도 나를 감시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버리고 또 버려도 어디선가 새로운 시간이 날아와 바닥에 쌓이곤 하던 시절이었다. 저녁이 되면 우리는 병동에 앉아서 바둑과 장기를 두거나 농담을 하면서 어디선가 날아오는 새로운 시간들을 하염없이 죽이고 있었다. 죽어라, 죽어라, 죽어라, 시간은 더디게 흘렀고, 밤은 겁나게 길었다. 나는 소설을 썼다. 낭비하는 심정으로 소설을 썼다. 낭비해봤자 본전이었다. 낭비하는데도 시간은 낭비되지 않았다.
어떤 소설이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아마도 당시 열심히 읽던 무라카미 하루키풍이 아니었나 싶은데) 여러 병사들이 신나게 돌려 읽었던 걸로 봐서 속도감 넘치는 소설이 아니었나 싶고, 한번 빌려가는 데 담배 한 갑을 지급했던 걸로 봐서 군데군데 야한 장면도 있지 않았나 싶은, 작품이었다. 표지도 직접 그렸고, 맨 뒤에다 작가의 말도 썼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부대의 베스트셀러 작가였던 나는, (을 쓴 샐린저처럼) 한 작품만을 남기고 돌연 작품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어이, 김 병장, 소설은 무슨…, 제대해야지.”
삶이 바뀌었냐고? 어떻게 알았지!제대하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다. 제대하고 나서도 시간이 많았다. 복학했는데도 시간이 많았다. 시간이 많았으므로 별의별 소설을 다 썼다. 한 문장이 세 페이지를 넘는 소설, 남녀 주인공이 절대 만나지 못하는 소설, 대사만으로 이뤄진 소설, 대사가 하나도 없는 소설, 이런 말도 안 되는 소설을 줄기차게 썼다. (아, 역시 역사 속 모든 실험정신의 핵심은 남아도는 시간인가.) 24살에 시작해서 30살에 소설가로 데뷔했고, 39살이 될 때까지 소설을 쓰고 있다. 책도 두 권이나 냈고 (남들은 말한다. 10년 동안 두 권밖에!) 쓰고 싶은 소설을 여전히 쓰고 있다. 시간을 쪼개서 소설을 쓰는 일은 거의 없고, 여전히 남아도는 시간을 버리고 버리면서 소설을 쓰고 있다. 종종 생각한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시간이 많을까. 주위에선 시간이 없다고 난리들인데, 어째서 나는 시간이 많을까. 답은 간단하다. 시간 말고 다른 걸 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낭비라는 건 관점의 차이일 뿐이고, 버리는 대상의 차이일 뿐이다.
가끔 그런 질문을 받는다. 소설을 쓰면서 당신은 어떻게 바뀌었냐고. (속으로) 깜짝 놀란다. 바뀐 걸 어떻게 알았지? 맞다. 바뀌었다. 나는 소설 덕분에 바뀌었다. 달라졌고 (내가 보기에) 조금은 나은 사람이 됐다.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해 조금 더 관심을 가지게 됐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조금 더 열심히 듣게 됐다. (단편이든 장편이든) 한 편의 소설을 끝내려면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한다. 주인공을 죽일지 살릴지, 왼쪽 길로 보낼지 오른쪽 길로 보낼지, 사랑에 빠지게 할지 배신하게 할지, 선택해야 한다. ‘그리고’라고 쓸지, ‘그러나’라고 쓸지, ‘그런데’라고 쓸지 선택해야 한다. 무수히 많은 선택을 썼다가 지운다. 나는 그 무수한 선택들을 거쳐왔다. 나는 그게 내 삶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의 선택과 현실 속의 선택은 분명 다르지만 선택하기 위해 결정하는 방식은 언제나 똑같다. 하나를 취하면 하나를 버려야 한다. 버린 것은 돌아보지 말아야 하고 취한 것은 아껴써야 한다.
조금 고쳐서 말해야겠다.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에게는 소설 쓰기를 권하고 싶지 않다. 소설은 투입하는 시간만큼의 결과물이 나오는 작업이 아니다. 모든 게 더디고, 아주 조금씩 전진하고, 가끔은 (이런, 제기랄!) 뒤로 가기도 한다. 문장들을 이어붙여 문단을 만들고, 문단을 쌓아서 흐름을 만들고, 흐름을 엮어서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도와주는 사람도 없다. 혼자 모든 걸 조사하고, 혼자 책임지고, 혼자 기뻐해야 한다. 하지만 낭비해도 좋은 사람에게는, 다른 걸 버리고 시간을 얻은 사람에게는 이보다 더 신나는 작업이 없을 것이다. 한 문장 다음에 올 수 있는 문장은 무한대다. 무한대의 가능성 중에서 오직 나만이 선택할 수 있다. 오직 한 사람만이 모든 걸 조절할 수 있다. 그 쾌감은 소설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해서 마지막 마침표를 찍어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번 빠지면 그 중독에서 헤어 나오기가 쉽지 않다. 내가 알기론 불가능하다.
10년 뒤 밤길에서 만나지 않기를여기까지다. 소설을 게으르게 쓰는 사람치고는 말이 너무 많았다. 내가 할 수 있는 얘기는 다 했다. 나는 공식적으로는 (절대!) 소설 쓰기를 권하지 않았다. 10년 뒤 밤길에서 만나는 일 없기를 바란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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