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은 사람들의 마음속 바람을 상징한다. 그래서 촛불을 든 사람들을 만나면 촛불에 어떤 애타는 사연이 담겼는지를 물어보는 게 인지상정일 터다. 그러나 지난해 5월 광장에 모인 촛불들을 본 이명박 대통령은 참모들을 질책하고 나섰다. “촛불은 누구 돈으로 샀는지 보고하라”는 것이었다. 참모들이 양초 유통업계를 탐문하고, 신용카드 회사를 통해 촛불 대량구매 내역을 확인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지난 1년간 시민사회의 ‘돈줄’을 막으려는 ‘보이지 않는 손’의 집요한 노력만은 우뚝했다.
촛불집회에 참여했던 시민사회단체들은 지금 정부와 기업 양쪽에서 자금 지원이 말라버린 형국이다.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은 정부가 “불법·폭력 시위 단체엔 예산 지원을 할 수 없다”며 명시적으로 시민사회단체들에 ‘선전포고’를 했다면, 기업들은 정부의 눈치를 살피느라 사회공헌 사업을 축소하는 형국이라고 전한다. 국내 10대 그룹 중 한 곳의 사회공헌 활동 담당 임원은 “청와대나 국정원에서 특정 시민단체를 지원하지 말라고 직접 지시하는 경우는 드물 것”이라며 “다만 지난해 하반기부터 특정 시민단체에 대한 지원 내역 및 이유를 밝히라고 국정원으로부터 전화를 받은 기업들이 많은데, 기업 입장에선 엄청난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박원순 변호사가 만든 희망제작소와 함께 어려운 이웃들의 자활을 돕겠다며 2007~2008년 여러차례 보도자료까지 뿌렸던 하나은행은 사업 추진을 질질 끌어오다 최근 300억원 지원 약속을 아예 철회한 것으로 드러났다. 하나은행이 희망제작소와 함께 추진한다던 마이크로크레디트(제도권 금융에서 소외된 빈곤층 등을 위한 무담보 소액대출) 사업의 방향을 튼 과정은 의문투성이다.
이미 10억여원 대출 진행했는데…애초 하나은행은 자신들이 출연한 하나희망재단이 300억원의 규모의 하나희망펀드를 조성하고, 사업의 실질적인 콘텐츠는 희망제작소 산하 소기업발전소가 맡는다고 밝혔다. 창업을 희망하는 사람이 소기업발전소에 대출을 신청하면, 소기업발전소는 사업 아이디어, 사회적 영향, 성공 가능성 등을 고려해 대출 여부를 결정하고, 하나희망재단에서 최종 승인 뒤 대출을 해주는 형식이었다. 2007년 처음 사업 관련 협약을 맺고도 지지부진하던 이 사업은 지난해 9월 하나희망재단이 출범하면서 어려운 걸음마를 뗐다. 지난해 말까지 재단과 희망제작소는 이미 50여 명의 창업 지원자에게 10억여원을 대출해준 상황이었다.
양쪽은 대출액 한도와 이자 수준을 놓고 약간의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었지만, 박원순 변호사가 올초 이사회 직전 하나은행장 등을 만나 ‘양쪽의 의견을 반씩 절충해 사업을 진행하자’는 합의를 이뤘다.
은행장까지 나서 두 기관의 협력을 지속시키기로 ‘의기투합’했지만, 사정은 엉뚱하게 흘러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은행 쪽에서 하나희망재단 이사회가 희망제작소와의 공동사업 안건을 부결시켰다고 희망제작소에 통보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하나은행이 공동사업의 중단 사유를 거짓으로 꾸며 희망제작소와 하나희망재단 사외이사들에게 통보했다는 의혹도 사고 있다.
하나은행 관계자는 “희망제작소의 자활사업 모델을 함께 할 수 있는지를 이사회에서 검토했지만, 재단 설립의 취지와 맞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으로 안다”고 해명했다. 그러나 당시 사외이사로 이사회에 참여한 이근식 서울시립대 교수(경제학)는 “당시 하나희망재단 관계자들은 희망제작소 쪽과 사업을 함께 하지 않고, 재단 쪽에서 실무를 모두 맡기로 했다는 내용만 이사회에 보고했을 뿐”이라며 “오히려 내가 왜 그토록 중대한 사안을 사전 논의 없이 사후에 추인받느냐고 문제제기를 했다”고 밝혔다. 하나은행이 이사회와 희망제작소를 상대로 ‘이중 플레이’에 나선 셈이다.
하나은행의 ‘변심’ 탓에 희망제작소는 올 초 연구원들에게 희망퇴직이나 휴직신청을 받는 방식으로 전체 인원의 3분의 1을 줄여야 했다. 반면 희망제작소와 갈라선 하나은행은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의 새로운 파트너를 금세 찾았다. 는 지난 2월23일 보건복지가족부·하나금융그룹과 함께 ‘무료 부채클리닉’과 무담보 소액신용대출(마이크로크레디트)을 연계한 ‘2009 함께하는 희망 찾기-탈출! 가계부채’ 캠페인을 시작한다는 공고를 냈다. 재기 의지와 역량이 검증된 신청자를 하나희망재단이 운영하는 마이크로크레디트 대출 대상자로 추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에 대해 하나은행 관계자는 “가 보건복지가족부 등과 진행하던 캠페인 참여자 중 일부를 대출 대상자에 포함시키는 정도이며, 앞으로 1년 정도만 진행될 것”이라며 “희망제작소와 함께 하려던 사업과 재원은 같지만, 하나은행과 가 마이크로크레디트 사업 파트너가 된 것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희망제작소뿐만이 아니다. 6개월 넘도록 검찰 특수부의 수사를 받았던 최열씨가 대표로 있는 환경재단은 환경부와 서울시로부터 받을 예정이던 제6회 환경영화제 관련 지원금을 영화제가 개막한 5월21일 현재까지도 받지 못한 상태다. 환경재단 관계자는 “환경부는 국회 예산 심의까지 통과한 지원금 2억원을 집행하지 않으면서 ‘말할 수 없는 이유로 줄 수 없다’는 이상한 해명만 늘어놓고 있다”고 말했다.
