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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른 관습 일깨운 부지런한 법리

‘올해의 판결’ 심사평… 왕중왕 자리 놓고 ‘안마사’ ‘존엄사’ 판결 끝까지 경합
등록 2008-12-26 14:57 수정 2020-05-03 04:25

한국 사회의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행정 권력에 대한 견제는 점차 강화됐고, 그 반면 법원과 헌법재판소의 기능이 중요하게 부각됐다. 그에 따라 이들 사법기관의 재판이 국민에게 미치는 영향도 커지게 됐다. 그런데 이러한 재판이 반드시 국민들의 지지를 받는 것은 아니었고, 일부는 국민의 권익에 이바지하지 못한 것들도 있었다.
한편 언론들은 이들 사법기관의 판례를 비판하는 데는 적극적이었던 반면, 전향적이고 국민을 배려하는 판례는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하는 경향이 없지 않았다. 중요한 재판임에도 간과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번에 에서는 이같은 흐름에서 벗어나 올 한 해 동안 선고된, 국민들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친 중요한 판례들을 집중적으로 다뤄보는 특집을 기획했다.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들이 12월2일 한겨레신문사 8층 회의실에 모여 어떤 판례들을 뽑을 것인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들이 12월2일 한겨레신문사 8층 회의실에 모여 어떤 판례들을 뽑을 것인지를 두고 열띤 토론을 벌이고 있다. <한겨레21> 김정효 기자

인권 잣대 하급법원 판례도 꼼꼼히

대상 판례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각 심사위원과 기타 전문가들이 추천한 80여 개의 판례들을 놓고 토의를 하여 선발했다. 추천된 판례들을 여러 분야로 나누어 각 분야별로 한 개 혹은 두 개의 판례를 선정했는데, 해당 범주 가운데 마땅한 판례가 없어서 결과적으로 선정되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그 선정 기준은 국민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종전에는 없던 새로운 법리를 제시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심사 과정에서 쉽게 의견이 모아진 것도 있었으나, 그 중요성이나 의미에 관해 심사위원들 사이에 의견이 갈린 것도 적지 않았다. 장시간의 열띤 논의 끝에 뽑힌 15개의 판례 가운데는 대법원이나 헌법재판소의 판례들뿐만 아니라, 하급법원의 판례도 상당수 포함됐다.

뽑힌 판례들을 보면, 우선 약자와 소수자 보호 분야에서는 난민 신청 당사자의 난민 인정 요건 및 증명 책임을 완화한 대법원 2007두3930 판결(2008년 7월24일 선고)과, 시각장애인에게만 안마사 자격을 인정하는 의료법이 합헌이라고 한 헌법재판소 2006헌마1098 결정(2008년 10월30일 선고)이 선정됐다. 앞의 판례는 우리나라에서 외국인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아직도 한국 사회는 외국인에게 배타적이라는 일반적인 인식을 불식시키고 외국인 난민의 인권을 신장했다는 점이 평가됐다. 뒤의 판례는 직업의 자유보다는 소수자 보호를 중시한 것으로서, 헌법재판소 스스로 과거 반대 취지의 결정을 사실상 뒤집고 장애인 보호에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혁신적인 결정이었다는 점이 중요하게 고려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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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표현의 자유와 집회의 자유 분야에서는 금지 통보된 집회라도 상경 자체 원천봉쇄는 불법이라는 대법원 2007도9794 판결(2008년 11월13일 선고)과, 집회 순위를 정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집회신고서를 반려하는 것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 2007헌마712 결정(2008년 5월29일 선고)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앞의 판례는 특히 제1심이 무죄를 선고했는데 항소심에서 유죄라고 판단한 사안을 대법원이 다시 뒤집어 무죄라고 함으로써 ‘원천봉쇄’라는 경찰의 잘못된 집회·시위 관리 관행에 브레이크를 걸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뒤의 판례는 집회 신고제를 허가제처럼 운영하고 있던 경찰의 관행에 쐐기를 박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심사위원들 사이에 의견이 모아졌다. 이외에 헌법재판소는 표현의 자유를 보호하는 여러 개의 결정을 내린 바 있으나, 종래 판례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판단돼 배제했다. 이는 아마도 심사위원들이 집회의 자유가 중요하게 된 최근의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법원의 적극적 태도 인상적

행정 분야에서는 특별사면심사위원의 명단과 약력을 공개해야 한다는 서울행정법원 2008구합31987 판결(2008년 11월13일 선고)이 선정됐다. 이는 사면권이 남용되고 있다는 일반적인 인식과, 중요한 국가 대사가 비공개 상태로 심의되고 있는 관행에 대한 우려 때문이었다. 그리고 여성 분야에서는 성희롱 행위 지점장에 대한 회사의 징계해고 처분은 정당하다는 대법원 2007두22498 판결(2008년 7월10일 선고)이, 아직 여성에 대한 성희롱을 그다지 문제시하지 않는 잘못된 관행에 경종을 울린 것으로 평가됐다. 특히 2심에서 1심의 결론을 뒤집고 해고 처분이 과도하다는 결론을 내렸는데, 대법원에서 다시 바로잡아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엄격한 보호 의지를 보인 점이 인상적이었다.

