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러다임 시프트.’ 기존의 담론이 하루아침에 무너져내렸다. 진자의 추는 반대편으로 이동했다. 말 그대로, ‘미국이 변했다’. 어제의 금과옥조는 오늘의 저주다. 어딘지 낯이 익지만, 그럼에도 새롭다. 47살 버락 오바마 민주당 후보의 당선으로 막을 내린 2008년 미 대선은 가히 ‘혁명적’이라 부를 만하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가? 2008년 11월 미 정가의 현실을 살피기 위해서, 잠깐의 시간여행을 떠나보자.
“미국의 정치는 경향적으로 약 30년에 한 번씩 격변기를 맞는다. 보수 진영이 진지를 아무리 굳건히 구축해도, 강력한 정부를 원하는 새로운 시대는 어김없이 도래해왔다.” 1992년 11월3일 대선 직후 미 시사주간지 은 역사학자 아서 슐레진저의 말을 따 이렇게 전했다. 남부 아칸소주 주지사 출신으로 연방정치 무대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46살의 정치 신인 빌 클린턴이 백악관에 입성하는 파란을 연출한 게다. 로스 페로 개혁당 후보의 출마로 보수 진영의 분열이란 ‘외생 변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변화’와 ‘희망’이란 구호만으로 선거인단 수에서 357 대 168로 현역 대통령을 물리쳤다. 상하 양원의 우위까지 고스란히 지켜냈으니, ‘혁명적’이란 수식어를 붙일 만했다.
의 지적처럼, 20세기 미 정치사는 주기적인 격동을 보여왔다. 1901년 42살의 나이에 대통령이 된 시어도어 루스벨트도 그렇다. 공화당 개혁파의 수장이었던 그는 집권 기간 내내 날로 커지는 독점자본의 폐해를 막기 위해 동분서주했고, 미 역사상 처음으로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 도입을 추진했다. 대공황의 혼돈 속에 1933년 집권한 민주당 출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뉴딜정책으로 늪에 빠진 미국을 일으켜세웠다. 1961년엔 ‘뉴프런티어’를 내세운 존 케네디가 집권했고, 그가 암살된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린든 존슨은 ‘위대한 사회’를 내세워 뉴딜의 적통을 계승했다. 클린턴 행정부의 등장 시점은 ‘30년 주기설’의 화룡점정이었다. 시계를 조금만 더 뒤로 돌려보자.
“정부가 문제의 해법일 수 없다. 정부 자체가 문제의 일부다.” 1981년 1월 취임식에서 공화당 출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유력 정치인의 선거유세에서 ‘찬조연설’이나 하던 ‘B급 배우’에서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거쳐 백악관에 입성한 레이건 대통령 역시 현역 대통령(지미 카터)을 물리친 ‘정치 신인’이었다. 이후 민주당은 무려 12년 동안 백악관 주변을 맴돌며 절치부심해야 했다. 그새 로널드 레이건은 ‘작은 정부, 낮은 세금, 자유로운 시장’을 구호 삼아 ‘레이거노믹스’를 만들어냈고, 소련과의 극한 대결에 골몰해 과도한 국방예산을 쏟아부으며 재정적자를 키웠다. 이 시절 미국의 무역적자마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천문학적인 ‘쌍둥이 적자’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냉전은 미국의 승리로 막을 내렸고,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와 벌인 ‘열전’에서도 압승을 거뒀다. 세계는 안전해졌고, 더 이상 적은 없었다. 미국은 유일 초강국으로 세계를 호령했다. 그런데도 무명의 정치 신인에게 발목이 잡혔다. 막대한 재정적자는 연방정부의 발목을 잡았고, 서민경제의 어려움은 민주당 시절의 ‘큰 정부’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성공적인’ 집권 1기를 보내고도 클린턴에 져 재선에 실패했으니, 레이건의 뒤를 이어 집권한 조지 ‘아버지’ 부시로선 억울했을 것이다.
