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 ‘구대륙’에서 건너온 이주민들이 ‘신대륙’에 건설한 최초의 도시다. 1606년 6월 영국왕 제임스 1세가 ‘버지니아컴퍼니’ 설립 허가를 내줬고, 그해 12월 104명의 ‘정착민’이 대서양을 거너 체사피크만 연안의 버지니아 땅에 도착했단다. 어빈 조든 버지니아주립대 교수(역사학)가 이 학교 홈페이지에 올린 관련 자료를 보면, 버지니아컴퍼니는 이듬해인 1607년 5월 북아메리카 대륙 ‘최초’의 정착민 도시 건설을 시작했다.
제임스타운은 ‘최초’란 기록을 숱하게 보유하고 있다. 북미 대륙 최초로 성공회 교회가 1607년 들어섰고, 같은 해 신대륙에서 처음으로 크리스마스 축하 파티가 열렸단다. 북미 대륙 최초로 옥수수술을 증류해 위스키를 빚어내거나, 담배를 상업적인 목적으로 대량 재배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곳이다. 그리고 1619년, 북미 대륙에서 처음으로 아프리카인들이 제임스타운에 발을 내디뎠다. 그래서 버지니아주 제임스타운은 미국 노예제의 발상지로 불린다. 미국이란 나라가 만들어진 게 1776년 7월4일이니, 노예제의 역사는 미국의 역사보다 150년 가까이 앞선 셈이다.
인터넷 백과사전 ‘위키피디아’는 미 역사에서 흑인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가장 높았던 때가 1790년이라고 꼽는다. 당시 흑인은 미 전체 인구의 19.3%인 75만7천여 명에 달했단다. 이 가운데 약 92%인 69만7천여 명이 노예 신분이었다. 노예제 찬반 여부를 놓고 핏빛 내전까지 치른 끝에, 1865년 수정헌법 제13조가 통과되면서 마침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됐다. 그럼에도 차별의 역사는 쉬이 끝나지 않았다. 20세기 들어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으니, 대표적인 사례가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끈질기게 생명력을 이어간 ‘인종간 결혼 금지법’(이른바 1924년 인종통합법)이다.
지난 1967년 미 대법원이 위헌 판결을 내리기 전까지 미 남부 지역을 중심으로 한 17개 주에서 인종간 결혼을 주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우연찮게도 위헌판결을 이끌어낸 ‘러빙 사건’의 무대 역시 버지니아주였다. 사건은 대략 이렇다. 버지니아주 출신 백인 남성 리처드 러빙과 흑인 여성 밀드레드 제터는 ‘인종간 결혼 금지법’을 피하기 위해 1958년 6월 워싱턴 D.C.에서 결혼을 했다. 당시 버지니아주법은 흑인은 물론 어떤 ‘유색인종’도 백인과는 결혼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버지니아로 돌아온 러빙 부부는 이내 침실을 급습한 경찰에게 체포돼 재판에 회부됐다.
이듬해 1월6일 러빙 부부는 유죄가 인정돼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5년을 선고받았다. 형을 유예하는 조건은 부부가 버지니아 땅을 떠나는 것이었다. 1심 재판 판사 리온 바질은 당시 판결문에서 18세기 독일의 생리학자 요한 프리드리히 블루멘바흐가 내놓은 ‘인종 분류법’을 차용해 이렇게 지적했단다.
“신께선 인간을 백인과 흑인, 황인종과 말레이계, 적인종(아메리카 원주민) 등으로 구분하시고, 그들은 서로 다른 대륙에 나눠 살도록 하셨다. 인종간 결혼은 이런 신의 섭리에 개입하려는 짓이나 마찬가지다. 신께서 인종을 분리해놓으신 것은 인종이 서로 섞이는 걸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풀려난 러빙 부부는 워싱턴 D.C.로 보금자리를 옮겼고, 1963년 11월 전미민권연맹(ACLU)의 도움을 받아 위헌소송을 내기에 이른다. 위헌재판이 시작될 무렵 메릴랜드주는 자발적으로 ‘인종간 결혼 금지법’을 폐기했고, 위헌판결이 나온 뒤 버지니아를 포함한 16개 주에서도 흑인과 백인의 결혼이 법적으로 허용됐다. 불과 41년 전의 일이다.
