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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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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주의 광풍이 몰아칠 것이다

한나라당 내 반대파 압박, 경제위기 강조하며 보수 대집결… ‘무당파 정권’ 이어가는 일본 닮아가나
등록 2008-12-11 15:15 수정 2020-05-03 04:25

12월1일 낮, 서울 마포의 한 음식점. 정정길 대통령 실장이 친박계 의원들 6명과 자리를 함께했다. 한나라당 김세연·이정현·이진복·유재중·허원제·현기환 의원이 참석했다. 정 실장은 자리에 앉자마자 입을 열었다.
“제가 여러분들을 뵙자고 한 것은 내년의 엄중한 상황 때문입니다. 내년 초 상황이 매우 어려워질 겁니다. 3~4월이 되면 더 어려울 겁니다. 내년 2월부터 대졸 실업자들이 쏟아지고 3~4월부터 중소기업들이 도산하게 되면, 국정운영이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을 겁니다. 이들이 (상황을) 구조적 문제로 돌리게 되면 현 정부나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발전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습니다. 예산안과 부수 법안들이 빠르게 처리돼야 그런 어려움이 좀 덜어지게 되지 않겠습니까.”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직후인 1998년 1월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벌어진 금 모으기 운동 현장. 금 모으기 운동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애국심을 자극하는 태극기가 넘쳐났다. 경제난은 애국심을 자극하는 가장 좋은 계기였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직후인 1998년 1월 서울의 한 백화점에서 벌어진 금 모으기 운동 현장. 금 모으기 운동이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애국심을 자극하는 태극기가 넘쳐났다. 경제난은 애국심을 자극하는 가장 좋은 계기였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그 이튿날 오전, 이명박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세계 금융위기는 내년 상반기가 최악이라는 것이 공통된 의견”이라고 말했다. 이날 오후 ‘제45회 무역의 날 기념식’에 참석한 이 대통령은 이희범 한국무역협회 회장과 말을 나누다 “내년 상반기가 최악의 상태고, 그 다음에 2~3% 마이너스 할 거야. 하반기에는 성장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3월 위기설’ 강조의 진상

상당수 언론들은 대통령과 정정길 실장의 발언을 이른바 ‘3월 위기설’과 묶어 설명했다. 국내 시중은행이 외국계, 특히 일본계 은행에서 빌려온 단기외채 만기가 내년 3월에 한꺼번에 몰리면서 외환이 부족할 수 있다는 위기론이다. 상당수 전문가들과 기관들이 우려하는 바다. 삼성증권이 12월1일 낸 보고서에는 이렇게 돼 있다.

“올 연말 외국은행이 국내 지점을 축소하고, 내년 3월 일본 은행들이 결산기를 앞두고 자금을 회수할 경우 환율이 1500~1700원으로 올라 증시 불안을 키울 수 있다.”

‘시골의사’로 유명한 경제평론가 박경철씨도 11월29일 출판기념회에서 “한국 경제의 최대 고비는 내년 2~3월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얼마 전의 ‘9월 위기설’은 겨우 넘겼지만, 내년 3월에는 ‘진짜 센 놈’이 올 수도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이명박 대통령과 그를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정정길 대통령 실장이 잇따라 이런 적색경보를 켠 이유는 뭘까. 정 실장과 오찬을 함께한 친박계 의원의 말이다.

“전후 맥락과 뉘앙스를 보면, 자유민주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반정부 시위 상황이 온다는 뜻이 아니었다. 우리 친박들에게 ‘예산안 빨리 통과 안 시켜주고, 국정에 협조하지 않으면 한나라당의 재집권이 어려운 상황이 올 수도 있다. 당신들이 모시는 박근혜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취지였다.”

다른 친박계 의원도 “개혁 법안이 빨리 처리돼야 민생경제를 살릴 수 있고, 내년에 그런 사태가 오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취지였다. (체제 전복 등은) 청년실업 문제 등을 강조하다 보니 어휘가 그렇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박근혜 전 대표를 중심으로 한 친박계 의원들에 대한 압박, 혹은 협박이었던 셈이다. 여당 내의 야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민생21’(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하는 한 초선 의원도 최근 청와대 쪽에서 ‘경고’를 받았다는 설도 돌고 있다. 당직은 물론 공천에서도 배제될 수 있다는 암시였다고 한다.