노동 분야에서는 불법파견이라도 2년 근무 때 직접고용 의무가 있다는 대법원 2007두22320 전원합의체 판결(2008년 9월18일 선고)과, 근로복지공단의 요양 불승인 처분이 근로자가 제기한 소송에서 취소되면 휴업급여에 대한 소멸시효의 항변이 신의성실의 원칙에 반하여 허용될 수 없다고 한 대법원 2007두2173 전원합의체 판결(2008년 9월18일 선고)이 높이 평가됐다. 앞의 판결은 사회적으로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의 중요성을 대법원이 진지하게 받아들여 전원재판부에 회부하고 공개 변론을 걸쳐 반대 의견 없이 대법관 14명 전원 일치로 결론을 내림으로써 논란이 많았던 문제에 대해 근로자의 권익을 옹호하는 방향으로 혼란을 제거했다는 점에서 크게 주목됐다. 뒤의 판결은 형식적인 법논리만을 따르지 않고 근로자의 권리보호를 위해 대법원이 신의성실의 원칙을 활용함으로써 적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판단했다.

가족·가사 분야에 관해서는, 친권자와 양육자를 결정함에 있어 경제력이 있는 아버지보다 자녀를 잘 키울 수 있는 어머니가 양육자가 되어야 한다는 대법원 2008므380 판결(2008년 5월8일 선고)과, 무의미한 연명 치료 장치를 제거할 것을 명한 서울서부지법 2008가합6977 판결(2008년 11월28일 선고)이 주목을 받았다. 앞의 판결은 친권자와 양육자 결정에서 자녀의 복리가 우선되어야 함을 대법원 최초로 밝힌 데 의미가 있고, 뒤의 판결은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치료 중단(존엄사)의 문제에 관해 사회적 토론의 계기를 제공했다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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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사법 절차에 관하여는 수사기관이 피의자로부터 떨어져 앉으라고 변호인에게 지시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대법원 2008모793 결정(2008년 9월12일 선고)이 형사 피의자가 변호인의 조력을 받을 권리를 실질적으로 보장하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봤다.

일반 민사 사건에 관하여는 전북 군산시 개복동 화재로 사망한 성매매 여성들의 유족에 대해 국가와 전라북도의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2005다48994 판결(2008년 4월10일 선고)과, 폭설로 인해 운전자들이 고속도로에 고립된 데 대해 한국도로공사의 배상 책임을 인정한 대법원 2007다29287, 29294 판결(2008년 3월13일 선고)이 선정됐다. 앞의 판결은 성매매 집결지 여성들의 화재 사망에 대해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의 책임을 인정함으로써 성매매 여성 인권 문제를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는 점에서 평가할 수 있고, 뒤의 판결은 종전 같으면 자연재해이니 불가항력이라고 체념했을 문제에 관해 법원이 적극적인 태도를 보인 점이 눈에 띄었다.

상충하는 가치의 판단 고심 속 결정

경제정의 분야에서는 차입매수(LBO) 방식의 기업 인수 과정에서 대가 없는 담보 제공은 배임죄에 해당한다는 대법원 2007도5987 판결(2008년 2월28일 선고)과, 아파트 시공업체가 하도급 업체들에 미분양 아파트를 떠넘기는 것은 불공정 거래에 해당한다는 서울고등법원 2008누15871 판결(2008년 11월5일 선고)이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앞의 판결에 대하여는 피인수 회사를 약탈적 기업 인수·합병(M&A)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마련됐다고 볼 수 있다는 견해가 있는 반면, 기업의 M&A를 어렵게 한다는 부정적 평가도 없지 않았다. 뒤의 판결은 경제적 약자인 하도급 업체 보호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마지막으로 올해 선고된 가장 중요한 판례가 어떤 것인가에 관해 심사위원들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후보로 거론된 것은 시각장애인에 대한 헌법재판소 결정과 불법파견 근로자도 직접고용 간주 규정이 적용된다는 대법원 판결 및 연명 치료 중단에 대한 서울서부지법 판결이었는데, 장시간의 논의 결과 불법파견 근로자 직접고용 간주 규정 적용 판결이 뽑혔다. 심사위원들이 이 판결의 손을 들어준 것은 사회적으로 절실한 문제인 파견 근로자의 고통에 대법원이 공감한 것이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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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좋은 기획을 마련한 과 장시간의 토론에 진지하게 참여한 심사위원 여러분의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심사위원들 한마디
“한국사회 뭘했나” “변호사들 고생했다” “다음엔 워스트 판결을”

