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경기침체가 불안하다면, 떠오르는 신흥시장에 투자하시라.”
지난해 12월17일 은 ‘투자자들, 신흥시장에서 안식처를 찾다’란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썼다. 유럽과 아시아 각국의 신흥시장이 미 증시의 등락과 상관없이 독자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 있다고 보는 이른바 ‘디커플링(분리·절연) 이론’에 기댄 기사였다. 실제로 이 무렵 미 다우지수의 흔들림에도 신흥시장은 꿋꿋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이내 전세계를 소용돌이 속으로 휘몰아갔다. 한때 세계 경제성장의 ‘견인차’였던 미국이 금융패닉의 ‘진앙지’로 돌변한 탓이다. 혼돈의 여름을 지나고, 10월12일 은 다시 썼다. “디커플링 이론이 현실에 들어맞기엔 아직 때가 이른 듯싶다.” 사례를 찾기 위해 먼 걸음 할 필요도 없겠다.
11년 만에 깬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발등의 불은 일단 꺼진 걸까?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 소식이 전해진 10월30일 원화 가치가 치솟으면서, 서울 외환은행 본점에서 외환딜러들이 바삐 주문을 내고 있다. 한겨레 김경호 기자
“한국의 외환보유고는 2580억달러로 세계 6위 수준이다.” 지난 7월까지만 해도 정부는 여유를 부렸다. 올 1월2일 1달러에 936.6원에 거래됐던 원화는 1분기 내내 안정세를 유지해왔다. 4월29일 1001.5원을 기록하면서 약간의 부담이 더해졌지만, 월스트리트가 금융위기 광풍에 휩싸이기 전까지는 1천원대를 벗어나지 않았다. 정부가 호기를 부릴 법도 했던 게다.
하지만 9월 들어 환율이 1100원대를 돌파하면서 상황이 판이해졌다. 이윽고 10월 들어 본격 폭등세가 시작됐다. 10월8일 1415원까지 치솟은 환율은 10월22일 1418.5원으로 천장을 높였고, 10월27일과 28일 잇따라 1441.7원과 1467.8원까지 치고 오르며 1500원대를 육박했다. 아찔한 순간이었다. ‘위기다, 위기가 아니다.’ ‘심각하다, 전혀 그렇지 않다.’ 정부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환율 폭등과 증시 폭락 사태가 이어지면서, 세계 언론들은 앞다퉈 ‘임박한 위기’를 경고하고 나섰다. 특히 위기 국면이 본격화한 10월 들어선 경고음의 데시벨이 갈수록 높아졌다.
“주요국 통화 가운데 최악의 환율 폭등세를 보이면서 올 들어서만 26%나 가치가 떨어진 원화 시세는 시중은행들이 해외 단기채무 상환 압박에 직면하면서 1400원대까지 떨어질 게다. …한국 원화는 앞으로 6개월 안에 10%가량 더 가치가 폭락할 것으로 보인다.”(10월6일자 보도)
“(한국 시장은) 세계 경제의 헤지펀드 혹은 아시아의 약한 고리다. …2002년부터 2007년 사이 대출 규모가 급격히 늘면서 예금 대비 대출 비율(예대율)이 139%까지 치솟았다. 신용평가기관 무디스의 자료를 보면, 올 2분기 한국 시중은행의 예금 대비 부채 비율은 150~180%까지 치솟았다. 아시아 대부분 국가의 예대율은 100%를 밑도는 수준이며, 말레이시아는 74%에 그치고 있다. … 더구나 한국의 가계부채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82%, 가처분소득의 148%에 이른다. …‘잠자는 숲 속의 미녀’가 오늘 서울에서 깨어난다면 자신이 11년 만에 잠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나 있을까.” (10월6일자 인터넷판 칼럼)
“한국은 아시아의 아이슬란드인가? …아이슬란드의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폭과 금융시스템의 해악을 놓고 볼 때 비슷한 상황이 벌어질 가능성이 가장 높은 나라는 한국이다. …한국은 아시아 국가 중 최대 규모의 경상수지 적자에 시달리고 있고, 아시아 평균 예대율이 82%에 불과한 데 비해 한국은 턱없이 높다. …투자자들도 급속히 한국 시장에서 빠져나가고 있다. 코스피 지수는 최고점에서 35% 가까이 빠졌고, 원화 환율은 외환위기 이후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10월10일자 보도)
비난하는 한편에선 애국심에 호소하고금융시장이 급박하게 돌아가면서 10월19일 정부는 국내 은행이 진 외화빚에 대해 1천억달러(약 130조원) 한도로 지급을 보증하는 내용을 뼈대로 하는 긴급 구제책을 내놨다. 또 300억달러를 은행권에 추가로 공급하는 한편, 한국은행이 국채 매입 등을 통해 시중에 자금을 충분히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조처에도 외국 언론의 ‘묵시록’은 멈출 줄 몰랐다.