반대 혹은 중립파에 대한 압박 또는 협박. 보수파 전체는 물론 당 전체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하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준다. 리더십과 정치력 부족이 원인이다. 정치력이 부족하면 무력이나 완력의 유혹을 느끼게 된다. 언어적 압박도 무력이다.

이명박 대통령이 경제위기를 계속 강조하는 것은, 대국회 압박 성격이 짙어 보인다. 이 대통령은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기구(APEC) 정상회의에 동반한 안상수 한나라당 의원에게 “새해 예산안, 법안 등의 처리가 왜 이렇게 지지부진하냐. 예산안이나 법안들이 시원스럽게 국회에서 통과돼야 일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 내년부터는 경제 살리기를 위한 여러 가지 개혁 조처를 취해야 하는데 법안이 통과되지 않고 있어 답답하다”고 불만을 터트린 바 있다.

민생 없는 ‘경제 살리기 민생 법안’

12월 초의 압박 대상은 일단 여당 내의 ‘야당’이다. 12월 중순 이후로는 민주당 등 야당에 대한 압박을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른바 ‘경제 살리기 5대 핵심 민생법안’이 우선 통과되기를 바라고 있다. △대기업을 위한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사실상 폐지) △최저세율 13%, 최고세율 25%인 현행 법인세를 2010년까지 10%, 20%로 낮추는 법인세법 개정안 △상속세를 현행 30억원 한도 20%의 공제율에서 100억원 한도 40%로 확대하는 상속세 개정안 △은행지주회사가 비금융회사(제조업체 등)를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금융지주회사법 개정안 △사모투자전문회사(PEF)가 소유할 수 있는 은행 지분을 넓혀주는 은행법 개정안이다. 민생이라는 외피를 쓰고 있지만, 서민과의 직접적 연관성을 찾아보기 힘든 법안들이다. 민주당에서는 상속세와 법인세 개정안을 종부세와 함께 ‘부자 감세안’이라고 주장한다. 이른바 ‘반민생 법안’이란 딱지도 붙여놓은 상태다.

12월3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제도가 개악되고 있다며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제난 속에서 애국주의가 물결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12월3일 여의도 한나라당 당사 앞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최저임금제도가 개악되고 있다며 항의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제난 속에서 애국주의가 물결칠 때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것은 노동자, 특히 여성 노동자들이다. 한겨레 김종수 기자

청와대와 한나라당은 대기업·신문사·외국 자본의 방송 진출 허용을 골자로 하는 언론법 개정안도 이번 국회에 발의할 예정이다. 민주당에서는 언론법을 사이버모욕죄 신설(형법 개정안)과 국정원법 개정안, 집시법 개정안과 함께 ‘반민주 법안’으로 규정하고 있다. 청와대와 한나라당도 이번 국회에서 언론법·국정원법·형법 개정안 등을 통과시키는 것은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중소기업 부도로 인한 실직자와 대기업에서 해고된 비정규직, 취업 못한 졸업생 등이 한꺼번에 쏟아지고, 이들이 거리로 나오게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수 있다. 이들의 행동이 ‘정부나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발전하는 상황’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가권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질 수 있다. 인터넷에서의 비판을 사이버모욕죄로 처벌할 수 있고, 집회에서 가면이나 복면을 쓰는 것 자체로 처벌할 수 있도록 집시법을 고치는 것은 이런 불안감을 전제로 한다. 지난 4~6월의 촛불을 넘는 대규모 저항이 올 수도 있다는.

자민당 신임 여부만 묻는 일본 투표

최재천 법무법인 한강 대표변호사(전 의원)는 “이명박 정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바탕으로 집권했지만, 지금과 같은 허약한 지지 기반에서 통치를 계속하기 위해서는 기득권과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강행할 가능성이 높다”고 우려했다. 그는 “언론법을 고쳐 대기업 방송, ‘조·중·동’ 방송을 만들고,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는 명목으로 대기업을 노골적으로 밀어주는 체제를 굳히고, ‘3불정책’을 철폐해 좋은 대학을 갈 수 있는 기회가 사교육과 돈으로 세습될 수 있는 구조가 만들어지게 될 것”이라며 “이렇게 되면 기득권의 권력이 극대화된, 우익 사회가 된다”고 말했다.

