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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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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바지 질긴 심줄이 끊어질 듯

서울 동대문 ‘양편제’, 공장은 중국산에 밀리고 소매상은 인터넷 쇼핑몰에 밀리고
등록 2009-01-15 14:47 수정 2020-05-03 04:25

서울 동대문 북쪽에 옛날 당고개였던 작은 언덕이 있다. 성문 밖 백성들이 빈한한 삶을 인내하며 기도 올리던 곳이다. 지금도 이 동네의 겨울은 한기가 선듯하여 햇살마저 휑하다. 50여 년 전, 난리 통에 월남한 이북 사람들이 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았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옷가지를 만져 고개 아래 신작로에 내놓았다. 두고 온 고향땅이 꿈에도 삼삼했다. 신작로 주변 상가에 ‘통일’이니 ‘평화’니 이름을 붙였다. 그들이 먹고 자던 당고개가 창신동이다. 좌판을 깔았던 신작로 일대는 통일상가를 거쳐 이제 평화시장으로 두루 불린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는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다. 지난 1월 7일 창신동의 한 봉제공장에서 재단사와 미싱사들이 일하고 있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에는 봉제공장이 밀집해 있다. 지난 1월 7일 창신동의 한 봉제공장에서 재단사와 미싱사들이 일하고 있다.

지난해부터 1인 공장 부쩍 늘어

지금도 창신동 고갯마루를 올라가면 좁고 어지러운 골목길이 예전 그대로다. 골목의 한 귀퉁이씩 차지한 3~4층짜리 붉은 벽돌집이 이마를 맞대고 늘어서 있다. 집마다 층마다 유리창 밖으로 연통을 뽑아놓았다. 연기는 나오지 않는다. “다리미 스팀이 나오는 구멍인데…, 다들 일감이 없다는 거지.” 건성드뭇하나마 햇볕 드는 자리에 모여든 서너 명의 중년에게 차경남(50) 사장이 인사를 건넨다. 입 군내라도 없앨 심산으로 창신동 봉제공장 사장님들은 실없는 농담을 주고받고 있다. 그들이 부리는 20여 평 공장에서는 10여 대의 미싱기에 먼지가 쌓이고 있을 터였다.

“17살 되던 해 10월부터”라고 차 사장은 정확히 기억해냈다. “그해 추석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거든.” 그때부터 34년 동안 청바지만 만들었다. 광부들 옷에서 비롯했다는 미국의 청바지는 한국전쟁 때 국내에 들어왔다. 청바지라는 말조차 생기기 전이었다. 그 시절엔 그저 ‘작업복’이라 불렀다. 미군복, 예비군복, 교련복 따위에 물을 들여 팔았다. 면을 촘촘하게 짜서 질긴 원단을 만들고 여기에 푸르고 검은 염료를 입힌 것이 청바지다. 바다 건너 이국땅에서 그랬듯 한국에서도 청바지는 질긴 옷을 입어야 질기게 살 수 있는 서민들의 옷이었다.

“아마도 역대 최연소임이 틀림없는” 열아홉의 나이에 그는 재단사가 됐다. 나이 많은 미싱사 누나들과 신경전을 벌였다. 사장, 공장장, 그 다음이 차경남 재단사였다. 미싱사와 시다를 20여 명씩 거느렸다. 또래 대학생들은 그윽한 눈빛으로 통기타를 치며 청바지를 입었다. 그는 벌집 같은 청계피복시장에서 눈에 불을 켜고 청바지를 만들었다. 1984년에 독립해 공장을 차렸다. 한창 잘나가던 1990년대 초반에는 30명까지 직원을 거느렸다. 지금은 5명 정도 일한다.

스스로 디자인해 브랜드를 열심히 개발한 덕에 이나마 버틴다. 지난해부터 창신동에는 ‘1인 공장’이 부쩍 늘었다. 직원을 다 내보내고 혼자 미싱 붙잡고 일하는 것인데, 그나마 일거리가 없으니 1인 공장이라 부르기도 무색하다. 아예 그만둘 수는 없다. 배우고 익힌 것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망한 것이나 다름없는” 공장이 창신동 일대의 80%를 차지한다고 차 사장은 덤덤하게 말했다.