9·11이 네오콘에는 기회로하지만 클린턴 집권의 ‘기적’도 오래가지 못했다. 1994년 중간선거에서 10년간 유지해온 상하 양원의 우위를 공화당에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다. 집권 이후 ‘균형 예산’이란 ‘중도적 허울’에 가려, 복지정책 등에서 적극성을 띠지 못한 탓이다. 근본주의 기독교 우파세력과 결탁한 공화당 강경론자들이 그 새를 비집고 파고들었다. 이른바 ‘미국과의 계약’으로 공화당 혁명을 이뤄낸 게다. 공화당이 하원에서 다수당이 된 것은 40년 만이었고, 상원 다수당이 된 것은 2차 대전 이래 불과 네 번째였다. 당시 이 실시한 출구조사에서 유권자 2명 중 1명은 공화당에 투표한 이유로 ‘클린턴 행정부에 대한 실망감’을 꼽았다. ‘종교의 힘’으로 알코올중독을 이겨낸 조지 ‘아들’ 부시가 이때 텍사스 주지사에 선출되면서, 공화당의 ‘미래’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공화당 혁명을 진두지휘한 뉴트 깅리치는 하원의장에 올라 ‘부패한 복지국가’란 말로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60년 세월 차곡차곡 쌓아온 복지국가 모델이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했다. 10대 미혼모에 대한 복지 혜택은 하루아침에 사라졌고, 난민 인정을 받은 경우를 제외한 합법 체류 외국인에 대한 복지 혜택도 폐지됐다. 노인(메디케어)과 빈민층(메디케이드)에 대한 의료지원 예산도 4년 안에 30% 삭감하겠다는 계획이 발표됐고, 빈민지원 예산도 35% 삭감하겠다는 발표가 잇따랐다. ‘보수의 복수’였다.
1996년 대선에서 49%의 낮은 투표율 속에 클린턴 대통령이 재선에 성공했지만, 팡파르는 울리지 않았다. 클린턴 대통령은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이후 재선에 성공한 유일한 민주당 출신 대통령이란 기록을 얻었지만, 상하 양원을 공화당 통제 아래 둔 채 취임하는 첫 번째 민주당 대통령이란 멍에도 아울러 써야 했다. 반면 공화당은 의회 장악력을 더욱 키우며 집권을 예감했다.
2000년 대선으로 마침내 ‘네오콘’의 신세기가 활짝 열렸다. ‘아들’ 부시의 집권은 레이건 행정부의 ‘역사적 복원’과 동의어였다. 21세기 최악의 참극 중 하나로 꼽힐 ‘9·11 동시테러’도 네오콘 진영엔 되레 기회가 됐다. 사건 발생 단 45일 만에 변변한 토론조차 없이 ‘애국법’이 의회를 통과했다. ‘개인의 자유’를 최고의 덕목으로 치던 미국은 삽시간에 법원의 허락 없이도 개인의 전화를 도청하거나, 이메일을 열어볼 수 있는 나라가 됐다. ‘안보’가 곧 ‘영장’이었다.
네오콘 이념의 세계화는 신념에 기반한 전쟁으로 물화했다. 거짓에 기댄 전쟁이 무고한 피를 뿌리기 시작했다. 그 한편에서, 뉴딜의 초석을 무너뜨리기 위한 또 다른 ‘성전’도 벌어졌다. 규제는 풀었고, 세금은 낮췄다. 소수인종 보호법에 대해선 백악관이 직접 나서 딴죽을 걸었다. 닷컴 버블 붕괴로 휘청이던 경제는 부동산 버블로 받쳤다. 남의 돈으로 쓰고, 마시고, 사들였다. 경고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네오콘은 말했다. “미국에 좋은 것이 지구촌을 위해서도 좋다.” “내 편에 서지 않으면 적이다.” 독단과 배제, 강요와 억지의 논리가 판을 쳤다.
‘풀뿌리’ 방식으로 바꾼 뒤그럼에도 민주당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다. 이라크의 망령이 워싱턴 정가를 배회했지만, 2004년 대선에서 또다시 고배를 들어야 했다. 민주당은 “목이 잘려나간 닭 신세”라거나 “다 된 밥에 재 빠뜨리는 재주만큼은 탁월하다”는 비아냥을 감내해야 했다. 다만 한 가지 수확은 그해 8월 전당대회에서 격정적인 연설로 중앙정치 무대에 데뷔한 일리노이주 상원의원 출신의 신예 버락 오바마의 발탁이었다. 그는 그해 11월 선거에서 연방 상원으로 진출하는 데 성공했다.