‘경제를 살리자’ 이데올로기가 그 기반이 될 가능성이 높다. 미네르바는 최근(11월18일) 다음 아고라에 “이제 조만간 대대적인 애국주의 광풍이 몰아칠 것이다”라는 글을 올렸다. 미네르바는 “한국 경제의 대중적인 패턴을 보면 ‘경제위기=애국주의 열풍’으로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며 “지금 정부 후원을 받는 시민단체들을 중심으로 세세한 세부 플랜이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는 “내년 초부터 시민단체와 종교계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경제 애국주의 열풍이라는 게 불어닥칠 것”이라고 예언(?)했다. 애국주의 열풍만큼 효과적으로 반대의 목소리를 잠재우기 쉬운 도구도 없다. 애국주의 열풍은 자연스럽게 ‘보수 대단결론’으로 이어질 것이다. 박근혜계의 협조 여부와는 무관하게.

이런 상황에서 무당층이 50%를 넘는 것은 불길한 조짐이다. 우파가 다수를 차지하는 정치 체제와 50%의 무당층이 만난 상황은 이미 일본에서 현실화했다. 극우화의 형태로. 일본에서 무당층이라는 용어가 처음 나온 것은 1969년을 전후로 한다. 일본의 자민당과 사회당은 69년 총선에서 전후 최저 투표율(68.51%)을 기록했다. 양당 모두 지지자가 대폭 감소한다. 감소폭은 사회당이 더 컸다. 사회당에서 이탈한 이들이 무당층의 첫 토대가 됐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이때부터 무당층이 사회당 지지층보다 많았다. 이후 투표는 사실상 자민당의 신임 여부만을 묻는 ‘신임형’ 선거 형태가 됐다. 사회당은 점차 사라지는 듯했다. 그런 사회당에 기적이 찾아왔다. 1989년 참의원 선거였다. 사회당이 처음으로 다수당이 된 것이다. 사회당은 집권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민당과 연립하는 모험까지 불사했다. 이 순간부터 사회당과 자민당의 차이가 무너져내렸다. 전후에 유지됐던 정당의 정책적 대립이 사라졌다. 일본 사회를 지키던 안전선이 일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일본 제국주의의 국가인 ‘기미가요’와 국기인 ‘히노마루’가 부활했다. ‘북한 때리기’가 일상화됐다. 이를 통해 ‘신가이드라인’과 주변사태법이 통과됐다. 이를 기반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날 경우 일본 자위대는 주일미군을 돕는 형식으로 참전할 수 있게 됐다.

2001년 이후로 계속 ‘무당파 정권’

흔히 ‘도청법’으로 불리는 ‘통신방수법’(通信傍受法)이 통과됐다. 명목은 ‘옴진리교’나 야쿠자 등 조직범죄에 대응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경찰·검찰 권력이 좌익 세력과 진보적 단체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데 활용되고 있다. 전쟁과 군대 보유을 금지한 평화헌법 9조는 지금도 우익들의 끊임없는 십자포화에 시달리고 있다.

무당파 정치는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정권의 탄생으로 정점을 찍었다. 고이즈미 내각은 ‘정당 불신’이라는 유권자의 심리를 이용한 최초의 무당파 정권이란 평가를 받는다.

물론 한국과 일본은 다르다. 박상훈 후마니타스 대표는 “일본의 무당층은 무기력하지만, 한국의 무당층은 비판적이다”며 “지난 4~6월의 촛불 정국에서 볼 수 있듯 이명박 정부가 지나친 정책을 취하면 언제든 행동으로 나설 준비가 되어 있는 무당층”라고 분석했다.

누구도(Nobody) 서민의 삶을 지켜줄 수 없는 2008년 12월의 지금, 우리는 이렇게 스스로를 지켜야 할 상황을 맞고 있다.

이태희 기자 hermes@hani.co.kr·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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