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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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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없는 제도의 불행

각 기관이 제공하는 다양한 혜택의 통합관리와 개인사 고려하는 맞춤형 지원 필요…
행복한 삶에 대한 관점 바꾸는 노력도
등록 2009-05-08 10:59 수정 2020-05-03 04:25

김민희(가명·경기 성남)씨는 11살 지연(가명)이를 두고 집을 나갔다. 지난해 9월이다. 딸은 “가지 말라”고 “날 데려가라”고 울며 바지춤을 잡았다. 하지만 떠났다. 알코올중독을 앓는 남편 대신 2007년 봉제공장, 2008년 식당일을 이어갔다. 남편의 음주 습관은 달라지지 않았다. 삶의 무게가 임계치를 오르내렸다. 수급비만 나왔어도 조금 달랐을지 모른다. 모두 네 차례가량 신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지연의 할머니가 갖고 있는 아파트 때문이다. 현재 지연을 데리고 있는 할머니도 수급 혜택을 받지 못한다. 할머니가 한 달에 쥐는 돈은 30만~40만원이다. 육남매가 모아준 용돈이다.

소득 격차에 따른 어린이 불평등은 사회 전체의 미래에 드리운 그늘이기도 하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운동장을 가로 질러 뛰어가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소득 격차에 따른 어린이 불평등은 사회 전체의 미래에 드리운 그늘이기도 하다. 서울의 한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운동장을 가로 질러 뛰어가고 있다.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서류로는 보여주지 못하는 생활

“형제·가족들이 부양할 수 있다고 국가는 판단하는 거죠. 하지만 집만 있지 벌이는 없거든요.” 3년 동안 지연이를 돌봐온 사회복지사가 지난해 직접 동사무소를 찾아가기도 했다. 그 앞에서 동사무소 담당자가 직접 구청에 전화를 했다. “자격이 안 되는데 왜 자꾸 상신하느냐”는 구청 쪽 대답을 바로 전해줬다. 사회복지사는 “예전엔 사정에 따라 동사무소장이 재량으로 수급자를 추천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거의 되지 않는다”며 “이 정권 들어 특히 더 엄격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최희자(가명·40대·서울)씨는 수년째 별거 중인 남편까지 부양하며 아들 병주를 키우고 있다. 사실상 한부모 여성가장이다. 그러나 한부모 가정에게 폭넓게 제공되는 혜택을 그는 보지 못했다. 2년여 전 구청에서 지원하는 한부모 여성가정을 위한 가족여행 프로그램에도 신청을 못했다. 지난 4월에도 한부모 여성가장을 대상으로 하는 건강검진과 치료 프로그램에 신청하지 못했다. 서류상 한부모 가정이 아니라는 이유다.

사례들의 공통점은 ‘가슴이 없는 제도’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낸다는 것이다. 현재 보건복지가족부·교육과학기술부·지방자치단체·기업·민간기관 등에서 대상을 특정해 다양한 혜택을 시도하고 있다. 요란스럽게 많다. 그런데도 사각지대가 발생한다. 일단 통합 관리가 안 되기 때문이다. 같은 연령대라도 유치원은 교과부, 어린이집은 보건복지가족부가 맡는다. 돌봄서비스로 운영되는 방과후초등보육은 교과부가, 지역아동센터(공부방)·청소년아카데미·방과후보육은 또 보건복지가족부가 관장한다.

한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사들이 돌보는 아이나 부모들과 함께 공연을 볼 수 있는 무료티켓 제공 프로그램도 있었는데, 나도 그걸 올해 처음 알았다”고 말한다. 영국은 양육·아동보호·청소년 등 흩어져 있는 법들을 통합해 아동법(The Children Act)을 발효시켰다. 우리가 아동권리협약에 가입한 1991년 일이다.

‘통합 관리’는 ‘절대 평등’으로 가는 길목이 될 것이다. 당장 주목해야 할 것은 경계선 계층이다. 수익이 최저생계를 겨우 넘는 이들, 장애 지원 기준을 겨우 넘는 이들, 사실상 이혼 상태지만 법적으로 묶인 이들이다. 당장 생계형 차만 갖고 있어도 수급자가 되긴 어렵다. 이혜진 사회복지사(서울 성북교육청)는 “법정 지원 계층에만 서비스가 과도하게 몰리는 걸 막기 위해서라도 통합 관리가 중요하다”며 “궁극적으로 마을이 아이를 보살피자는 관점으로 우리 구의 사업들도 변화하고 있다”고 말한다. 송경원 진보신당 정책연구원은 “교육 격차조차 학교를 넘어 지역사회가 함께 나서야 해결된다. 빈곤이나 가족 배경이 결합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복지 코디네이터 규모·처우 개선을