나이를 먹었거나 어리거나,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모든 계층을 끌어들이는 대표적인 옷이 청바지다. 청바지의 유행이 신발과 티셔츠, 점퍼까지 바꾼다. “청바지는 김치와 같다.” 다른 옷이 타격을 받아도 청바지는 한결같았다. “그런데 지금 그 김치마저도 밥상에서 빠지고 있다”고 말하는 곁에서 창신동 1인 사장님들은 석유난로에 은박지를 올려놓고 말없이 고기와 김치를 구워먹었다.

이들에 대한 공식기관의 조사나 통계는 없다. 지금부터 등장하는 숫자는 차 사장의 ‘추정치’다. 서울 성북구·종로구·동대문구·중구·성동구의 뒷골목에 자리한 여러 봉제공장은 줄잡아 8800여 개다. 창신동에는 10명 이내 소형 공장이 400여 개, 3~5명 정도의 가내공장이 700여 개, 1~2명의 생계형 공장이 2300여 개다. 창신동에서만 하루 최대 32만 벌의 옷을 만들 수 있다. 1만여 명의 생계가 이곳에 달려 있다.

서민들 먹고사는 게 낙후산업이라고?

이 가운데 90%는 사업자등록증이 없다고 차 사장은 추정한다. 동대문 상인들이 원단과 자재를 구해서 보내면 봉제공장에선 재단과 미싱 작업만 한다. 제조업자로 등록하기가 애매하다. 등록하면 세금도 따박따박 내야 하는데, 수입이 일정치 않은 영세업자들이 이를 꺼린 탓도 있다. 서로 미루고 덮으면서 지난 반세기를 지냈다. 사업자등록증이 없으니 은행 대출을 받지 못한다. 개인신용대출을 받거나 사채를 쓴다. 이주 노동자도 드러내놓고 고용하지 못한다. 지금은 40대 이상 중년만 남았다. 정부의 중소기업 부양 대책에서도 번번이 빠진다.

“그래도 여기가 서민들이 먹고사는 곳인데, 낙후산업이라고 밀어내면 어떡하냔 말이야.” 공장 형광등 불빛이 천을 찢어놓을 듯 부시다. 그 아래서 침침한 눈을 비비며 “농사 말고는 다른 할 일 없는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이 성공을 꿈꾸며” 일해왔다. 우중충하게 기사 쓰지 말라고 그는 당부했다. 가난하지만 실력 있는 사람들이 기술 배우며 희망 갖고 일할 수 있어야 창신동도 살고 나라도 산다고 그는 믿는다. 식판을 머리에 인 밥집 아줌마가 집요하고 찬찬한 걸음으로 창신동 골목을 내려간다.

마늘 냄새 짙은 김치찌개 그릇 위에 신문지가 대강 덮여 있다. 동대문 동쪽 누존 쇼핑몰이 저녁 8시에 문을 열면, 상인들의 늦은 저녁 냄새가 훅 거리로 쏟아진다. 동대문 상인들은 흥인문로를 기준으로 동쪽 상권을 ‘동편제’, 서쪽 상권을 ‘서편제’라 부른다. 서편제에는 소매상들이 있다. 외국 관광객을 의식한 서편제 상가에선 상인들의 밤참 냄새까지 단속한다. 도매상들이 모여 소매상들에게 물건을 파는 동편제에선 그런 닦달이 덜하다.

김현주(48·가명) 사장은 20년째 동대문에서 청바지 도매업을 하고 있다. 디자이너를 고용해 창신동 공장에 주문을 넣는다. 청바지가 나오면 쇼핑몰의 2평짜리 점포에 내다판다. 잡지도 보고 이웃 가게도 참고해 최신 디자인을 만들어 하루이틀 만에 시장에 내놓아야 산다. 상인들은 이를 ‘단납기’ 시스템이라 부른다. 동대문 상인과 창신동 봉제공장이 합작한 단납기 체제가 이들을 먹여살렸다.

