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인턴만 호황

2월 비상경제대책회의 뒤 쏟아진 ‘인턴 봇물’ 대기업만 1만명…
교육 계획 없고 ‘잡일’시키면서 ‘희망 고문’
등록 2009-04-03 15:37 수정 2020-05-03 04:25

3월23일 밤 12시. 갑자기 찾아온 꽃샘추위로 기온은 영하로 뚝 떨어졌다. 취업준비생 박대규(27·가명)씨는 부산에서 서울로 가는 버스를 탔다. 이날 오전과 다음날 오후, 이틀에 걸쳐 대기업 면접을 봐야 하기 때문이다. 박씨가 5시간 동안 버스를 타고 서울에 와서 면접 볼 자리는 모두 ‘인턴직’. 그의 머리 속으로 한 대기업 인턴 모집 공고 문구가 스쳤다. “근무조건: 기간제 근로자(계약 만료 후 고용관계 소멸), 계약 기간 6개월.” 단서조항도 붙어 있었다. “인턴으로 채용되더라도 추후 정규직원으로 채용하거나 채용 시험시 우대 혜택은 없습니다.” 노골적으로 ‘6개월 뒤 자르고 그걸로 끝’이라고 공언하고 있었다. 하지만 3월11일 서류 접수를 마감한 이 인턴 자리에는 4천 명이 몰렸다. 경쟁률은 10 대 1이었다.

지난 1월6일 충남 공주시청에서 열린 인턴 면접장의 풍경. 정부는 청년 취업 준비자를 대상으로 뽑는 ‘행정인턴’ 규모를 늘리고 있지만, 고용대란을 완화하기 위한 임시 처방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 연합 이은중

지난 1월6일 충남 공주시청에서 열린 인턴 면접장의 풍경. 정부는 청년 취업 준비자를 대상으로 뽑는 ‘행정인턴’ 규모를 늘리고 있지만, 고용대란을 완화하기 위한 임시 처방에 불과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사진 연합 이은중

박씨가 면접시험을 보는 곳도 크게 다르지 않다. 합격하면 매달 100여만원을 받지만 일할 수 있는 기간은 10주에 지나지 않는다. 합격 여부도 가늠할 수 없지만 설사 붙더라도 10주 뒤면 박씨는 다시 ‘취업준비생’이 된다. 인턴을 마친 뒤 박씨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일부 성적 우수자’에게 정규직 신입사원 선발시험에 응시할 경우 주는 가산점. 이 회사 인사팀 관계자는 “일자리 나누기 차원에서 시행하는 인턴이기 때문에 가산점이 입사 시험 당락에 큰 영향을 미칠 정도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노골적인 ‘6개월 시한부’, 경쟁률 10:1

박씨는 이미 인턴 유경험자다. 지난해 2월 졸업한 박씨는 학교 다닐 때부터 대기업 인턴은 물론, 베트남에 있는 한국 현지 법인에서도 인턴으로 일했다. 토익 900점, 학점 4.0점(4.5점 만점). 지난해 7월부터 지금까지 매일 아침 6시에 일어나 하루 두 개의 스터디 모임 일정을 소화하면서 열심히 달려왔지만, 그동안 입사 원서를 냈던 20여 군데에서 번번이 ‘낙방’했다. 그나마도 채용 공고가 자주 나지 않아 결국 박씨는 다시 ‘시한부 인턴’ 자리라도 두드릴 수밖에 없었다.

경기가 악화되고 청년실업이 심각해지자 이명박 대통령은 끊임없이 ‘일자리 정책’을 강조했다. ‘인턴 봇물’의 화근은 지난 2월19일 열린 비상경제대책회의. 이날 이 대통령은 ‘일자리 나누기’를 강조하며 청년인턴을 많이 채용할 것을 강조했다. 이후 대기업·중소기업·공기업·지방자치단체를 막론하고 저마다 인턴 채용 계획을 쏟아냈다. 삼성 2천 명, SK 1800명, 포스코 1600명, 현대·기아차 1천 명, 롯데 700명 등 3월24일 현재까지 대기업에서 밝힌 인턴 채용 규모만 1만 명에 이른다. 지방자치단체나 중앙정부 기관 등에서 일하는 행정인턴도 올해 1만6천 명으로 규모를 늘렸고, 공기업에서도 1만2천 명 이상을 인턴으로 채용하겠다고 밝혔다. 그 밖에 초·중·고등학교에서도 학습 보조를 담당할 인턴교사 2만5천 명을 뽑고, ‘글로벌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해외 인턴도 2만5천 명가량 뽑을 계획이다. 정부·민간, 교육·산업, 국내·해외 가리지 않고 전 영역에서 ‘인턴’만 호황이다.