‘충격-부인-분노-구제책 제시.’ 영국 시사주간지 는 10월23일치에서 “1997~98년 외환위기를 겪은 아시아 국가들 가운데 최근 역사가 되풀이되는 것을 목격하는데 한국이 가장 가까이 다가섰다”며 “주가가 폭락하고 환율 역시 올해 들어 30%가량 폭등했음에도, 한국 정부는 경제가 튼튼하며 은행의 유동성 확보에도 어려움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이 매체는 이어 “한국 정부 당국자들은 외국 분석가들이 무지하거나 자신들의 설명을 악의를 갖고 귀담아듣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커지고 있다고 비난해왔다”며 “그럼에도 1300억달러 규모의 금융권 지원대책을 내놓는가 하면, 이명박 대통령이 직접 나서 1997년 금융위기 때보다 심각한 상황이라며 국민의 애국심에 호소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금융위기가 전세계로 확산되면서, 많은 한국인들이 금융위기의 악몽에 다시 시달리고 있다.” 10월24일엔 가 나섰다. 신문은 서울발 기사에서 “지난여름 이후 외국인 투자자들이 급속도로 빠져나가면서 한국의 주가와 원화 가치는 30% 이상 폭락했다”며 “신용평가기관들은 한국 시중은행들의 유동성에 대한 우려의 시선을 높이고 있는 등 10년 전 외환위기 때와 소름 끼칠 정도로 흡사한 모습”이라고 전했다.
한국 경제의 ‘임박한 파국’을 내다본 것은 비단 언론만이 아니었다. 미 시티그룹은 10월8일 펴낸 ‘아시아의 외부적 취약성 평가’ 보고서에서 “각종 외부적 불안요인을 종합해볼 때, 세계적 유동성 위기가 지속된다면 아시아에서 가장 취약한 나라는 인도네시아·인도·베트남·필리핀 그리고 한국”이라고 지적했다. 신용평가 전문기관 무디스도 10월16일 내놓은 ‘아시아 은행시스템 전망’이란 보고서에서 “한국 은행권의 신용등급 전망은 아시아에서 가장 부정적”이라고 지목했다. 역시 높은 예대율과 외환 유동성 경색이 문제의 근원으로 꼽혔다.
“아시아 국가 가운데 전세계로 확산되는 신용경색 국면으로 타격을 입을 가능성이 가장 큰 나라는 한국이다.” 덴마크 최대은행인 단스케방크는 좀더 체계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했다. 단스케방크는 10월10일 펴낸 연구보고서에서 “가계·기업 할 것 없이 대출 규모가 지나치게 높고, 시중은행들은 해외 단기차입에 목을 매고 있다”며 “유가 등 원자재값 폭등으로 경상수지도 적자 폭이 누적되면서, 현 위기 국면이 계속되는 한 한국 경제와 원화 환율 모두 비틀거릴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위기 탈출?’ 강만수 기획재정부 장관이 지난 10월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열린 IMF-세계은행 연차총회에서 기조연설을 하고 있다. 한-미 통화스와프 체결로 환율이 일단 안정세를 되찾으면서 강 장관에 대한 퇴진 압박도 당분간 잦아들 모양새다. 연합
“은행권의 대출 총액이 GDP의 90%에 육박하고 있다는 점이 우려스럽다. 2000년 이후 지속적으로 높아진 은행의 예대율도 문제다. 전체 단기 채무가 GDP 대비 20%에 근접한 상태며, 이는 1997~98년 아시아 금융위기 당시의 수준이다. 국제수지를 놓고 봐도 자본의 흐름이 시장 상황에 부담을 더하고 있다. 경상수지, 자본수지 할 것 없이 외화 유출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의 국제수지가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 역시 1997~98년 외환위기 이후 처음이다.”