중국 물건이 쏟아져 들어오던 2004년께부터 공조 체제가 흔들렸다. 소매상들이 중국산을 도매로 들여왔다. 도매상들은 판로가 막혔다. 도매상에 기대고 있던 봉제공장도 일감이 끊겼다. 그사이 소매상들은 인터넷 쇼핑몰에 뒤통수를 맞았다.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옷을 주문했다. 창신동, 동편제, 서편제, 쇼핑몰이 서로를 탓하는 일이 시작됐다. 대전 이북의 의류 상권은 모두 동대문에 흡수된 뒤였다. 동대문이 흔들리면 한국 의류산업이 다 함께 망하는 것이라고 김 사장은 생각한다.

그는 그래도 국산품을 고집한다. “중국산은 ‘깔’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눈 높은 거래처들은 색깔과 디자인이 좋지 않으면 금세 돌아선다. 그는 여성용 청바지만 다룬다. 스키니, 부츠커트, 일자바지, 청치마 등이 두루 있다. 그래도 어쩐 일인지 “사람들이 유난히 까다로워졌다.” 불경기 탓이다. 장사가 안 되니까 물건 가져가기 무서워 그런 것 같다. 김 사장은 원래 두 개의 점포를 갖고 있었다. 하나는 젊은이들을 노린 ‘영빨’, 다른 하나는 젊은 주부를 겨냥한 ‘미시빨’로 밀었다. 2007년 10월 ‘영빨’ 점포를 정리했다. 동대문 상가에서 점포를 유지하려면 월세 200만원 이상을 감내해야 한다. 보증금까지 더하면 1억원의 초기 자금이 필요하다. 매달 그렇게 벌어낼 도리가 없었다.

100만원 몰린 점포 정리, 천연덕스런 높은 건물

길 건너편에 한 덩이의 불빛이 솟아 있다. 새로 짓는 상가다. “누구는 100만원이 없어 사채 끌어쓰다 점포 정리하고 나간다는데” 저렇게 천연덕스럽게 높은 건물만 지어대면 어쩔 심산인가 싶다. 김 사장은 “있는 사람들” 놀음에 “멋모르는 사람들”이 죽어날 것이라고 걱정한다. 상가를 짓는 것은 건설업체다. 점포 분양권을 따는 것은 돈 많은 사람들이다. 그걸 상인들에게 다시 세를 놓는데, 나방이 불빛에 꼬이듯 월급 받다 퇴직한 사람들이 모여든다.

“그런 사람들, 몇 달 못 버틴다”고 김 사장은 혀를 끌끌 찼다. 그는 번듯한 월급 받으며 사는 게 평생의 소원이다. 퇴직금 받으면 됐지 뭐가 부족해 굳이 이 동네로 오는지 그는 잘 모르겠다. 경제가 나빠졌다는 건 피부로 절절히 느끼겠는데, 왜 이렇게 됐는지도 잘 모르겠다.

밤 12시 무렵 동편제 쪽은 파장 분위기에 들어간다. 건물마다 틀어놓은 댄스 음악이 쇄애쇄애 소음이 되어 빈 도로를 울린다. 쫓기듯 황급한 인파는 건너편 서편제로 몰려간다. 밀리오레, 두타 등 소매상들이 입주한 쇼핑몰 지역이다. 서편제 상인들은 이때부터 긴장한다. 자칫하면 하루 장사를 공칠 수도 있다. “돈은 없는데 줄창 꼬장꼬장해.” 정인현(28·가명) 사장이 기자만 들으라고 속삭인다. 아직 개시를 못했다. 함부로 손때 묻히며 옷을 만지작거리던 고등학생 두 명은 종내 아무 말 없이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10대들은 낮 동안 밤만 기다리는 것 같다. 쇼핑몰 두타에 점포를 낸 정 사장은 그들에게 청바지와 티셔츠를 판다. 어른들이 보면 괴기스럽다 할 만한 디자인으로 남자 아이들을 겨냥한다. 이젠 덧정이 없어져버렸지만 3년 전 처음 입점할 때만 해도 그들에게 박리다매로 팔아 돈을 벌 생각이었다. 점포를 내는 데는 집안 어른의 도움을 받았다. 곱상하게 생긴 그는 ‘있는 집 자식’처럼 보였지만, “빌린 돈 갚고 독립하려고 잠도 안 자고 일했다”고 성마르게 말했다.