버지니아주의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지난 11월4일 버지니아에서 작지만 의미 있는 변화의 조짐이 싹을 틔웠다.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후보’인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가 존 매케인 공화당 후보를 4.2%포인트 차로 따돌린 게다. 〈AP통신〉을 비롯한 상당수 미 언론들은 “버지니아(선거인단 13명)가 오바마 후보에게 넘어간 게 매케인 후보가 일찌감치 패배 시인 연설을 하게 된 결정타였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럴 법도 한 게, 버지니아주는 전통적으로 공화당의 아성이었다. 버지니아주에서 민주당 대선 후보가 마지막으로 승리를 거둔 게 대체 언젠가? 민권운동이 한창이던 1964년 대선 때 린든 존슨 후보가 승리를 거둔 이후 44년 동안 민주당은 버지니아주에서 단 한 차례도 공화당을 이긴 적이 없다. 버지니아의 변화는 미국의 변화로 이어질 수 있을까?
미 중앙정보국(CIA) 자료를 보면, 2008년 7월 현재 미국의 인구는 3억382만여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흑인 인구는 전체의 13%(약 3900만 명)를 밑도는 반면, 백인은 80%에 육박한다. 미국은 여전히 ‘백인의 나라’다. 차별의 역사가 긴 만큼 인종간 인식의 격차 또한 넓고 깊다. 〈AP통신〉이 지난 8월27일부터 9월5일까지 스탠퍼드대학에 맡겨 2200여 명의 성인을 대상으로 실시해 내놓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백인 응답자 가운데 ‘인종차별이 극심하다’고 답한 사람은 전체의 10%에 그친 반면 흑인은 무려 57%에 이른다. 232년 만에 탄생한 최초의 흑인 대통령을 바라보며 미 흑인 유권자들이 뿌린 눈물의 정체는 기쁨보다 설움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미국에서 여성 참정권이 공식 인정된 것은 1920년의 일이다. 성별에 따른 참정권 제한을 금지한 수정헌법 제19조가 그해 의회 비준을 받았다. 흑인 참정권의 역사는 그보다 조금 더 기구하다. 1870년 의회를 통과한 수정헌법 제15조는 인종에 따른 참정권 제한을 엄격히 금지했지만, 법과 현실의 거리는 멀고도 험했다. 투표 의지를 보이는 흑인에 대한 무차별 폭력과 위협은 기본이었다. 1890년부터 1908년 사이, 남부 10개 주에선 흑인의 참정권 행사를 가로막기 위해 투표자 문맹 테스트나 투표세 등을 신설하는 기민함을 보였다.
이른바 ‘짐크로법’으로 불리는 각종 인종분리 관련 법도 줄줄이 만들어졌다. 공립학교에서, 공공장소에서, 대중교통에서, 화장실과 식당에서까지 흑인과 백인의 자리는 명확히 법으로 정해져 있었다. 민권운동의 함성이 절정에 이르렀던 1964년과 1965년 각각 민권법과 투표권리법이 의회를 통과하기 전까지 미국은 ‘분리된 채 평등한’ 땅, 아파르트헤이트의 나라였다. 그 뒤엔 달라졌을까?
백인의 인종감정을 교묘히 자극해미 정치사에서, 적어도 1930년대 이전까지만 해도 흑인들은 공화당에 온정적이었다. 누가 뭐래도 공화당은, 1862년과 1863년 두 차례에 걸쳐 노예해방령을 내린 에이브러햄 링컨의 정당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공황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서 살아남은 흑인들을 보듬은 것은 민주당의 ‘뉴딜정책’이었다. 민주당에 대한 흑인들의 애정은 1960년대 민권운동과 존 케네디-린든 존슨 행정부를 지나면서 더욱 굳건해졌다.
이 무렵 흑인들의 투표 참여가 급격히 늘면서 선거에서 고전하던 공화당은 이른바 ‘남부전략’을 고안해냈다. 남부 지역에서 흑인들의 투표 참여율이 높아질수록 백인 유권자들이 위기감을 느끼면서 공화당에 더 많은 표를 던질 것이란 계산에 기반한 ‘정치공학’이었다. 공화당 정치인들은 ‘법 질서 수호’와 ‘주 정부 권한 강화’를 부르짖는 이면에서, 흑인들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는 백인들의 인종감정을 교묘히 자극했다. 흑인 인권운동의 상징인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암살된 해인 1968년에 치러진 대선에서 리처드 닉슨 공화당 후보가 낙승을 거두면서 빛을 발하기 시작한 이 전략은 1970~80년대를 거치면서 미국판 ‘지역감정’으로 발전해나갔다.