윤진수 서울대 법대 교수(위원장)·금태섭 변호사·김남근 변호사·김진 변호사·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왼쪽부터)

윤진수 서울대 법대 교수(위원장)·금태섭 변호사·김남근 변호사·김진 변호사·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왼쪽부터)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팀장·박영주 변호사·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이종수 연세대 법대 교수·최강욱 변호사 (왼쪽부터)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팀장·박영주 변호사·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이종수 연세대 법대 교수·최강욱 변호사 (왼쪽부터)




윤진수 서울대 법대 교수(위원장)
불러주셔서 영광이자 부담이었다. 위원들의 얘기를 들으며 세상엔 여러 시각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학교에서 민사를 가르치지만 다른 시각의 얘기들을 들어보니 유익했다.

금태섭 변호사
사실 법이 소수자를 보호하자는 것인데, 인기 없는 논리라도 잘 살려줘야 하지 않나. 그런데 언론에서 보도되는 것들은 정치적인 부분만을 그대로 옮기는 측면이 있다. 다음에는 워스트 판결도 뽑아서 우리가 지지하지 않는 것도 한번 섬세하게 살펴봤으면 한다.

김남근 변호사
조망권 등 생활환경에 대해 국민 일반은 높은 가치를 부여하고 있는데, 법원은 최근 너무 엄격하게 잘 인정을 안 해주는 판결 흐름을 보이고 있어 아쉽다. 민생·서민 문제에서 소비자분쟁조정위원회,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 공정거래위원회 등에서도 좋은 결정이 많은데, 언론이 많이 알려주면 판결에도 거꾸로 영향을 미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김진 변호사
왜 민변에서 이런 일을 먼저 잘하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비판적 변호사 단체들이 좀더 잘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박경신 고려대 법대 교수
판결이 나왔을 때 아무리 나쁜 판결일지라도 장기적으로는 법원의 논리를 어떤 식으로든 이용해서 좋은 판결을 이끌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사회적인 영향과 의미도 중요하지만, 그것만큼 법리적·논리적 부분들도 충분히 다뤄줬으면 한다.
박근용 참여연대 사법감시팀장
실은 과 참여연대는 경쟁관계다. (웃음) 예전에 걸림돌 판결과 디딤돌 판결을 뽑는 기획을 했다가 욕도 먹었다. 앞으로 인원도 보강하고 해서 비슷한 기획을 할 계획이다. 더 잘해보겠다.

박영주 변호사
판례를 하나씩 놓고 얘기하다 보니 변호사들이 이런 판결 하나하나를 이끌어내려고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생각에 공감이 많이 됐다. 이번에 뽑힌 판결 같은 판결들이 계속 많이 나오면 좋겠다.

오창익 인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
올해 판결을 돌아보니 ‘우리 사회가 도대체 뭘 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성과가 별로 없는 게 판례에서도 나타난 듯해 씁쓸하다.

이종수 연세대 법대 교수
헌재에 대해 중요한 지적이 오늘 많았는데, 간통죄와 종부세, 안마사 등 일련의 판결들을 보면 여론에 편승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헌재가 이런 식으로 여론재판을 하게 되면, 국민들은 사회적 이슈가 생길 때마다 여론에 호소하게 된다. 헌재가 이런 점을 알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줘야 한다.

최강욱 변호사
정치가 제 기능을 못한 채 후퇴해 모든 갈등이 사법적 판단을 구하려 몰려드는 사법 과잉의 시대에 과연 좋은 판결을 어떻게 선별할 것인지 고민이 됐다.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후보 판결이나 선정된 판결 중 고등법원 판결이 귀하다는 점이다. 많은 법률가들이 마지막 사실심인 고등법원이 매너리즘에 빠져 퇴행적인 모습을 보이는 경우를 많이 접하며 우려하고 있다.



윤진수 ‘올해의 판결’ 심사위원장·서울대 법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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