단스케방크의 이런 지적은 한국은행이 10월30일 내놓은 ‘9월 중 국제수지 동향’ 자료에 고스란히 통계수치로 나타나 있다. 올 들어 지난 9월 말까지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적자는 138억달러까지 쌓였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경상수지는 28억달러 흑자를 기록하고 있었다. 자본수지 역시 순유입 규모는 크게 위축된데다 증권투자 및 파생금융상품수지도 큰 폭의 순유출을 보임에 따라 47.8억달러 마이너스를 기록했다. 들어오는 외화는 줄고, 나가는 외화는 늘고 있다. 환율이 널뛰기를 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외국 언론의 ‘호들갑’이 근거 없는 억측만은 아니었던 게다.
“오늘 두 가지 좋은 소식이 신흥시장에 날아들었다. …바로 이런 조처가 절실히 필요했다.” 다니 로드릭 하버드대 교수는 10월29일 블로그(http://rodrik.typepad.com)에 올린 글에서 이렇게 썼다. 이날 오후 국제통화기금(IMF)은 1천억달러 규모의 단기 유동성 지원 프로그램(SLF)을 발표했고, 미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도 한국 등 4개 신흥시장과 각각 300억달러 규모의 통화스와프(교환) 계약을 체결했다. 로드릭 교수는 물론 올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폴 크루그먼 프린스턴대 교수와 제프리 삭스 컬럼비아대 교수 등도 그동안 신흥시장 유동성 지원에 국제사회가 발벗고 나서야 한다고 역설해왔다.
병 준 이가 약도 주듯, 미국발 금융위기로 휘청이던 한국 금융시장은 미국이 내준 통화스와프란 ‘우산’ 아래서 잠시 폭우를 피할 수 있게 됐다. 시장은 격한 반응을 보였다. 10월30일 주가는 사상 최대 규모인 11.95%(115.75포인트) 급등해 단숨에 1천 선을 회복하며 1084.72를 기록했다. 환율 역시 11년 만에 최대치인 177원 떨어지면서 1250원으로 거래를 마쳤다. ‘외환위기’란 발등의 불은 일단 꺼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안도의 한숨을 내쉬어도 좋은 걸까?
“3분기 GDP가 7년 만에 처음으로 0.3%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10월30일 미 상무부가 경기 관련 보고서를 내놨다. 개인 소비지출도 3.1% 둔화돼 1991년 경기침체기 이후 사상 처음으로 소비가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가처분소득이 1947년 이후 사상 최악인 8.7% 감소한 탓이다. 4분기 들어 경기둔화와 지출감소가 더욱 뚜렷해진 상황이니, 상무부의 다음 보고서 내용은 더욱 기막힐 터다. 벌써부터 현재 6.1% 수준인 미 실업률이 내년엔 8% 이상으로 높아질 것이란 암울한 전망이 나오고 있다.
미 실업율 6.1%에서 더 높아질 듯그럼에도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느낀 걸까? 이날 미 다우 지수는 189.73포인트(2.11%) 상승해 9180.69로 장을 마쳤다. 〈AP통신〉 은 스티펠 니콜라우스의 수석 시장전략가 리처드 크리플의 말을 따 “(상황이 나빠지더라도) 삶은 계속돼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란 걸 보여준 장세”라며 “시장이 한동안 숨을 들이마신 탓에 언제고 숨을 내쉬어야 하는데, 지금이 그 시기”라고 전했다. 지뢰밭으로 변해버린 지구촌 금융시장, 언제 어디서 폭발음이 날아들지 알 수 없다. 한 걸음씩 조심스럽게 내디디며, 실물경제를 일으켜세우는 게 유일한 해법이다. 미국 경제가 다른 데서 뾰족수를 찾을 순 없을 터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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