하지만 ‘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에서도 드러났듯, 도시·농어촌 등 지역별 격차에 따른 불평등도 상당하다. 해당 조사를 위해 심층면접을 다녔던 한 연구원은 “경기 지역은 특히 할아버지·할머니와 함께 사는 ‘조손가정’이 많았는데, 이처럼 지방은 서울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가정에서 위기를 맞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말한다. 지역별 특성, 각 가정사, 성향 등까지 고려하는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이를 위해선 중간에서 사례관리를 하고 적합한 서비스를 연결해주는 코디네이터(조율자)가 필요하다. 현재 지역아동센터에 파견되는 지역사회 전문가나 각 지역 사회복지사들이 비슷한 기능을 한다. 하지만 1년 계약으로 고용되는 계약직이 대부분이다. 1년마다 새로 원서를 내고 면접을 본다. 처우도 낮아 상당 인력은 자발적으로 혹은 강제로 교체된다. 아이가 연속적으로 관리될 수 없는 것이다. 같은 논리로, 이번 실태조사 유형도 종단조사(일정한 시간차로 동일 조사를 반복하는 것)로 확대될 필요가 있어 보인다.

부모의 역할도 상당히 중요하다. 이순형 서울대 교수(아동복지학)는 “빈곤 환경도 문제지만, 유아기 발달 차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게 부모의 양육 태도”라고 말한다. 프랑스 등 유럽 여러 나라에선, 부모가 아닌 아이의 이름으로 18살이 될 때까지 아동수당을 지급한다. 김규항 발행인은 교육·행복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강하게 주문했다. “소득 격차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한국은 전 사회적 합의에 의해 자유와 인권이 구속되는 곳이다. 우리처럼 못 노는 나라는 없다. 정말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점을 바꾸려는 노력을 부모들도 해야 한다.”

월간 2월호에 실린 자료를 보면, 2007년 아동빈곤층은 138만 명으로, 경제위기를 거치는 올해만 148만~176만 명으로 증가될 전망이다. 하지만 정부는 되레 지원 대상을 줄이고 있다. 예산이 부족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진보신당 쪽에 의뢰해 뽑은 예산·재원 분석 자료에 따르면, 이 마련한 ‘절대평등 선언’을 가까운 시일에 구현하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인다.

송경원 진보신당 정책연구원의 분석 자료를 보면, 3~5살 어린이에 대한 무상 보육·교육, 초·중학생 무상 급식, 초등학생 무상 학용품 지급, 저소득층 밀집 학교 지원 등을 2012년부터 전면 시행할 경우, 한 해 8조8천억원가량이 필요하다. 우선 전국 초등생 381만 명, 중학생 206만 명의 급식료를 물가상승률을 감안해 따지면 2조2416억원이다. 표준교육비를 감안한 1인당 37만원 남짓의 비용을 138만 명의 어린이(만 3~5살)들에게 연간 지원하면 6조1538억원이 소요된다. 초등학생 학용품비로 1인당 5만2천원을 지원하는 데 1528억원이 든다. 여기에 1727개 저소득층 밀집 학교에 각 1억5천만원씩을 지원하면 2590억원이 필요하다. 이런 비용을 모두 더한 것이 8조8072억원이다.

무상 보육·교육에 8조 소요, 부자 감세는 13조

이런 돈을 어디서 마련할지 갑갑하다고? 정부가 올 들어 종부세·양도세 등을 중심으로 실시한 부자 감세 규모 13조5천억원보다 적은 액수다. 이번 ‘한국 아동·청소년 종합실태조사’ 보고서의 책임을 맡은 이봉주 서울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조사를 통해 소득뿐 아니라 가정환경, 아동 언어발달, 정서 등 다방면에 걸쳐 갭(격차)이 존재하는 게 보이고, 18살까지 보면 어린 시절의 갭이 더 증폭되는 결과가 나온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 교수는 “어린이들의 특정 시기만은 사회적으로 격차 발생의 소지를 줄일 필요가 있다”며 “격차는 사회 손실로 돌아오기 때문에 미래 투자 관점에서라도 접근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선 지금 1145만8701명의 아동·청소년이 1145만8701개의 표정으로 생동하고 있다. 박혜준 서울대 교수(아동가족학)는 말한다. “환경도 중요하지만, 아이들의 탄력성을 주목해야 돼요. 알코올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형제가, 한 명은 알코올중독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아버지와 같은 중독자가 되거든요. 그래서 당연히 결정론적 시각은 위험하죠.”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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