공화당 지도부가 남부전략의 폐해를 인정하고 공식적으로 사과의 뜻을 밝힌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지난 2004년 대선에서 흑인 유권자 가운데 조지 부시 대통령에게 표를 던진 비율이 10명 가운데 1명꼴에 그친 것으로 나타난 게 결정적 계기였다. 는 지난 2005년 7월14일치에서 켄 멜먼 당시 공화당전국위원회(RNC) 위원장이 전미유색인지위향상협회(NAACP) 총회에서 한 연설 내용을 따 이렇게 전했다.
“1970년대부터 80년대와 90년대를 거치면서 민주당은 아프리카계 미국인(흑인) 공동체에서 지지 기반을 강화해나갔다. 우리 공화당은 이에 대해 적절히 대처하지 못했다. 일부 공화당 인사들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유권자들의 표심을 얻는 대신, 인종간 대립을 부추겨 정치적 이득을 챙기려 했다. 오늘 공화당 전국위원장으로서 이 자리에서 여러분께 말씀드린다. 분명히 잘못한 일이었다.”
오바마 당선자는 지난해 2월10일 대선 출사표를 던졌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서겠다는 뜻을 밝히는 자리로 그는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의 옛 주의회 의사당 건물 앞을 선택했다. 이유는 분명했다. 1858년 6월16일 에이브러햄 링컨이 공화당 연방 상원의원 후보로 지명된 뒤, 노예제 폐지 문제로 갈라선 미국 사회의 단합을 호소하는 명연설을 남긴 곳이기 때문이다. 노예의 후손, 미 흑인 유권자들의 ‘해원 굿’을 시작하는 장소로는 이만한 곳도 없었을 터다.
1902년생의 ‘자유’ 투표는 환갑 넘어서“미국에 마침내 변화가 찾아왔다.” 11월4일 밤 대선 승리가 확정된 뒤, 시카고의 그랜트파크에 마련된 연단에 오른 오바마 당선자는 상기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1963년 8월28일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내겐 꿈이 있습니다’란 연설을 한 지 40년 만에 ‘역사’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이날 연설에서 그는 링컨을 입에 올렸고, 1960년대 민권운동 시대의 구호인 ‘우리 승리하리라’를 거론했다. 그리고 조지아주 애틀랜타에 사는 106살 흑인 여성 앤 닉슨 쿠퍼의 삶도 얘기했다. 오랜 선거운동 기간에 오바마 당선자는 ‘민권운동’과 ‘인종’ 문제를 가급적 에둘러 표현하려 노력해왔다. 대통령 당선자 신분으로 한 첫 번째 연설에서 이 문제를 정면에서 거론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106살이면 1902년생이다. 앤 닉슨 쿠퍼가 법적으로나마 ‘자유롭게’ 투표를 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나이 환갑을 넘긴 뒤였을 터다. 〈CNN방송〉은 이날 쿠퍼가 보호자 2명의 부축을 받으며 휠체어를 타고 투표장을 찾았다고 전했다. 고난의 세기를 버텨낸 그는 ‘21세기형 최첨단 터치 스크린 투표기’에 주름진 손을 얹고, 생애 처음으로 흑인 대통령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그는 방송과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죽을 시간도 없었다. 오바마 후보가 당선되지 않아도 좋다. 그저 그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지명된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사상 첫 흑인 대통령이 탄생한다면…. 글쎄, 106살 먹은 늙은이한테도 정말 엄청난 일 아니겠나?”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영상] “대통령이 자꾸 거짓말”…수능 마친 고3도 서울 도심 ‘퇴진’ 집회에
정부, 사도광산 추도식 불참 결정…‘굴욕외교’ 비판 피하기
82살까지 살아도 65살부턴 골골…‘건강한 노화’는 꿈이런가
“국민 요구 모두 거부하니”…서울 도심서 ‘윤 대통령 거부’ 행진·집회
“명태균에 아들 채용 청탁…대통령실 6급 근무” 주장 나와
‘미국 최고 의사’ 84살 김의신 “암에 좋은 음식 따로 없어, 그 대신…”
“박장범 사장 임명으로 ‘김건희 방송’ 전락…국민과 함께 복원할 것”
‘1호 헌법연구관’ 이석연, 이재명 판결에 “부관참시…균형 잃어”
탄두가 ‘주렁주렁’…푸틴이 쏜 ‘개암나무’ 신형 미사일 위력은
성균관대 교수·동문들 “윤석열 퇴진…사회적 연대 재건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