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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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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든 나쁘든 일자리 수만 늘려라?

MB식 일자리 대책, 이미 산업현장에서 ‘아웃’ 선언…
추경 1인당 예산 인건비에 다 쏟아도 월급 46만원짜리
등록 2009-04-03 15:25 수정 2020-05-03 04:25

요즘 30대 그룹 인사팀은 시름이 많다. 지난 2월25일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에서는 주요 그룹 채용담당 임원들이 모여 ‘MB식 일자리 나누기’에 합의했다. 대졸 신입 연봉을 최고 28%까지 삭감하고, 기존 직원의 임금 조정(삭감)을 통해 만들어진 자금으로 새 직원이나 인턴을 채용한다는 게 뼈대였다. 당시 논의를 주도한 한 그룹사의 인사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임금 삭감도, 일자리 나누기도 말처럼 쉽지 않다”고 말문을 뗐다. 올해 입사자만 임금을 대폭 깎으면 매년 조금씩 올라가는 호봉 체계가 흔들린다. 그렇다고 기존 직원들을 신입 수준에 맞출 수도 없는 노릇이다. 노조의 반발도 걱정스럽다. 그는 “취재 중 다른 기업들의 대응 방안이 확인되면 좀 알려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현대중공업 노사는 지난 2월2일 울산 본사에서 최길선 사장과 오종쇄 노조위원장 등 노사 대표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009년 임금요구안 위임식을 열었다. 사진 연합 장영은

현대중공업 노사는 지난 2월2일 울산 본사에서 최길선 사장과 오종쇄 노조위원장 등 노사 대표 1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2009년 임금요구안 위임식을 열었다. 사진 연합 장영은

답답한 마음 “다른 기업은 어떻게 하나”

정부도 국민의 일자리 지키기에 분주하다. 첫손에 꼽히는 방안은 ‘잡셰어링’(일자리 나누기)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난 2월 한 방송사의 고용 관련 프로그램에 보낸 영상 메시지에서 “(노동자들이) 수입이 좀 줄더라도 일자리를 지키는 데 협력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잡셰어링을 제2의 금 모으기 운동으로 만들(자)”고 제안한 바 있다. 청년층과 저소득층을 위해 임시 일자리를 늘리겠다는 다짐도 이어진다. 나누면 행복해진다는 ‘긍정의 바이러스’를 설파하고 싶은 게다.

문제는 ‘십시일반’이라는 해법이 노동시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히려 사회적 약자의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형국이다. 통계청의 고용통계를 보면, 지난 2월 총취업자 수는 2274만2천 명으로 지난해 2월보다 14만2천 명 감소했다. 임시직(486만2천 명)과 일용직(189만7천 명)은 지난해보다 각각 19만2천 명과 8만1천 명 줄었다. 나이별로 보면 30대 고용률의 추락이 눈에 띈다. 70.7%로 통계 작성 이후 최저치였다. 고용사정 악화는 여성 쪽에서 특히 두드러졌다. 30대 남성 취업자 수는 375만1천명으로 지난해 2월에 견줘 1만명 가까이 줄었지만, 30대 여성 취업자 수는 206만명으로 무려 15만7천명이나 감소했다.

30대 여성의 수난은 임시·일용직의 감소 탓으로 보인다. 제조업 비정규직이나 식당 등에서 주로 일하는 30대 주부들은 중소기업 도산과 자영업 폐업이 잇따르면 대거 일자리를 잃게 되기 때문이다.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위원은 “대기업부터 무너진 외환위기 때와 달리, 이번 고용대란은 스펀지에 물이 스며드는 형국”이라고 진단했다. 지금은 노동시장의 밑바닥이라 할 수 있는 여성 임시·일용직 종사자들이 실업대란을 겪고 있지만, 결국엔 대기업 정규직 일자리도 위태롭게 된다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의 ‘일자리 나누기’ 전력투구는 1년 뒤, 아니면 10년 뒤 어떤 판정을 받게 될까?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MB노믹스’ 일자리 대책은 이미 상당수 산업현장에서 ‘아웃’ 선언을 받은 상태다. 중소 제조업체들이 밀집한 경기 시흥시 시화공단을 들여다보자. 공단의 터줏대감 중 하나인 파카한일유압은 최근 직원 197명 가운데 113명이나 해고하겠다는 계획서를 노동부에 제출했다. 주력 생산품인 유압 컨트롤 밸브가 2004년 산업자원부의 ‘세계 일류 상품’으로 뽑힌 이 회사는 지난해에도 20억원대 순이익을 올렸다. 그러나 작지만 강한 ‘히든 챔피언’의 사례로 꼽히던 이 회사 직원들의 절반은 다음달 초엔 실직자로 전락한다. 살생부 기준도 이미 제시했다. 맞벌이 부부에겐 -5점, 정년이 10년 이내로 남은 직원들에겐 -1~-10점을 부과한다. 합계 점수가 낮으면 정리해고 대상이다. 남편을 둔 주부사원이라면 해고의 칼끝이 먼저 겨눠질 가능성이 크다. 파카한일유압 관계자는 “최근 주문 물량이 예년의 20% 수준밖에 안 돼 고용 규모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한 실정”이라고 항변했다. 정부의 일자리 대책이 현장 제조업체에서는 전혀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잡셰어링, 노동시간 단축 쏙 빠져

