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 재보선 결과가 발표되던 날 밤, 정세균 민주당 대표는 서울 여의도 당사 앞 호프집에서 기분 좋게 취했다. 웃음이 가득한 얼굴로 “언론인 여러분들 감사하다”며 거수경례를 할 정도였다.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호남에서의 ‘전패’ 때문이었다. 전북은 ‘정동영 바람’이 거셌다고 하더라도, 전남에서도 민주노동당에 밀린 것은 충격이었다. 수도권에서의 승리도 점차 빛을 바랬다. 선거 이후에도 당 지지도는 10% 중·후반대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예뻐서’가 아니라 ‘이명박이 미워서’라는 민심이 드러난 것이다.
당 지도부는 5월 초 전략기획국을 통해 전남대의 한 교수에게 보고서 작성을 의뢰했다. 4·29 재보선 결과가 보여주는 호남 민심에 대한 분석과 앞으로의 호남 전략에 대한 의견을 구한 것이다. 민주당의 핵심 당직자들은 5·18 29주기를 전후해 완성될 이 보고서를 토대로 민주당 지도부가 호남 정책을 재검토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민주당이 당 차원에서 ‘호남 전략’을 외부로 발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고 했다.
이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와 함께 조사한 호남 지역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호남은 여전한 민주당의 아성이다(당 지지율 53.8%). 그러나 ‘호남을 기반으로 한 신당이 창당되면 지지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도 51.3%가 ‘그렇다’고 답했다. 민주당이 아래부터 흔들리는 상황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흔들림을 감지한 민주당 비주류 쪽 의원들과 원외 위원장들은 이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고 있다. 5월14일 조배숙 의원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토론회가 첫 공식 무대였다. 비주류를 대표한 우원식 전 의원은 “과거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 시절 일부 세력의 전국정당론은 개혁적 진지로서의 호남을 지역주의의 본거지로 폄훼함으로써 다른 지역의 지지를 확대할 수 있다는 또 다른 지역차별론에 근거하고 있었다”며 “전국정당론이 가시화되면서 호남의 개혁세력이 열린우리당에서 이탈하게 됐던 것이 과거의 교훈이다. 이를 다시 좇아가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류 쪽의 노영민 대변인은 “DY(정동영 무소속 의원)에게 호남 공천을 주지 않은 것은 당력을 수도권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당이 배출한 소중한 인재들은 전국으로 진출시켜야 한다는 개념이다. (민주당의) 영남 진출이 어려우니 수도권에 집중하는 것이다”라고 맞섰다. 이런 논쟁은 한반도평화경제연구원이 5월18일 광주에서 개최하는 토론회 등 당 안팎에서 계속 이어질 상황이다.
민주당의 전국정당화는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롯한 민주당 출신 정치인 모두의 비원이었다. 그들의 꿈은 수도권 거점 확보를 넘어선 ‘영남 교두보 확보’였다. 박정희 정권의 유신이 시작되기 전까지 ‘지역감정’이라는 단어는 한국 정치사에 중요하지 않았다. 1971년 대선 당시 김대중 후보는 부산에서 42.6%를 득표했다. 대선 전날 김대중 후보의 대구 유세에는 대구 인구의 10%인 19만 명이 몰렸다. 같은 해 총선에서 김대중 후보가 이끈 신민당은 부산의 8개 선거구 중 6개를, 대구의 5개 선거구 중 4개를 휩쓸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당시 신민당이 거뒀던 성과를 잊지 못했다. 대선 때가 되면 그의 발길과 마음은 늘 영남을 향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도 영남 출신 인사들에게 장관 자리를 주고 선거에 출마하도록 독려했다. 영남에서 출마해 떨어진 이들에게 장관 자리를 선물하기도 했다.
영남을 향하는 민주당 지도부의 노력은 지금도 다를 바 없다. 민주당의 한 고위 당직자는 “정세균 대표가 취임한 이후 대표 지시로 당 사무처에서 ‘영남 플랜’을 만들어왔다. 이를 토대로 중앙당 국장급 인사를 경북도당으로 배치하고, 영남의 취약 지역을 대상으로 예산지원 프로그램을 짜기도 했다. 구체적인 성과는 내년 지방선거에서 빛을 볼 것으로 기대한다. 민주당의 영남 플랜은 앞으로도 공을 들일 부분이다”라고 말했다.