이렇게 쏟아지는 인턴 채용 계획 앞에서 취업이 절실한 이들은 지원서 쓰는 것을 망설인다. 알려진 대로, 인턴이지만 하는 일은 잡일에 지나지 않는다. 강경훈(27·가명)씨는 사람들이 ‘꿈의 직장’이라고 부르는 한 공기업 인턴이다. 그가 요즘 하는 일은 지하철역에서 ‘게이트 근무’를 서는 것이다. 누가 몰래 개찰구를 통과하지는 않는지, 길을 물어보는 승객은 없는지, 승차권 발매기에 동전은 떨어지지 않았는지 등을 체크하는 게 일이다. “지하철에 배치된 의무경찰이 하는 일을 나눠 하는 거죠.” 강씨가 멋쩍게 말했다. 전기제어계측공학을 전공한 강씨는 공기업에 기술직으로 들어가고 싶지만, 아직 뽑는 곳이 없다. ‘전업’ 취업준비생이 되는 게 두려워 졸업 요건을 갖췄음에도 졸업을 연장했다. 등록금의 6분의 1을 내면 수업을 듣지 않아도 재학생 신분을 유지할 수 있다.

“힘든 일보다 더 힘든 소속감 없는 하루”

행정안전부가 관리하는 ‘행정인턴’도 제대로 된 ‘일’과 거리가 멀기는 마찬가지다. 한 지방자치단체 인턴으로 지난 1월부터 일하고 있는 김미란(27·가명)씨는 출근해서 주로 책을 읽거나 자격증 공부를 한다. 직원들이 엑셀 문서 등을 정리하라고 주는 일이 가장 큰 일이다. “제가 해야 하는 정해진 일은 없어요. 주로 사무실에 가서 앉아 있으면 직원들이 ‘이거 좀 해달라’고 문서 파일을 줘요. 그러면 한 3시간 정도 자료를 정리해요. 그것도 없을 때도 많고요.” 김씨는 “처음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아무도 뭘 가르쳐주지 않아 그저 자리에 앉아 어깨너머로 이것저것 분위기를 익혔을 뿐”이라고 말했다.

지난 1월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생긴 ‘행정인턴의 모든 것’이라는 카페에서는 여러 행정인턴들이 이런 곤란함을 토로한다. “지금 ○○공단 인턴인데 요즘은 진짜 내가 왜 이러고 있나 하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흙흙. 힘든 일을 하는 거보다 더 힘든 아무 소속감 없이 왔다갔다 하는 하루하루”, “정규직 전환은 정말 힘든 거겠죠?” 등의 글이 올라 있다.

사정은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인턴을 뽑는다고 해서 인턴 교육 프로그램을 별도로 마련해놓은 기업은 드물다. 3월25일 현재 인턴사원 채용 1차 면접까지 마친 ㄱ그룹. ㄱ홍보팀 담당자는 “아마 인턴사원들은 간단한 자료와 팩스 정리, 복사 등 사무보조 일을 주로 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어차피 두세 달 일하는데 무슨 일을 맡길 수 있겠냐”며 “경기가 어려워 구조조정을 해야 할 판국에 인원을 더 뽑는 것은 고통을 분담하자는 기업의 희생”이라고 잘라 말했다.

끝이 분명한 시한부 일자리에, 하는 일도 사무보조 등이 전부지만 그래도 ‘인턴’들은 희망을 놓지 않는다. 강경훈씨는 “어쩌면 공기업에 정규직으로 채용되는 데 약간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이미 인턴으로 일하고 있는 이들이나, 인턴 면접을 본 뒤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는 이들 모두 가장 걱정하는 것은 ‘6개월 혹은 11개월 뒤’다. 단기계약직일 뿐이어서 그 이후는 누구도 보장해주지 않는다. 한 공기업에서 인턴으로 일했던 최홍은(29·가명)씨. 외국에서 대학을 나와 2개 외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 그는 인턴으로 여섯 달 동안 일한 그곳에서도 “잘한다” “재원이다”라는 칭찬을 많이 받았지만, 계약 기간이 끝나자 바로 잘렸다. 혹시나 하는 기대는 물거품이었다. 다행히 함께 일했던 선배가 다른 일자리를 소개해줬지만 그곳도 역시 ‘인턴’이다.

인턴 전업, 인턴에서 인턴으로

불황 속에 인턴 자리만 늘어나면서 일자리를 찾는 취업준비생들은 이 인턴에서 저 인턴으로 옮겨가는 ‘인턴 전업’을 반복하고 있다. 면접을 모두 마치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 박대규씨는 조용히 생각했다. “월급이 100만원을 조금 넘어도 좋아. 오래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곳은 없을까.” 기업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인턴 자리를 내놓고, 취업준비생들도 울며 겨자 먹기로 인턴 자리에 응시한다. 부실한 일자리 대책 속에 이렇게 젊음을 소모하는 불안한 20대들이 늘고 있다.

박수진 기자 jin21@hani.co.kr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