잇단 대선 패배는 특단의 대책을 요구했다. 지도부 교체는 그 시작이었다. 2004년 대선 후보 당내 경선에서 파단을 부르다, 잇단 말실수로 중도 하차한 하워드 딘 전 버몬트 주지사가 전면에 나섰다. 민주당 주류 진영에서 ‘급진파’란 평가를 받는 딘 전 주지사는 안팎의 견제에도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이유로 2005년 2월 대선 패배의 충격에 빠진 민주당을 일으켜세워야 할 책임을 맡은 전국위원회(DNC) 의장에 취임한다.
딘 의장을 중심으로 민주당은 전면 개혁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우선 선거전략부터 수정해야 했다. ‘격전지’에 집중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모든 지역과 계층에서 고른 지지를 얻어내겠다는 의지를 담은 ‘50개주 전략’이 마련됐다. 미 전역의 선거구별로 풀뿌리 조직을 세워, 이들을 중심으로 지방선거와 연방선거를 치러내겠다는 전략이었다. 정강정책 정비사업도 이어져, 선거전에서 쓸데없는 논쟁을 피하기 위해 두루뭉수리하게 표현했던 것을 고쳐 쟁점에 대한 의견을 단순명료하게 정리해나갔다.
선거자금 역시 인터넷을 활용한 ‘풀뿌리’ 방식으로 바꿔 나름의 성과를 거뒀다. 2005년 민주당 전국위가 연방선관위에 보고한 정치자금 내역을 보면, 그해 상반기에만 민주당은 8530만달러를 모금했다. 이는 선거가 없었던 2003년 상반기에 비해 50% 늘어난 수치다. 같은 기간 집권 공화당의 정치자금은 단 2% 늘어나는 데 그쳤다. 2006년 민주당의 상하 양원 탈환은 이렇게 다져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민주당의 ‘대선 3수’는 2006년 중간선거 다음날부터 시작됐다.
따지고 보면, 그리 어려운 싸움도 아니었다. 안하무인으로 버틴 외교·안보 정책은 이미 무너져내린 뒤였다. 절정에 이르렀던 부동산 거품은 2007년 들어 서서히 빠지기 시작했다. 미국을 받치고 있는 두 축인 외교·안보와 경제가 근본부터 흔들리기 시작한 게다. ‘잃어버린 세월’은 이럴 때 꺼내 쓰는 말이다. 마침내 금융위기가 9월 중순 미국을 시작으로 전세계를 강타했다. 구제금융으로 연방예산 7천억달러가 금융권에 긴급 투입됐다. 더 이상 ‘작은 정부’는 구호가 될 수 없었다. 자유시장·자율규제도 허상임이 드러났다. 월스트리트의 파국은 거기서 시작됐다. 조세 감면 정도로 무너진 경제를 되살릴 수 없음은 자명하니, “민주당이 집권하면 세금폭탄을 만날 것”이란 ‘양치기 소년의 외침’도 더 이상 마술을 부리지는 못했다. 30년 가까운 세월 위력을 발휘해온 ‘레이거노믹스’에 대한 사망선고였다.
클린턴 행정부에서 배울 것레이건 행정부 시절 백악관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냈고, 부시 행정부의 사회보장제도 부분 민영화를 적극 옹호했던 마틴 펠드스타인 하버드대 교수마저 지난 10월30일치 에 쓴 기고문에서 경기부양을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재정 지출을 촉구하고 나섰다. 는 최신호에서 이를 두고 “기후변화를 막기 위한 노력으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앨 고어 전 부통령이 화석연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표현했다. 정부의 시장 개입은 이미 부시 행정부가 발벗고 나섰다. 이념의 패러다임이 바뀐 게다.
사상 최초의 흑인 대통령 탄생으로 막을 내린 미 대선 드라마의 ‘주연’은 단연 오바마 당선자다. 다만 수많은 ‘조연’의 빛나는 연기가 한몫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14년 만에 의회까지 장악했으니, 안팎에서 불어온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조건은 두루 갖춰졌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집권 2년 만에 상하 양원을 공화당에 넘겨주며 보수 대반격의 빌미를 제공한 클린턴 행정부의 쓰라린 경험에서 배울 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담대한 희망’에 기대를 거는 건 미국인만이 아니지 않은가.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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