전략의 핵심은 ‘공천 개혁’그러나 ‘김대중 민주당’과 ‘정세균 민주당’ 사이에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그 간극은 2003년 열린우리당-옛 민주당 분당 과정에서 생겼고, 2006년 재통합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커져왔다. 이른바 ‘호남 홀대론’이다. 호남 지역의 한 언론인은 “호남 사람들은 지난 2007년 대선 패배와 2008년 총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의원과 정치인들은 이 지역에서 ‘여당’으로 호의호식한다고 생각한다”며 “정치인들의 끊임없는 요구에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을 만들었어도 정작 자신들의 삶은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는 일종의 배반감”이라고 표현했다.
민주당 주류에서는 일단 호남의 이반을 막기 위한 방안으로 ‘공천 개혁’을 검토하는 것으로 보인다. 정세균 대표의 비서실장을 맡고 있는 강기정 의원(광주 북구)은 “이번 장흥 광역의원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은 지역에서 20년 생활정치를 해온 후보를 내세워 이겼고, 민주당은 구태 정치인을 보내 패배했다”며 “이런 모순을 깨기 위해 호남에서는 당 조직의 혁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강 의원은 “내년 지방선거가 호남의 민주당을 개혁할 수 있는 중요한 기회”라며 “정책으로는 ‘뉴민주당플랜’을, 정치로는 ‘생활정치’를 구현할 수 있는 공천 혁명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강 의원은 구체적으로는 호남의 비례대표 광역·기초의원 공천권을 중앙당이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지방의원은 연봉 4천만원을 받는 훌륭한 공직으로, 환경운동·시민운동·농민운동을 하던 이들을 데려올 수 있는 좋은 기반이 된다”며 “이를 지역위원장이나 지역의원에게 맡겨서는 공천 혁명이 이뤄질 수 없다”고 강조했다.
김교흥 수석사무부총장도 “민주당이 외부 인사에 대한 수혈을 제대로 이루려면 지방선거부터 공천 개혁이 이뤄져야 한다”며 “현재 시·도당에서 결정하는 기초단체장 공천을 중앙당과 협의해서 하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당이 기초단체장 공천에 개입해 전략공천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김 부총장은 “이번 재·보궐 선거에서 민주당이 수도권을 휩쓴 이후 지방선거에 관심이 있는 이들이 민주당으로 몰리고 있다”며 “서울·인천과 시흥∼안산∼오산∼평택으로 이어지는 수도권 남부 벨트에서 분위기가 좋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당 정체성 회복으로 외연 넓혀야”민주정책연구원의 정창교 연구기획위원은 “호남 전략의 핵심은 공천 개혁일 수밖에 없다”며 “민주당 내부에서도 지역 주민들이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기득권을 버리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고 말했다. 정 위원은 “호남에서 제대로 된 정당 민주화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시민배심원제도 등 그간 시험적으로 도입했던 성과들을 다시 재도입해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호남의 ‘정치적 토호’들의 기득권에 손을 대야 한다는 뜻이다. 민주당 지도부는 호남의 ‘정치적 토호’들의 폐해를 내세우면서 공천 개혁의 필요성을 주장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전국정당파’와 ‘호남강화파’ 사이에 또 한 번 심한 갈등이 빚어질 가능성이 높다.
중요한 것은 공천 개혁 뿐만 아니라 당의 정체성 회복이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원식 전 민주당 의원은 “민주당의 근간인 민주개혁 진영의 중심은 개혁성을 가진 호남과 양심적 지식인, 사회의 변화를 바라는 사회적 약자, 그리고 노동자와 농민으로 구성돼 있다”며 “올바른 전국정당은 이런 민주개혁 진영의 중심을 분명히 하고, 개혁정책을 확고히 함으로써 외연을 확장해야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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