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4월 자동차로 가득 찬 서울 광화문. 이곳에선 지난해 4월부터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장면이 연출됐다. “미친 소 없이 건강하게 살고 싶다”며 거리로 나와 촛불을 든 시민 행렬이 거리를 가득 채운 날들이 있었다. 영화 같았던 촛불의 나날에 광화문이 주요 배경이었다면 ‘배후’ 아니, 주연 ‘배우’는 시민들이었다. 어청수 전 경찰청장과 정운천 전 농림수산부 장관은 곧 화면에서 사라질 조연 정도 되겠다. 주요 소품은 2008년 6월10일 밤을 장식한 이른바 ‘명박산성’ 컨테이너와 그 앞에 시민들이 쌓은 스티로폼 탑. 촬영·중계 담당은 ‘칼라TV’와 ‘아프리카’, 소통 매체는 ‘다음 아고라’였고, ‘공공의 적’은 미국산 쇠고기였다. 그리고 1년, 모두들 일상으로 돌아가 별일 없이 산다. 문득, 1년 전 그 이름들에게 안부를 묻고 싶다.
◇ 때가 돼서 떠났네, 어청수 전 경찰청장2008년 2월부터 2009년 1월까지 경찰청장 자리에 앉아 촛불집회 진압을 지휘했던 어청수 전 경찰청장. 오른손엔 촛불, 왼손엔 ‘어청수 퇴진’이란 손팻말을 든 시민들 덕분에 더 유명해진 어청수 전 청장은 ‘촛불’ 때문에 퇴진하진 않았다. 지난 1월 “때가 돼서 떠난다”는 말을 남기고 경찰청 직원들의 박수를 받으며 퇴임한 그는 과 전화 인터뷰를 하는 내내 호탕하게 웃으며 거침없이 말을 이어나갔다. 그는 “요즘 BMW 타고 다니며 잘 지내고 있다”고 했다. 이어진 설명에서 ‘BMW’란 버스·메트로(지하철)·워킹(걷기)을 뜻하는 약자라고 했다. “요즘은 사람들이 많이 알아봐서 택시비가 많이 든다”고도 했다.
어 전 청장은 “(지난 1년간의 청장 생활을) 돌이켜볼 생각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30년 만에 처음으로 ‘프리’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는 그는 요즘 집 근처인 서울 올림픽공원에서 걷기 운동을 한다. 한데 공원을 10바퀴 돌아도 1시간밖에 지나지 않아 ‘시간 보내기’가 화두란다. 결혼생활 28년 동안 부인과 17년을 떨어져 살아 이제라도 부족함을 채우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단다. 그는 촛불 1년에 대한 소회를 묻는 질문에 “다음 청장 체제가 굳어지고 있는 때에 이전 사람이 발언을 하는 건 적당하지 않다. 조용히 지내고 싶다”며 말을 아꼈다.
◇ 요즘엔 사인 공세에 시달려, 정운천 전 장관
정운천 전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은 여전히 ‘촛불’의 한가운데 있다. 2008년 2월29일부터 8월6일까지 5개월간 장관 자리에 있었던 그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 주무부처 장관이었다. 장관 재임 중인 지난해 6월20일 문화방송 〈PD수첩〉 광우병 보도 내용이 왜곡됐다며 대검찰청에 수사를 의뢰했고, 지난 3월3일엔 정식으로 제작진 6명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 지난 4월15일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부장 전현준)가 〈PD수첩〉의 김보슬 PD를 체포했다. 3월26일 이춘근 PD 체포에 이어 일어난 일이다.
정운천 전 장관은 근황을 묻는 취재진에게 자신의 보좌관을 통해 “〈PD수첩〉에 대한 개인적 감정은 없다”고 전해왔다. 그는 “어찌됐든 지난해 어마어마한 사태를 일으킨 것에 대한 책임감으로 백의종군하고 있다. 현재 법정 소송 중인 사건에 대해서 말하는 것도 그렇고… 지켜보면 알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농어업의 밀물 시대를 열자’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느라 일주일에 3~4일은 지방에서 지내고 있다. 보좌관은 “지방 강연에 가서 식당에 들르면 시민들이 사인을 해달라고 하는 등 인기가 괜찮다. 촛불집회가 있을 당시 정운천 전 장관이 광장에 직접 나갔던 것을 많이들 기억하더라”고 말했다. 지난해 8월6일 퇴임한 그는 “퇴임 1년을 맞는 8월까지는 자중하겠다”는 태도다.