“사장이 촛불단체 지원 중단 지시”2004년 영화제 출범 이후 매년 2억5천만원을 지원해온 서울시도 올해는 특별한 이유 없이 영화제 지원금을 주지 않고 있다. 김기춘 서울시 맑은환경본부장은 “다른 지원기관들과 보조를 맞춰야 하는데, 우리만 줬다가 영화제가 무산되면 어떡하느냐”면서 “일반 기업이 재원 조달이 안 돼서 부도날 것 같은 회사와는 거래를 안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말했다. 김 본부장과 기자가 통화한 날짜는 영화제 개막일인 5월21일이었다.
그동안 환경 쪽에 초점을 맞춰 사회공헌 활동을 벌여온 기업들에서도 ‘외압’ 탓에 지원 대상을 축소·변경한 사례가 다수 발견된다. 환경운동연합의 경우 신용카드 매출의 0.01%를 지원받는 환경사랑카드 등 기업들의 후원을 받는 프로그램들이 모두 없어진 상태다. 한 공기업 관계자는 “지난해에는 사회공헌 예산을 18억원 정도 들였는데, 올해는 4억~5억원가량으로 줄인 상황”이라며 “얼마 전 사장이 직접 촛불집회 참여 단체 2곳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리기까지 했다”고 밝혔다. 소비재를 생산하는 한 대기업의 사회공헌팀장은 “최열 대표의 수사가 진행되는 동안, 국정원에서 환경운동연합에 대한 지원내역 제출을 요구해 팩스로 보내기도 했다”면서 “최근엔 왜 진보단체 사업만 지원하느냐며 따지고 나선 뉴라이트 쪽 단체에 일부 지원금을 배정한 일도 생겼다”고 털어놓았다.
이와 관련해 현 정부에서 시민사회비서관을 지낸 임삼진 한국교통연구원 초빙선임연구위원은 “국정원 등에서 현 정권에 과잉 충성을 하는 사람들이 ‘오버’하는 행태가 일부 있을 순 있다”며 “그러나 정부가 NGO들의 ‘돈줄’을 끊는다는 식의 사고는 지나친 음모론”이라고 반박했다.
이명박 정부의 비정부기구(NGO)에 대한 ‘관심’의 눈길은 인사 문제에까지 닿는다. 신필균 전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녹색교통운동 이사장)은 현 정부 출범 이래 지속적으로 사퇴 압력을 받아오다 지난해 말 물러났다. 신 전 사무총장은 외압을 받을 당시 국가인권위원회에 관련 내용을 제소했다. 그 결과 지난 3월 인권위는 “당시 보건복지가족부 관계자가 신 전 사무총장에게 사퇴를 요구한 것은 인권침해”라며 경고 조처하도록 했지만, 복지부는 이를 수용하지 않았다. 신 전 사무총장은 “자율적인 NGO는 정부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복지의 효과가 닿도록 돕는 등 효율성을 창출하는데, NGO의 인사에까지 정부가 개입한다면 정부 스스로 국민복지를 훼손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또 다른 복지 관련 민간재단의 한 이사는 “지난해 우리 재단에도 상임이사를 교체하라는 정부 쪽의 압력이 전달된 바 있다”며 “이사장이 이를 거부하자 감사원 감사가 평소보다 훨씬 엄격하게 진행됐다”고 주장했다.
자성론-비관론 엇갈리는 시민사회단체시민사회단체 내부에서는 현 정부 들어 NGO들이 겪는 어려움을 체질 개선의 동력으로 삼자는 ‘자성론’과 정부-NGO-기업의 협치(協治) 모델이 붕괴돼 회복하기 어려운 타격을 받을 것이라는 ‘비관론’이 엇갈리고 있다.
박원순 변호사는 “희망제작소의 경우 기업 섹터와의 협력이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지만, 앞으로 개인 기부 비중을 늘리는 등의 노력을 통해 돌파구를 찾을 것”이라며 “전문인력 수가 부족하고 비용이 빠듯한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의 여건을 회계와 운영의 투명성을 한 단계 더 높이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서울환경운동연합의 염형철 운영위원장은 “살림이 많이 위축됐지만, 사업 방식과 활동가들의 자세가 바뀌면서 새로운 환경운동의 기틀이 마련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반면 참여정부에서 시민사회수석을 지낸 박주현 시민경제사회연구소 소장은 “개인들의 기부문화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상황에서, NGO에 대한 정부와 기업들의 지원이 끊긴다면 시민사회가 고사해버릴지 모른다”면서 “국정원이나 감사원 같은 힘있는 기관들이 NGO의 탄압에 동원되고 있다는 정황도 적지 않은 상황”이라고 우려를 내비쳤다. 하승창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운영위원장은 “앞으로 공동체 유지를 위해 시민사회와 국가권력이 힘을 합치는 일은 찾아보기 힘들어 질지 모른다”고 내다봤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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