미국발 금융위기 여파로 실물경제까지 급랭한 지난해 가을 이후, 정부는 제조업 대량 해고 사태를 막기 위해 고용유지지원금을 늘려왔다. 이번 추경예산안에도 고용유지 지원금, 교대제 실시에 따른 임금 분담 등에 5100억원을 추가로 투입해, 22만 개 일자리를 유지하겠다는 내용을 담았다. 살펴보니, 파카한일유압도 지난해 12월부터 최근까지 정부의 고용유지 지원금을 지급받았다. 금속노조 경기금속지역지회의 엄미야 사무장은 “정부는 6개월짜리 지원금을 주며 견디면 곧 좋은 시절이 온다지만, 이런 제도를 대량해고를 위한 징검다리 정도로 여기는 기업들이 많은 게 현실”이라며 “노조가 없고 여성들이 주로 근무하는 PCB기판 조립업체 등에서는 해고를 문자로 통보하는 등의 횡포가 많다”고 설명했다.

1980~90년대 네덜란드와 독일 등지에서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는 잡셰어링은 ‘노동시간 단축→실질임금 삭감→고용 유지 및 확대’를 뼈대로 한다. 그러나 정부의 일자리 나누기 캠페인의 내용에는 노동시간 단축이 쏙 빠져 있다. 새로운 일자리 창출엔 효력이 없는 처방인 셈이다.

애초 공공부문 임금 동결·삭감을 추진하던 정부는 최근 일부 대기업들이 비슷한 내용이 담긴 ‘노사협력 선언’을 발표하면서 한껏 고무된 눈치다. 현대중공업의 경우, 노조가 회사 쪽에 임금 관련 백지 위임장을 제출했고, 경영진은 노조에 화답하기 위해 자신들의 임금 30~100%를 반납하기로 했다. 정부의 축사가 빠질 수 없을 터. 이영희 노동부 장관은 “(현대중공업의 노사관계는) 많은 기업들에 모범”이라며 “어려운 한국 경제를 일으키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격려했다.

엄혹한 경제위기의 시대. 고통 분담 선언은 환영할 만하다. 하지만 문제는 가슴을 따습게 하는 이런 결의가 누군가의 가슴엔 얼음송곳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조선소 같은 대공장에는 정규직 노동자만 있는 게 아니다. 이들과 같은 일을 하지만 인력파견업체 소속인 사내하청 노동자 수가 정규직을 초과하는 곳이 많다. 그런데도 정규직 노조와 경영진의 ‘상생 선언문’에 이들 약자의 목소리를 담기 위한 페이지를 마련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민생민주국민회의의 일자리 창출 대책 대안

민생민주국민회의의 일자리 창출 대책 대안

30대 여성 실업, 사회서비스 일자리로 해결을

한국조선공업협회 등의 자료를 보면, 현대중공업의 직영기능 인력(정규직) 대비 사내하청 인력 비율은 지난 1997년엔 24.2%에 그쳤지만 2006년에는 89.5%로 치솟았다. 계열사인 현대삼호중공업의 수치도 같은 기간 81.7%에서 212.3%로 뛰어올랐다. 금속노조 현대중공업 사내하청지회의 이승렬 사무장은 “정규직 노동자와 달리 사내하청 노동자는 상시적 고용 불안에 시달린다”며 “정규직 노조의 임금 동결 선언 뒤 200여 사내 하청업체 사장들도 도급 단가 동결 선언을 했는데, 이는 사내하청 노동자의 시급을 깎거나 무급 휴직 등을 대폭 실시하겠다는 뜻”이라고 우려했다. 자동차 공장이나 조선소의 경우 공장 정리·청소 등의 업무는 여성들이 맡는 경우가 많은데, 이들이 임금삭감의 직격탄을 맞게 된다는 설명이다.