◇ 아무도 제 것이 아니라 했던, 명박산성광화문이란 무대에서 빛을 발했던 소품, 바로 2008년 6월10일 밤 경찰이 쌓은 컨테이너(이른바 ‘명박산성’)와 시민들이 스티로폼으로 쌓은 탑이다. 당시 경찰은 인천항만공사에 전화를 해 “컨테이너를 빌려달라”고 요구했으나 공사 쪽은 “소유하고 있는 컨테이너가 없다”고 거절했다. 이에 경찰은 대형 물류 업체에 전화를 했고 해당 업체는 당시 인천항에 컨테이너를 소유하고 있던 협력업체 ‘○○통운’을 경찰에 소개해줬다.
하지만 ‘명박산성’에 대한 비난이 거세지자 컨테이너를 빌려준 업체는 한동안 “빌려준 적 없다”고 해명했다. 경찰은 ‘주인 없는 처지’가 된 컨테이너를 6월11일 인천항으로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미 컨테이너는 2층으로 쌓여 용접된 뒤였고 표면엔 윤활유의 일종인 ‘그리스’까지 발라져 있었다. 또한 시민들의 낙서로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다. 컨테이너는 며칠 동안 고압 세척을 거친 뒤 다시 화물 적재 용도로 쓰였다. 현재 ‘○○통운’은 문을 닫은 상태다. ‘○○통운’을 경찰에 소개한 대형 물류 업체 관계자는 “컨테이너마다 고유 번호가 있는데 경찰청에 임대해줄 당시 번호를 기록해놓지 않아 어떤 컨테이너가 광화문에 나갔다온 것인지 현재는 확인할 수 없다”며 “회사는 없어졌어도 그 컨테이너는 인천항 어딘가에서 화물을 품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 ‘가래떡’이 돼 재활용 업체로, 스티로폼 탑대규모 촛불집회가 예상됐던 2008년 6월10일. 경찰은 일찌감치 컨테이너를 쌓아 광화문을 봉쇄했다. 이에 시민들은 스티로폼을 이용해 탑 쌓기를 시도했다. 스티로폼으로 탑을 쌓아 컨테이너를 넘자는 주장이 나오자 광장에 모인 촛불 시민들 사이에는 즉석 토론이 벌어졌다. 컨테이너를 넘어 ‘폭력 시위’로 보일 수 있는 행동을 해야 하느냐에 대한 토론이었다. 결국 탑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깃발을 한 번 흔드는 것으로 정리됐다.
‘민주주의의 상징’으로까지 추대받았던 스티로폼 탑은 어떻게 됐을까? 위풍당당했던 스티로폼 탑은 사과상자만 한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2008년 6월11일 새벽 스티로폼을 수거해간 서울 종로구청은 “스티로폼을 관내 재활용 센터에 가지고 가 일일이 톱으로 썬 뒤 고열에서 녹여 ‘가래떡’ 형태로 재활용 업체에 보냈다”고 설명했다. 당시 스티로폼을 옮겨오는 데만 종로구청 차량 40대가 투입됐고 30~40명의 인원이 현장에서 스티로폼을 날랐다. 열처리 뒤 10kg짜리 사과상자 크기가 된 스티로폼 탑은 건축자재, 액자 등으로 재활용됐다.
◇ ‘자유인’이 엑소더스한, 아고라
촛불집회 당시 ‘소통의 장’이 됐던 인터넷 토론방 ‘다음 아고라’도 홀쭉해졌다. 촛불이 뜨거웠던 지난해 6월 한 달간 3만2708건의 게시물이 올라왔던 것과 달리 4월1~16일의 게시물 수는 6756건에 그쳤다. 주당 방문자 수도 1년 전에 비해 160만 명 정도 줄었다. 조·중·동 불매운동을 한 누리꾼들이 기소되고 ‘미네르바’가 구속되는 등 ‘탄압’이 현실화되고, 다음 쪽이 게시자 IP 부분 노출, 1일 게시글 개수 제한 등 ‘개선 작업’에 박차를 가하자 누리꾼들이 침묵하거나 ‘자유’를 찾아 이동했을 가능성이 많다. 지난 4월1일 국회를 통과한 개정 저작권법은 ‘게시판이 하루아침에 폐쇄될 수 있다’는 불안감을 키웠다. 이 때문에 진중권 중앙대 겸임교수는 “게시물 삭제, 신분 노출 등의 위험이 없도록 정당이 서버를 소유하고 진보 지식인들이 참여하는 방식의 제3의 포털 사이트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대표는 항소 중, ‘아프리카’촛불집회 드라마를 내내 생중계했던 진보신당 인터넷 방송 ‘칼라TV’는 여전히 ‘영화보다 슬픈 현실’을 찍고 있다. 지난 1월 용산 참사를 생중계했던 ‘칼라TV’의 영상은 경찰 조사에서도 중요 자료로 활용됐을 정도다. 정태인·진중권·이명선 등 개성 있는 리포터가 주류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는 현장을 날것 그대로 전달하고 있다.