줄잡아 3만여 개의 점포에 적어도 10만 명 이상이 밤을 지새우는 이곳에서 희망은 갑작스럽게, 신경질적으로 사라졌다. 처음 1년은 시장에 적응하는 셈치고 견뎠다. 혼자 사는 몸이라 당장 손해를 봐도 큰 문제는 없었다. “디자인 트렌드도 알겠고 실력에 자신도 붙어 좀 나아질 거라 생각했던” 지난해부터 오히려 심각해졌다. 디자인도 하고 주문도 하고 판매도 하면서 혼자 안 하는 것 없이 뛰어다니는데, 손님 자체가 줄었다. 부모들이 돈을 못 버니 자식들에게 용돈도 안 주는 것이라고 정 사장은 생각한다. 아무리 형편이 궁해도 부모는 아끼고 아이는 돈 쓰게 할 것이라 예측했는데, 이번 불경기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나마 이 시간에 동대문에 나오는 젊은 아이들은 주유소 아르바이트라도 하는 경우다. “내가 우는 소리 하는 것 같죠? 봐요, 지금까지 하나도 못 팔았잖아.” 시계가 새벽 1시를 넘어서고 있다.

월세와 관리비 등을 대려면 한 달에 적어도 400만원은 벌어야 하는데, 3만원짜리 청바지를 하루에 한 장 팔기도 빠듯하다. 계속 어른들한테 손 벌릴 수 없으니 카드빚 내서 살고 있다는 그는 어려운 처지의 속살을 다 말하진 않았다. “이 바닥에선 ‘어렵다’는 소문만 나도 장사 못한다”고 했다. 정 사장은 봄을 기다리고 있다. 1월은 어차피 겨울 상품 재고를 처리하는 시기다. 날씨가 풀려 봄 신상품이 나오면 그동안의 손해를 조금 만회할 수 있을지 모른다.

쓸개즙 빨아먹는 대형 포털과 쇼핑몰

디자인에 자신 있는 그는 요즘 중국 위안화가 올랐다는 뉴스를 보며 실낱같은 미련을 심는다. 중국산의 가격경쟁력이 떨어지면 품질 좋은 국내산에 다시 손님이 몰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현재 시중에 유통되는 청바지의 70%가 수입 완제품이다. 중저가류는 중국산이 장악했고, 고가 브랜드는 미국·유럽·일본에서 들여온다. “원단은 수입해도 디자인은 한국 것이던 시절”마저 옛 이야기가 되고 있다. 인터넷 쇼핑몰을 하는 친구와 동업을 해야 하지 않을까, 결국은 허탕만 치는 하루 장사를 접는 새벽마다 정 사장은 고민한다.

곰은 살아 있다. 그런데 쓸개에 빨대가 꽂혀 있다. 즙을 빨아먹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 살풍경한 이야기를 꺼내며 권진철(40·가명) 사장은 인터넷 쇼핑몰의 처지를 설명했다. 그는 2000년부터 동대문 근처에 사무실을 내고 인터넷 패션 쇼핑몰을 운영했다. 1997년 외환위기 때 다니던 건설회사가 망했다. 인테리어 사업에 손대면서 재기를 노렸지만, 끝내 주저앉았다. 아는 선배의 추천으로 쇼핑몰을 시작했다.