‘MB식 일자리 나누기’가 헛바퀴를 도는 까닭은 무엇일까? 익명을 요청한 한 국책연구기관 연구원은 “현 정부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고용 문제 해결이 불가능하다”는 다소 과격한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무슨 말일까? 지난 1년여를 돌아보면 정부 정책은 ‘감세→이윤·지대의 증가→실물투자 확대→고용·복지 촉진’이라는 자신들의 경제학 교과서를 따라 움직였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 성장과 고용·복지, 수출과 내수의 연계가 끊어졌다는 것이 우리 경제학계에서 주류 이론이다. 이런 현실에서 대기업의 세금을 아무리 깎아줘도 설비투자와 고용은 늘어나지 않는다. 대신, 회사 안에 유보금으로 쌓아두거나 부동산·파생금융 상품 투자에 골몰하게 될 뿐이다.

정부의 일자리 정책이 ‘나쁜 일자리라도 총량만 늘리면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는 이미 나쁜 일자리가 너무 많다. 지난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발표한 자료를 보면, 한국의 임시직 비율은 29.7%로 30개 회원국 중 두 번째로 높다. 전체 노동자 대비 저임금 노동자 비중(2006년 기준 24.5%)과 연간 노동시간(2261시간)은 회원국 중 1위를 기록했다. 사정이 이런데도 정부가 이번에 발표한 추경예산안 28조9천억원 중 일자리 창출 예산은 2조8천억원에 불과하다. 박주현 시민경제사회연구소장의 분석에 따르면, 이 중 2조원은 40만 가구를 대상으로 6개월간 진행될 공공근로에 쏟아넣는다. 한 가구당 월 83만원꼴이다. 나머지 8천억원은 사회적 일자리 사업 확대, 중소기업 인턴, 학습보조 등 분야에서 일자리 15만 개를 만드는 데 쓰인다. 1인당 예산 553만원을 고스란히 인건비로 지급한다 치면, 월평균 46만원짜리 일자리인 것이다. 특히 학습보조 인턴교사는 1인당 191만원, 월평균 16만원을 받게 된다.

교육·복지·녹색 일자리를 주목하라

전문가들은 심각한 30대 여성 고용대란을 풀기 위해서는 실업대책과 사회서비스 일자리 확충이 시급하다고 제안한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여성들의 비율이 높은 임시·일용직과 자영업 직종은 경기침체의 영향을 최일선에서 받기 때문에, ‘잡셰어링’으로 극복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도·소매나 유통서비스에 몰린 자영업 여성 노동자들이 돌봄노동 등 사회서비스 업종으로 옮겨가도록 돕고, 실업대책으로 생계를 보장해야 한다”고 밝혔다.

최근 참여연대, 민주노총, 전국실업자극복단체연대 등이 참여한 민생민주국민회의는 실업대책 태스크포스를 꾸렸다. 태스크포스가 취합·정리한 일자리 창출 정책대안을 보면, 2009년부터 4년간 16조3천억원을 투입할 경우 92만개의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 교육·복지·녹색·고용부문에서 만들어질 이 일자리들은 상시적·안정적이고, 급여수준은 월 120만~200만원 정도다. 부문별로 보면, 고용부문에서는 유한킴벌리 등에서 보이는 평생학습 체제 및 사내상담 사업에 2400억원을 투입해 1만 개 일자리를 만들고, 교육 부문에서는 9600억원을 들여 초·중·고 교사 4만 명을 신규 채용하자는 제안이 담겼다. 장애인 돌봄 서비스에 2조7천억원을 쓰면 19만개의 일자리가 생기고, 직거래 장터 같은 도농교류사업에 3600억원을 투입하면 2만3천 명이 일터를 얻게 된다. 정부가 한반도 대운하 사업에 쓰려고 한 예산 18조원이면, 벼랑에 몰린 30대 여성노동자 등 취약계층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마련해주고도 2조원이 남는다는 얘기다.

임주환 기자 eyeli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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