‘칼라TV’의 ‘촛불 생중계’가 제공된 플랫폼이었던 ‘아프리카’(afreeca.com)는 대안미디어로 부상했다. 촛불이 한창 뜨겁던 2008년 6월1일 하루에만 120만 명의 시청자가 몰리는 등 6월 한 달간 촛불집회 생중계를 본 시청자는 700만 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국민 7명 중 1명꼴로 인터넷 생중계를 본 셈이다. 아프리카에 개설됐던 촛불집회 관련 방송 채널도 3만 개를 넘었다. 나우콤 아프리카 사업부 김진석 이사는 “촛불집회를 계기로 방송 수, 시청자 수 등이 1년새 3배 상승했다. 또한 엔터테인먼트 위주였던 콘텐츠가 시사, 사건 현장, 교육 등으로 다양화됐다”고 말했다.
지난해 6월18일 저작권법 위반으로 구속돼 ‘보복 수사’ 논란을 일으켰던 ‘아프리카’ 운영자 문용식 나우콤 대표는 지난 2월12일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벌금 3천만원을 선고받았다. 현재 문 대표는 항소한 상태다.
◇ 불티나, 미국산 쇠고기미국산 소고기는 잘 팔린다. 미국산 쇠고기 검역이 재개된 지난해 6월26일 이후 올해 4월10일까지 검역을 통과한 미국산 쇠고기는 모두 7만1766t이다. 지난해 11월부터 대형마트가, 지난 3월엔 백화점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미국은 추가 협상에서 ‘품질체계평가(QSA) 프로그램을 마련해 광우병 위험물질을 제거한 30개월 미만 쇠고기만 한국에 수출하겠다’고 약속한 상태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육 직판장을 운영하고 있는 (주)에이미트의 박창규 사장은 “현재 전국에 140개 직판장이 문을 열었고 가맹점을 열려는 창업주들의 관심도 크다”고 말했다. 박 사장은 에이미트가 현재 한 달에 25억원의 매출을 올리고 있으며 매달 10%씩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음식점에서 도매로 구입해가는 경우가 늘고 있다고 한다. 박 사장은 “우리는 주로 24~25개월짜리 소를 갖다 판다. 일부 창업주들이 ‘광우병이 발생하면 어떡하냐’는 질문을 하는데, 어차피 우리는 팔기만 하는 것이고 한-미 간 협상은 정부가 할 일이니 큰 문제는 없다고 설명한다”고 말했다.
올해 1~3월 3개월간 국립수의과학검역원을 통과해 한국에 들어온 미국산 쇠고기는 1만7252t에 달한다. 같은 기간 들어온 수입 쇠고기 5만638t의 34%를 차지한다. 호주산(2만4270t)에 이어 2위다. 1월에 3843t, 2월 6066t, 3월 7342t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한편 지난 4월9일 캐나다가 “같은 ‘광우병 위험 통제국’인 미국의 쇠고기는 수입하면서 캐나다산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는 것은 ‘동등성 원칙’에 위배된다”며 한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했다. 캐나다에선 지난해 11월 15번째 광우병 감염소가 발견됐다.
광화문 네거리엔 공사가 한창이다. 지난해 4월23일 착공한 ‘광화문 광장’ 조성 공사가 막바지 작업 중이다. 오는 7월 말 공사가 끝나면 세종문화회관과 미국 대사관 사이 대로 중간에 녹지가 형성된다. 미국대사관 앞쪽으론 세종대왕상도 세워질 예정이다. 거리의 모양이 변하고 사람들도 변해간다. 촛불로 뒤덮였던 광화문 거리는 우리에게 묻는다. 건강하게 잘 살고 있습니까?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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