밤마다 동대문 상가에 나와 옷 사진을 찍어 인터넷에 올렸다. 다음날 사이트에서 물건을 본 고객이 주문을 넣으면 그날 밤에 다시 동대문에 가서 옷을 샀다. 해가 뜨면 택배로 물건을 보냈다. 잠은 2시간씩 두 번 쪼개 잤다. 동대문 상가가 문 닫는 아침 8시부터 10시까지, 그리고 배송이 끝나는 저녁 7시부터 9시까지 잤다. ‘짝퉁 단속반’으로 오해를 한 동대문 상인은 그의 멱살을 잡았다. 식구들 생각하며 졸음도 버티고 모욕도 참았다.

현재 제 사이트 주소를 가진 쇼핑몰은 3만여 개다. 그러나 실제 운영되고 있는 곳은 2천~3천 곳에 불과하다. 지난 10년 동안 망한 곳까지 다 합하면 20만 개는 될 거라고 권 사장은 말한다. 치열한 경쟁에서 그가 살아남은 것 자체가 기적이다. 문제는 “살아남은 쇼핑몰도 속으로는 다 죽어 있다”는 데 있다. 큰 기업에 쓸개즙을 내주고 있다. 광고비 지출이 전체 수입의 30%가 넘는다. 광고는 네이버·다음 등 거대 포털 사이트에 들어간다. 광고를 하지 않으면 장사가 안 된다. 옥션, 지마켓 등 대형 쇼핑몰 사이트는 최저가로 “후려치고 있다”. 옷 한 벌에 1천원 받고 판다. “동대문을 탈탈 털어도 그 값에 옷을 대량 유통할 수 있는 업자가 없다”고 권 사장은 말했다.

그는 30여 명의 직원 가운데 예닐곱 명 정도를 감원할 생각이다. 생각보다 직원이 많다고 했더니 “쇼핑몰이 고용창출 효과가 크다”고 열심히 설명한다. 동대문 상인은 직원 하나 데리고 장사하지만, 쇼핑몰을 운영하려면 상품 촬영, 웹디자인, 프로그래밍, 납품 등의 분업 체계가 필요하다. 청년들 일자리를 많이 만든다고 권 사장은 말했다. 창신동 봉제공장 차경남 사장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다. 고용창출은 청바지 자영업자들의 공통된 자부심이다.

‘고용창출’은 공통된 자부심…

그런 자부심에 상처가 나더라도 인원 감축을 해야 2009년을 버틸 수 있다. 지난해 주문은 전년에 비해 40%가 줄었다. 그는 중국산을 염가로 내놓는 대기업 쇼핑몰 앞에서도 꿋꿋하게 ‘동대문산’을 고집하고 있다. “국민이 입는 옷”이기 때문이다. 돈 많은 사람들은 외국 고급 브랜드를 입겠지만, “우리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돈 없는 청년들은 동대문 없으면 청바지를 입을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청바지 입고 겨울을 나는 서민들이 동대문 새벽 거리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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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장 “도·소매 업자들이 중국에서 물건을 들여오면서 창신동 봉제공장은 일감이 끊어졌다. 일대 공장 80% 이상은 망한 것이나 다름없다.” -차경남 KKR33 사장

도매상 “소매업자한테 물건을 파는데 물량이 절반 정도로 줄었다. 경기가 어려우니 그렇다. 우리는 국내산만 쓰는데, 소매업자들이 중국산을 갖다 쓰면서 이렇게 됐다.” -김현주(가명) 누존 o업체 사장

소매상 “인터넷 쇼핑몰 때문에 소매업자는 다 죽었다. 동대문에 나와 쇼핑하려는 사람 자체가 줄었다. 인터넷으로 주문해 집에서 받는다. 유지비도 못 벌고 있다.” -정인현(가명) 두타 ㄱ업체 사장

쇼핑몰 “오픈마켓 형태의 대형 인터넷 쇼핑몰은 최저가로 후려친다. 중소 쇼핑몰은 가격 경쟁을 할 수가 없다. 그나마 매출의 30%는 대형 포털 사이트 광고로 지출한다.” -권진철(가명) 패션쇼핑몰 ㅂ업체 사장

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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